주방에선 '불[火] 쇼'가 한창이었다. 화염 속에서 야채와 소스가 섞이고 국수와 육수가 더해지니 라멘 한 그릇이 뚝딱 만들어졌다. 조리모를 쓰고 손목 스냅만으로 프라이팬 속 재료를 뒤집어가며 불과 1분여 만에 일본식 라멘 한 그릇을 조리한 요리사의 원래 직업은 '목사'다. 김범석(46) 목사.
지난 21일 서울 우면동에 문을 연 '이야기를 담은 라멘집'은 탈북자들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실습장이며, 그들의 꿈을 키우는 인큐베이터다. 몇 년 전까지도 열매나눔재단 사무총장과 열매나눔인터내셔널 상임이사, 높은뜻연합회 이사 등을 맡으며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앞장섰던 김 목사가 이번엔 탈북민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새 실험을 벌이고 있다. 철저한 실전 교육을 통해 탈북민들을 자영업자로 독립시키겠다는 것. 현대자동차와 남북하나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장기전으로 준비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OK(원 코리아)셰프'. 우선 김 목사 본인이 잘되는 라멘집에 간청해 요리법을 배웠다. 공개 모집을 통해 75명의 응모자 가운데 1·2차 면접을 통해 20명을 선발했다. 지난 11월부터 이들을 5명씩 4개조로 나눠 학원에 보내 요리와 '배꼽인사'하는 법부터 친절교육을 받게 하고 있다. 또 하루에 한 조씩 '이야기를 담은 라멘집'에 출근시켜 주방과 홀 서빙을 실습시키고 있다. 또 앞으로는 취업, 창업 교육도 하고, 실제로 취업과 창업을 지원할 준비도 갖췄다.
탈북민들의 자립 돕기 위해 요리법·홀 서빙 등 창업 교육 김 목사 "내겐 이 식당이 교회"
22일 현장 실습에 나선 학생은 이성진(25·가명) 주예림(45·가명) 김유리(34·가명) 전정애(46·가명)씨 등이었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1년 전 탈북해 한국으로 온 이들이다. '이야기를 담은 라멘집'이란 옥호(屋號)는 다름 아닌 이들의 스토리다. 10년 전 조부모, 부모와 함께 탈북한 이성진씨는 청진에 살던 2000년, 다섯 살 아래 여동생을 잃었다. 굶어 죽은 여동생의 묘 앞 '돌상'(상석)엔 멀건 옥수수죽밖에 올릴 게 없었다. 이씨는 탈북하면서 요리사를 꿈꿨다. "배고픈 게 너무 싫고 힘들어서 맛있는 음식 만들어 실컷 먹고 싶었어요. 그리고 통일 되면 여동생 묘를 찾아서 맛있게 지은 밥 한 그릇 올리고 싶어서요." 대학에서도 요리를 전공한 이씨는 라멘집을 창업할 꿈에 부풀어 있다.
한국에 온 지 1년 된 주예림씨는 "북한에 있을 때는 식당서 돈 주고 밥을 사먹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배우는 것 하나하나가 낯설고 새롭다. 그래서 오히려 신이 난다고 했다. "요리를 배운 이후로 아침에 일어날 때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아이들이 기뻐서 학교 가듯이 매일 아침 학원에 나갑니다." 전정애씨는 "원래 요리에 취미가 없어서 아이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는데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집에서 이것저것 연습하는 걸 보더니 아이가 '엄마, 칼질이 좀 달라졌는데~' 하더라고요"라며 웃었다.
이들이 겪은 어려움은 말로 들어도 좀체 실감이 나질 않는다. 1998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 탈북한 전정애씨는 2003년 베트남까지 갔지만 거기서 북송(北送)됐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을까" 원망도 많았다. 김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기도 가운데 분명히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들은 성탄절을 앞두고 대한민국에서의 취업과 창업의 꿈이라는 선물을 받은 셈이다.
김 목사는 "저에겐 세상과 이 식당이 교회"라며 "20명 가운데 6명을 선발해 뜻있는 기부자와 연결해 실제 창업하도록 돕겠다. 100명의 사장을 길러내는 '백(100)사장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