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철호 요한 신부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지혜서 1,1-7 루카 17,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스칸달론’,
영어로는 ‘스캔들’인데, 이 구절을 좀 더 분명히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들을 통하여
스캔들이 오는 자(스캔들을 일으키는 자).
’여기서 스캔들이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일종의 ‘걸림돌’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런 걸림돌을 놓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믿음이 약한 이들은 스캔들에 쉽게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분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오늘 지혜서가 이야기하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으로 죄를 분명하게 죄로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회개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살아가고자 한다면,
“다정한 영”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합니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식별과 “다정한 영”을 바탕으로 하는
용서의 경계를 결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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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훈 토마스 신부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지혜서 1,1-7 루카 17,1-6
많은 이의 신앙생활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제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내 선택과 결정이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내 아집과 욕심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는 생각이 오만인 줄은 압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책임자인 사제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는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면서
오히려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이 있겠지만, 그 ‘옳음’ 때문에 공동체가 화합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하다면, 그 옳음은 아마도 ‘그른 것’일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제로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사제는 공동체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생각은 “비뚤어진 생각”이며 “미련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공동체가 분열하여 그 구성원들이 하느님을 불신하거나
서로 미워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구보다도 사제에게 있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사도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청원이 바로 저의 청원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고집과 아집에서 비롯된 굴레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하여 한 발짝 물러서는 용기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자매를 걸고 바다로 내던져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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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지혜서 1,1-7 루카 17,1-6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지 말라고 강하게 이르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남을 죄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행위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않고 행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상대방이 상처받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남에 대한 배려가 절실하기만 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끝까지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용서하는 힘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상대방이 어떠한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그가 회개함으로써 변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면 상대방은 언젠가,
반드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처음부터 불가능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불가능한 일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닙니까?
반면 무슨 일을 할 때, 꼭 성취해야 한다는 태도로 끝까지 임하면, 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경우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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