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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道歷程(구도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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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방 스크랩 조선불교의 자존심 덕숭산 능인선원을 가다
묘법 추천 0 조회 94 08.12.11 10:0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이번 여름...8월말...

장마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던날
나는 예산, 덕산시장에 갔다가 내친길에 덕숭산 수덕사까지 간 적이 있었죠
 
비오는날 정혜사(능인선원) 선방까지 올라가는 길은 한적해서 좋았습니다
우산쓰고 수덕사 입구의 수덕여관에 들렸다가 견성암과 대웅전을 지나
덕숭산 꼭대기의 정혜사(능인선원)까지 올라 갔었죠
 
그 중 그때 올리지 못했던 수덕사 정혜사(능인선원)와 금선대 사진을 이번에 함 올려 보겠습니다
 
동안 거의 매일같이 포스팅을 했었지만 이번 여름에 수덕사에 갔을때 박어 놓았던 사진을
아직도 올리지 못한것이 있어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한 번 올려 봅니다
 
만공스님 수도했던 수덕사 정혜사와 금선대 !
초겨울로 접어드는 이 계절에 보시면 머리가 좀 시원해 질겁니다 ^ ^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고 수덕여관을 지나고 있을때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던 빗방울이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수덕사 금강문
 
일주문에서 약 300~400m 정도를 걸어 오니 금강문이다. 저 금강문 좌우로는 금강장사 같은 역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고 있는곳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머뭇거리지 말고 신속히 통과를 해야

금강역사들에게 불심검문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수덕사 사천왕문
 

역사들이 이두박근 삼두박근 근육을 움찔 거리며 째려보고 있는 금강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이제

고비는 다 넘겼다고 생각 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천왕문이 보인다

 
사천왕문은 좀 전에 지나 왔던 금강문의 역사들보다도 더 험악한 인상의 사천왕들이 방멩이, 용, 비파, 장칼 같은 요상한 무기를 들고 금방이라도 달려들듯이 째려보고 있는 곳이다  
 
눈을 부릅뜨고 불심검문 하고 있는 사천왕문의 천왕들
 
덕숭산 수덕사 대웅전
 
사천왕문을 지나 덕숭총림이란 관문을 지나면 대웅전이다. 수덕사 대웅전에 올라갔을때는 잠시 비가 그쳤다가 만공스님이 수도 했다는 정혜사 금선대로 오르고 있을때는 또 다시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능인선원(정혜사)으로 오르는 등산길
 
대웅전에서 서쪽 방향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이렇게 계곡길을 타고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는데 여기서부터 1천 2백개의 계단만 올라가면 송만공 스님이 있었던 능인선원(정혜사)이 나온다
 
능인선원(정혜사)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만난 소림초당
 
저 소림초당은 능인선원(정혜사)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으며 만공스님이 1920년대에 손수 세운 초당으로 90년전 모습 그대로이다
 
만공스님이 세웠다는 미륵불
 
만공스님의 스승인 경허스님은 시를 잘 썼고 만공스님은 돌을 잘 깍았다
내가 송만공 스님이 세운 미륵불을 처음 보았을때가 삼십여년전 수학 여행때의 일이었던것으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송춘희의 노래 가사대로 인적없는 산 길 백리 수덕사 길이었다
 
당시엔 덕산면에서 덕숭산 수덕사로 가는길은 자동차 한대 겨우 지날수 있는 비좁은 비포장 산길였
에 버스가 산을 오르는 동안 힘에 부쳐 으악 ~ 으악 ~ 연신 비명을 지르며 올라오곤 했었다
 
흙 먼지 펄펄 날리며 올라온 그때의 수덕사는 왜 그리 고즈넉하고 호탕하게 보였는지...
 
지나는 산 길에서 정혜사라고 불리는 능인선원이란 선방도 본 기억이 있었지만 그곳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곳인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한데 재작년에 어떤 인연이 있어 찾아가게 되었는데 30년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고 현대식으로 건축한 건축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바로 그곳은 동안거와 하안거를 치르는 납자들이 안거철만 되면 찾아 오는곳인데 내가 갔던 그 날은
아직도 하안거 중이라 일반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 거려 봤지만 통제를 할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일반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었으니까...
 
능인선원(정혜사) 앞에 세워진 만공탑
 
만공탑에서 능인선원(정혜사)으로 가는 석문
 
만공탑에서 능인선원(정혜사) 으로 가는 석문 
 
만공스님이 선원장으로 있었던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
 
저곳은 납자들이 동안거나 하안거를 하는 선방인데 100일 동안 밤낮없이 용맹정진을 하는 동안에는
일체 면회도 않되고 외부음식 반입도 안 되며 T.V. 라디오, 신문, 잡지책 등등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
곳이다. 인간세상으로 치자면 영창이나 유치장과 다름없는곳이라고 이야기하면 이해가 쉬울듯 싶다
 
저 능인선원 바로 아래쪽으로는 금선대라는 자그마한 암자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데 만공스님은
그곳에서 많은 후학도들을 배출시켰다고 한다
 
만공스님이 선원장으로 있었던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 경내
 
이곳은 만공선사가 많은 후학도들을 배출 시켰다는 수덕사 선방 정혜사(능인선원) 경내 모습인데
최근에 많은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건축물들이 모두 하나같이 칼큼한 모습들이다
 
정혜사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는 향적당
 
저 향적당은 원주실이 자리잡고 있는 수덕사 부속건물인데 최근에 세워진 건물이다
 
정혜사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는 향적당
 

능인선원(정혜사)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금선대  

 

 능인선원(정혜사) 바로 아래쪽에 있는 덕숭산 금선대

 
정혜사(능인선원)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금선대(金仙臺)는 1905년 만공스님이 손수 세웠다는데 만공스님 자신이 조실로 쓰면서 많은 후학도들을 탄생시킨 곳이라고 한다  
 
저 암자에는 초상화 세개가 걸려 있는데 가운데엔 경허스님, 오른쪽엔 만공스님,
그리고 왼쪽엔 수월스님이던가...하는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저곳은 일반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장소 였는데
재작년 안거때 어떻게 인연이 되어 들어가서 참배를 한 적이 있었다
 
금선대에 걸려있는 만공스님의 스승 경허선사 초상화
 
 나는 경허스님에 대해서 아는바가 거의 없다
다만 경허스님이 해인사 조실스님을 하면서 51세부터 56세까지
5년 동안 머물렀다던 해인사 퇴설당에 한 차례 다녀와 본것하고
수덕사 능인선원 바로 아래 만공스님이 살다간 조촐한 산채에서 보았던
경허스님, 만공스님, 그리고 수월스님이였던가...의 초상화를 봤었던것
이것이 내가 아는 경허스님의 전부이다
 
그리고 들었던 이야기로는 1849년생이라는 것과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여 그 후로
공주 동학사에서 경학을 배워 20대 초반에 강사가 되었다는것...
40대 중반에는 동래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51세부터는 해인사 조실이 되어
멸종되어 가던 조선시대의 선맥을 끝까지 유지 시켜온 인물이라는것...
 
선천적으로 대시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즉흥적이면서도 뛰어난 풍류시인인 동시에 당대의 선승이라는것...
 
그리고 해인사 조실생활을 하면서 범어사에 잠시 머물다
다시 해인사로 가는도중 그 누구에게도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불쑥 해인사의 퇴설당을 떠났다는것
그 후로는 아무도 경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것...
 
세월이 한 참 흐른뒤 그의 제자 수월스님이 어떻게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함경도 개마고원, 그것도 개마고원중에 2,000m가 넘는 험악한 산들이 첩첩히 겹쳐진
삼수 갑산의 웅이방에서 승려의 모습이 아닌 일반 유생의 모습으로
7년여 동안 오지마을 아이들에게 글이나 가르치다 
그 곳에서 생을 마감 했다는것이 내가 들었던 경허스님의 전부이다   
 
함경도 출신 이정호 작가의 함경도 삼수, 갑산,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감비 천불붙이"
(1974년 한국문학 발표, 80년대초 T.V문학관으로 방영)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지역은 예로부터 하늘을 나는 새조차 찾지 않는다는
산간벽지인 동시에 악명높은 유배지로 로 알려져 왔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주 최악의 상황으로 진퇴양난에 처해 있을때  
삼수 갑산에 가더라도 ~ 하고나 보자는
삼수 갑산에 가더라도 ~ 먹고나 보자 등등
그러니까 죽을때 죽더라도 먹고 싶은것 하고싶은것 하고나 죽자
이런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김소월도 삼수와 갑산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차안서선생(次岸曙先生)  삼수갑산운(三水甲山韻) - 김소월
 
삼수갑산 나 왜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메냐
오고나니 기험하다
아하 물도 많고 산 첩첩이라
 
내 고향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가네
삼수갑산 멀더라
아하 촉도지난(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삼수갑산 어디메냐
내가 오고 내 못가네
불귀로다 내 고향을
아하 새더라면 떠가리라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가네, 내 못가네
오다가다 야속하다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둡네
 
내 고향을 가고 지고
삼수갑산 날 가둡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1996년 고려문화사에서 발행한 김소월 시집에서 발췌)
 
함경도 출신 이정호 작가의 함경도 삼수, 갑산,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감비 천불붙이"
1920년대 함경남도 무진 대홍수로 인하여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개마고원으로 이주하고 있는 장면
(1974년  한국문학 발표, 80년대초 T.V문학관으로 방영)
 
삼수갑산은 물이 맑고 산이 깊어 호랑이를 비롯하여 온갓 산짐승들과
송이를 비롯한 귀한 약재들이 많이 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지대에 속하고 눈도 무지막지 하게 쌓여
겨울에는 평균기온 영하 20도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함경도 출신 이정호 작가의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감비 천불붙이" - 감자 수확하는 장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감자나 옥수수 같은것을 주식으로 하고
쌀과 같은것은 여간해서 구경조차 하기 힘든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삼수(三水)나 갑산(甲山)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감자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한다 
 
함경도 출신 이정호 작가의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감비 천불붙이" - 감자 수확하는 장면
(80년대 초, T.V문학관으로 소개된 함경도 개마고원의 "감비 천불붙이")
 
삼수 갑산의 처녀들도 어려서부터 감자를 캐고 찧고 빻고 깍고 쪄먹느라
감자 다루는 솜씨는 이골이 났다 해서 일 잘하는 사람들을 비유하여
삼수 갑산 큰애기들 자주 감자 굴리듯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이렇듯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식량도 궁핍한데다
매우 춥고 교통도 불편하지만 심산유곡과 푸른 내(川)가 어울어져 있는 마을이라
풍광이 빼어나고 산수가 수려하여 한 번 들어가면
번잡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싫을 정도라 한다
 
지도상으로 보면 그 지역에는 절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는 곳도 없었고
또 이렇다 할 사찰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본적도 없는것 같았다
그래서 말년에 경허가 더욱 선택하게 된 곳이 삼수와 갑산 이었을까 ?
 
경허의 수제자 만공은 스승 경허가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웅이방에서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자 
놀라 통곡을 하고는 다음과 같은 추모송을 읊었다 한다
 
善惡過虎佛 이여 是鏡虛禪師 로다  (선악과호불 이여 시경허선사 로다)
 
向什摩處去 요 醉臥花中睡 로다      (향십마허거 요 취와화중수 로다)
 
그 사납긴 범보다 더하고 착함은 부처를 넘는다
이것이 경허스님의 참 모습 이시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취하여 꽃밭속에 누웠도다
 
스승 경허의 전 생애를 아주 간략하게 두줄의 글로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살때는 온몸으로 뛰어들어 온 몸으로 살다가 죽을때는
철저하도록 자신의 흔적을 티끌만큼도 남기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
 
금선대에 걸려 있는 경허스님의 제자 만공스님 초상화
 
만공은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하여서
<七仙女臥仙>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일화가 있다
 
어떻게 들으면 세간 사람들에게 공연한 오해의 소지를 살 수 있는 일화 이지만
만공은 법도를 뛰어넘어 거침없이 무애자재 했다는 호기때문에 존경 받았던 분이기도 하다
 
만공이 입적을 할 당시 저녁밥을 맛있게 들고는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독백 하기를
" 이 사람 만공 !
자네와 나는 70여년 동안 동고동락 해왔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하고는 요를 펴고누워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라 아니할 수 없다  
 
만공스님은 1871년 전북 태인에서 태어나 8.15 해방 다음해인 1946년 이곳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14
세때인 1885년 충청도 계룡산 동학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서산 천장사에서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덕숭산 자락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은 멸종 되어 가던 조선시대의 선맥을 끝까지 지켜온
당대의 선승 경허와 만공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금선대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본 덕숭산 골짜기 풍경
 
만공선사가 깨달음을 펼치며 사자후를 토했던 덕숭산 금선대에서 바라본 산하대지
 
이곳이 바로 만공스님이 8.15 해방 그 이듬해까지 수도 하다 입적한 곳이라고 한다  
그때 만공스님의 세수 75세 법랍 62년이었다
 
13세때 공주 동학사에서 처음 출가하여 이곳에서 약 40여년간 보냈으니까
60년 수도 생활중 거의 반평생 이상을 이곳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에서 보낸 셈이다
 
경허선사의 맏상좌 수월스님은 충남 홍성 사람이고 만공스님은 전북 정읍 태인 사람인데
13세때 부친이 돌아 가시자 어머니가 여승이 됨에 따라 중이 되었다  
 
어머니를 따라 공주 동학사로 출가한 만공스님은 소년시절부터 참선에 정진했고
1900년경 30세 되던해 이곳에 정혜사(수덕사 선원)의 선원장이 되어 수많은 납자들을 배출했다
 
드넓게 펼쳐진 내포평야 한 가운데 우뚝솟은 덕숭산인지라
아침에 저 동쪽 들판에서 해뜨는 모습과 서쪽으로 해 지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곳이고  
멀리 산골짜기 사이로 홍성읍의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오는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깊은 산속에서 속세의 모든 움직임들을 한 눈에 간파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세속의 환영과 같은 모습을 멀리서 훤히 내려다 볼 수가 있었으니 물위의 거품과 같고
들판위에 아지랑이 같이 일어났다 꺼지는 세속의 모습들이 매일같이 눈에 보였었으리... 

 

  Kitaro - 사주지로∼흑수성의 환상 (Silver Moon)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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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2.12 17:08

    첫댓글 만공스님의 수행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사찰이네요. 가보고 싶은 절이 또 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 09.01.12 20:21

    만공탑에 새겨진 보리법문:"삼보리가 무엇입니까? "보리는 쌀보리 가을보리 육모보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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