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골퍼 최경주!
그는 대한민국이 배출한 세계 속의 스포츠 스타다.
최근에는 그를 모델로 한 제품들이 대박을 내고 있어 그의 가치가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하루 4000개 정도의 공을 연습한다는 CF 내용은 제품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오늘의 성공 뒤에 있었던 그의 끈기와 집념을 보여준다.
‘뼈를 깎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라는 그의 말 속에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아픔이 진하게 배어 있다.
주어진 환경이 척박하였지만 그 환경을 이용할 줄 알았기에 완도 명사십리 모래사장에서 연습하였던 벙커샷은 골프황제 타이거우즈마저도 한수 접고 들어간다.
초등학교 때 시작하여야 대성할 수 있다는 골프를 고등학교 1학년 늦깎이로 시작했기에 다른 사람보다 2배 3배 이상의 노력하여 성공한 최경주 프로의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걸쳐 얼씨구닷컴에 풀어 볼까 한다.
내가 최 선수를 처음 만난 것은 23년 전, 그가 완도수산고등학교 기관과 1학년에 다닐 때였다. 당시 나는 완도 공동묘지 앞에 70m 길이의 골프연습장을 만들어 놓고 운영하고 있었다.
1980년대만 해도 완도에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미역공장이 100여 개가 넘게 있었다. 이 미역공장 사장들을 대상으로 골프장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경험도 없이 시작한 일인데, 골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시골 사람들은 이 골프 연습장을 보면서 누가 닭을 키우기 위해 닭장을 크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최경주마저도 골프를 시작하기 전에 그 곁을 지나면서 “워메! 우리 동네에 큰 닭장 하나 생겼네.”라고 했다 한다.
골프연습장 지붕은 슬레이트로 덮었고 타석 옆과 뒷면엔 허리 높이만큼 벽돌담을 쌓았다. 공동묘지 근처라 인가가 없기에 완도 읍내 쪽과 공동묘지 쪽만 20미터짜리 철탑을 세우고 그물을 쳤다. 산 쪽과 천정에는 아예 그물을 치지도 않았다. 마당은 포크레인으로 다진 다음 흙을 깔고 앞쪽에 잔디를 심어 9개의 타석을 만들었다.
고무로 만든 연습볼 12,000개, 골프 클럽 풀세트 한 벌, 초보자 연습을 위해 7번 아이언은 6개를 준비했다. 교재는 부산에서 삼화 골프숍을 운영하던 최병록 사장이 준 골프교습서 1권이 전부다. 이 골프 교습서는 잭 니클라우스가 저술한 교습서를 이해하기 쉽도록 만화로 그려 놓은 책이다.
처음 골프를 시작한 최경주에게는 나의 자그마한 골프연습장과 단 한 권의 책만이 연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와의 처음 만남은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처음 골프연습장의 회원을 모집하자 미역공장 사장님들 20여 분이 등록해 주셨다. 연습장 문을 열기는 했지만 나도 골프를 잘 몰랐기에 부산에서 배전환이라는 세미프로도 어렵게 모셔 오고 해서, 일이 잘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을 연 지 사흘째부터 문제가 생겼다. 골프장 길이가 70m 밖에 되지 않는데다, 20m 높이의 철탑에 걸쳐 놓은 그물을 넘긴 볼이 그대로 공동묘지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2시간씩 볼을 치고 가면 1만 2천 개의 볼은 찬물에 거시기 줄어들 듯 눈에 보일 정도로 없어진다. 사람들은 누가 멀리 가나 경쟁적으로 볼을 넘기기 시작했고, 나는 공동묘지에서 볼을 줍는 것이 일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보완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철탑을 높이는 공사를 하고 천정에 그물을 쳐서 공동묘지로 날아가는 공을 잡았다. 그 전까지는 하루 300여 개씩 없어지던 공이 채 100개도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3개월 정도 지나자 배전환 프로가 떠나고 새롭게 박병호 프로가 왔다.
나는 이제 좀 연습장이 안정을 찾는 듯하여 골프 선수를 육성해 보겠다는 꿈을 아내에게 말했다.
반대할 줄 알았던 아내가 무슨 일인지 쉽게 승낙을 하여 완도중학교에 골프부를 창단하려는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후 아내가 중학교가 아니라 완도수산고등학교에 골프부를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이유인 즉 광주에 있는 큰 동서의 아들이 공부가 싫어 학교를 다니지 않으려고 하니, 완도수산고등학교로 전학시켜 운동이나 하면서 졸업장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원래는 중학생 정도가 골프를 시작하기 좋은 나이지만,
고민 끝에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애초 계획대로 완도중학교에 골프부를 만들었더라면 오늘의 최경주 선수는 없었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나는 완도수산고등학교 체육교사인 박현덕 선생을 만났고,
제의를 받은 박 선생은 교장선생님의 승낙을 얻어
1학년 학생 중에서 골프를 해보고 싶은 학생들의 지원을 받았다.
골프가 무엇인지를 모르던 학생들이었기에
신청자는 겨우 5사람이었다.
그 중의 한 명이 최경주 학생이었다.
처음 온 다섯 명 학생 중 네 명은 운동보다는 그저 노는 데 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골프부 학생들은 수업이 두 시간뿐이었는데, 2교시가 끝나면 점심을 먹어 버리고 연습장으로 올라와 운동하고는 했다.
그런데 골프의 기초를 지도하던 박병호 프로가 생활이 되지 않는다며 연습장을 떠나는 바람에 학생들의 지도는 내 차지가 되었다.
모자라는 실력을 보완하기 위해 없는 책을 백방으로 구해 골프 공부를 시작하고,
거울 앞에서 혼자 자세를 연구했다.
아마도 나에게는 그 때가 가장 열심히 운동하던 때였던 것 같다.
지도하다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광주에 있는 유남종 프로와 하남용 프로를 초청해 학생들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론 학생들을 위해서 보조 운동기구를 만들고 골프 체조도 만들었다.
보조 운동기구라야 겨우 쇠파이프로 도구를 만들어 폐타이어를 치도록 하고,
퍼터 연습도구를 만들어 1회에 300개씩 연습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퍼터 연습은 운동장 60m쯤에 홀컵 크기의 구멍을 뚫어 놓고 여기까지 볼을 쳐서 넣는 것이었다. 최경주 선수는 이 때의 연습방법을 회상할 때면 마당골프라고 부른다.
하반신 단련을 위해서는 200m쯤 아래에 있는 도정공장 사거리까지 기어서 내려갔다
오리걸음으로 올라오도록 시켰다. 다른 학생들은 내가 보이지 않으면 그냥 걸어서 오곤 했지만 최경주 학생만은 달랐다. 중학교 때 역도로 단련된 하반신이라 그런지 학생들을 뒤에서 밀면서까지 올라온다. 정말 놀라울 정도의 다리 힘이다. 그의 강단과 저력은 이후의 훈련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음~~
출처 - http://www.ulsigu.com 추강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