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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컴퓨터의 해상도로 작업하느라 틀이 약간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
가장 냉혹하며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이었던 군주
'체사레 보르지아'
<체사레 보르지아 Cesare Borgia ? ~ 1507>
[목 차]
1. 시대적 동향과 군주론 (서론)
2. 체사레 보르지아의 일대기에서 보는 군주의 기질 (본론)
1) 체사레 보르지아의 일대기
2) 체사레의 내면을 보여주는 사건 - 가족사
3)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입각한 체사레의 군주적 기질
3. 이상적 군주 체사레 보르지아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미 (결론)
1. 시대적 동향과 군주론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는 지금처럼 단일국가가 아닌 피렌체, 밀라노 공국, 교황령, 나폴리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의 군소국가들의 모임이었으며 힘과 세력에서 별 볼일 없는 작은 국가들의 집합이었다. 이러한 분열기의 이탈리아는 불안정한 정치상황 속에서 어떠한 문제나 분쟁이 생겼을 때 스스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이태리 본토는 주변에 있던 강력한 군주국이던 프랑스, 스페인 등 외국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림을 당해야 했음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이 당시 군주론을 집필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하급 외교관으로 파리에 파견되어 일하면서, 수년간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국내, 국제적 현실 정치의 맥락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습득하였다. 이것을 기초로 그는 《군주론》을 집필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외교경험과 함께 체사레 보르지아라는 소군주가 보여준 현실 정치적 행태들을 상당부분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체사레 보르지아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했던 군주로서, 그 자신이 교황의 아들이라는 점(기독교적 권위)과 갖은 책략(배신, 사기, 암살 등)을 이용하여 잠시지만 이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던 인물이었다. 냉혹하고 비도덕적 모습이었던 그가 어떻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이 될 수 있었는지 알아보자.
<체사레 보르지아 Cesare Borgia ? ~ 1507>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의 분열기>
- 32세에 생을 마감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이라 불리었으며 - 체사레 보르지아는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카이사르가 아니면 無" 야망을 갖고 있었다.
"운명이 다하는데 까지 갈 생각이다. 설령 그것이 죽음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라는 말을 남긴것으로 유명하다.
2. 체사레 보르지아의 일대기에서 보는 군주의 기질
1) 체사레 보르지아의 일대기
체사레 보르지아의 출생과 그 시기는 확실치는 않지만 아버지의 정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반노차 카타네이가 낳은 아들이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반노차와 로드리고 사이에 태어난 4명의 자녀(체사레·후안·루크레치아, 조프레) 중에서 맏이었고, 로드리고의 아들 중에서는 둘째였다. 둘째 아들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그도 관습에 따라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고 1480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는 그가 성직을 가질 수 있도록 사생아라는 오명을 벗겨주었다.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르, 루크레치아>
1489년에 그는 페루자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피사대학으로 옮겨 유명한 법학자인 필리포 데초 밑에서 공부했고 교회법과 민법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1491년에 그는 팜플로나 주교가 되었으며 아버지가 교황에 즉위한 후인 1492년에는 발렌시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492년에 아버지인 알렉산데르가 교황으로 선출되며 그는 대주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1493년에는 명의(名義)성당인 산타마리아노바 교회를 맡은 추기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진정한 종교적 소명의식이 없었다. 결국 1498년, 23세 때 추기경의 지위 포기하며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그의 야망이 들어난다.
그는 교황 특사로서 프랑스에 갔으며, 국왕 루이 12세와 친숙해져 발렌티누아공작이 되었다. 프랑스의 원조로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영주들을 정벌하였으며, 1501년까지 로마냐 지방을 정복하여 지배영역으로 만들었다. 또 나폴리왕국에도 침입하여, 밀라노 ·피렌체를 위협하였다. 이 때 마키아벨리는 마지막 원정에서 피렌체 편으로 가담하여 체사레의 정복활동을 지켜보게 된다. 유명한 마조네 음모로 한때 위기에 처했던 그는 음모의 주동자들을 모두 체포하고 처형하며 다시금 그의 목표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알렉산데르가 죽고, 보르지아가(家)의 숙적(宿敵)인 율리우스 2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자 그의 힘은 급속도로 약해지고 만다. 율리우스 2세는 체사레를 로마냐 공작과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승인을 거부하고 로마냐 지방의 도시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였으며 결국 체사레는 요구에 동의하며 나폴리로 탈출하였다. 하지만 스페인 부왕 곤살로 데 코르도바에게 또다시 체포되며 그는 스페인으로 압송되었고 발렌시아 근처의 친치야 성에서 메디나델캄포로 이송된다. 그는 1506년, 31세 때 탈출하여 처남인 나바라 왕에게 의탁하였지만 1507년, 32세 때 비아나 외곽에서 나바라 반역자들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다가 사망하게 된다. 그의 유해는 비아나의 산타마리아 교회에 매장된다.
2) 체사레의 내면을 보여주는 사건 - 가족사
체사레 보르지아의 일대기의 몇몇 사건에서는 그의 내면의 냉혹함이 여실히 들어난다. 특히 그의 가문인 보르지아 가문은 음모, 독살, 음란 등 당대 좋지 못한 소문들이 끊이질 않았고, 이것은 후세에도 보르지아 가문에 대한 선입견으로 남을 정도였다. (예로 보르지아 가문에 대한 영화가 '피의 재앙을 부르는 잔인한 탐욕의 역사 화려한 핏빛 제국 보르히아: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 이라는 메인카피로 제작 되었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보르지아 가문에 대한 비호감적인 감정을 들어내는 주인공의 대사가 나온다.) 특히 체사레 보르지아는 자신의 야망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피붙이마져 이용한 냉혈한으로 평가 된다.
먼저 첫 사례로 그의 동생 후안 보르지아의 살해설이다. 1488년에 이복 형 페드로 루이스가 죽자 간디아 공작 칭호는 체사레를 건너뛰어 그의 동생인 후안에게로 넘어갔고, 1496년에 알렉산데르가 반항적 귀족인 오르시니 가문을 쳐부수기 위해 첫번째 원정대를 조직했을 때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도 후안이었다. 체사레는 동생을 지나치게 질투했다는 평판을 받았고 1497년에 후안이 수상쩍은 상황에서 살해되자 그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는 그 후의 삶에서 입증했듯이 능히 살인을 저지를 만한 인물이었지만 후안 역시 많은 적을 두고 있었기에 그가 동생을 죽였다는 확증은 없었다.
다른 사례로 체사레는 그의 정치적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동생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루크레치아는 희대의 미모의 소유자로 굉장한 미인이었고 전해지는데 이를 이용한 체사레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루크레치아의 남편을 죽이거나 이혼시켜 모두 세 번의 정략적 결혼을 시켰으며 그 때문에 루크레치아는 자신의 삶보다는 가문에 의한 삶을 산 여인으로 권력욕에 희생당한 보르지아가의 천사라는 호칭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또한 치사레는 루크레치아를 끔찍이 위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해 후일 루크레치아와 근친상간 관계라는 소문까지 퍼질 정도였고 한다. 또한 그는 루크레치아를 안은 남자는 모두 없애버린다는 소문이 생길 정도로 루크레치아의 남자들을 살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Lucrezia Borgia,1480~1519>
- 체사레의 여동생으로 가문을 위한 삶을 산 비운의 여인으로 후세에
동정어린 시선과 악녀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그는 상당히 비도덕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허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지아를 군주론의 역할모델로서 그렸으며 가장 성공한 현실적인 이상적 군주로 그를 내세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입각한 체사레의 군주적 기질
비도덕적인 행실과 냉혹한 체사레 보르지아가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이상적인 군주가 되었던 이유는 당연히 체사레 보르지아가 마키아벨리가 생각한 군주형과 가장 근접했기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는 군주의 도덕이 있고, 일반 국민에게는 그들의 도덕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통치자의 윤리와 피통치자(국민)의 윤리는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가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 만약 필요하다면 일반 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윤리를 지키지 않더라도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지아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담성, 세심성, 행동에 있어서의 기만과 잔인,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호한 태도 등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마이키아벨가 체사레 보르지아를 여우와 사자의 특성을 모두 지닌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여우는 함정을 피할 수 있으나 늑대를 이길 수는 없다. 사자는 늑대를 이길 수는 있으나 함정을 피할 수는 없다.’ 라는 말로 군주가 갖추어야할 모습을 묘사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군주는 그 동물적 본성을 숨기고 연기자와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 했다. 여기서 여우는 지략을 함정은 모략, 위기를 나타내며 사자는 힘을 늑대는 외세, 적을 의미한다.
체사레는 프랑스왕과 다른 외부 세력 모두를 믿지 않고 자신만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적을 치기 위해 위험한 외부세력을 끌여들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종속된 그러나 자신에게 칼날을 들이 밀 수 있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있어 외부 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재물을 써 그들의 환심을 얻고 미사여구로 그들을 안심시켜 화해를 도모한 뒤 방심한 정적들을 사로잡아 죽이고 그 수하들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다.
<사자와 여우의 그림으로 합성된 마키아벨리의 초상화>
-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여우와 사자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와 같은 다소 비열한 방식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지만 정치를 잘해 자신이 다스리던 로마냐 지역과 우르비노 공국을 번영시켰고, 백성들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추어진다.
"로마냐 지방을 정복했을 때 체사레 보르지아는 이 지방이 국민을 올바로 다스리기 보다는 그들의 것을 탈취하고, 국민을 결속으로 인도하기는커녕 분열의 원인을 만드는 그런 무능한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이 지방에 평화를 회복하고 군주의 지배력을 높이려면 좋은 정치를 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냉혹한 가신 레미로 데 롤카에게 큰 권한을 주어 로마냐에 파견했다. 그는 단기간에 평화를 회복하고 대단한 명성과 더불어 통일을 이룩했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데 롤카 대신 자기가 민중의 미움을 사는 것이 두렵고, 이 이상 그에게 과도한 권한을 맡기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영내에 재판소를 설치하고 훌륭한 장관을 임명했다. 또 도시마다 자신들을 위한 변호사를 둘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엄격함이 다소나마 민중으로 하여금 증오를 느끼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안 체사레 보르지아는 민중의 이 감정들을 씻어 주고 민심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했다. 지금까지 잔혹할 만큼 엄격했던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 데 롤카의 가혹한 성격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어느 날 아침 체세나의 광장에 두 동강이 난 데 롤카의 시체를 널빤지 한 장과 피투성이 칼 한 자루와 함께 효시했다. 이 처참한 구경거리에 민중은 만족하는 동시에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한길사, 1996) 중에서(219쪽 - 220쪽)」
체사레 보르지아는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에게 이렇게 레미로 데 롤카를 처형시킴으로써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화해기분으로 달려오는 반란자들을 정겹게 껴안은 다음에 몇 분 후 여덟명의 심복에게 신호를 보내 반란자들을 붙잡아서 주모자 전원을 살해했다고 한다. 물론 그 뒤에 "이탈리아의 화근을 멸한 것이오"라는 말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정치적 모습에서 자신이 생각한 군주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마키아벨리의 이상적 군주의 역할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힘없는 작은 나라들이 서로 힘을 겨루고 있던 난세였기 때문에 군주의 모습 역시 난세를 종결시킬 수 있는 진시황이나 조조와 같은 용맹과 지략을 지닌 패왕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 마키아벨리는 그를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 [군주론 The Prince] - 책표지
- 16세기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역사학자·정치이론가. -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으로 메디치 왕정하에서
대표작《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가 생겼고, 근대 정치사상의 "활동적인 공직"으로 복귀하고자 <군주론>을 메디치
기원이 되었다. 군주의 자세를 논하는 형태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군주들에게 헌정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하였다.
3. 이상적 군주 체사레 보르지아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미
체사레 보르지아는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위대한 군주의 자질을 지니고 있는 자로 평가받은 인물로 호평 받는 동시에, 분열기를 이용하여 정권을 획책하려 시도한 비도덕적인 폭군이라는 혹평을 듣는 등, 지극히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에 혹평이 있을지라 하더라도 한때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 군주로서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 하려던 그의 야망과 목표 달성을 위해 보여준 그의 역량, 32살의 짧았지만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은 산 체사레 보르지아. 그의 마초적인 모습에는 충분한 매력이 있으며 이것이 현재 그를 주인공으로 한 혹은 그를 중심인물로 놓은 많은 서적과 심지어 대중 문화 속 만화책과 게임에서도 그를 찾아 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밑에 그림들은 이에 대한 자료이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 책표지 <보르히아 LOS BORGIA> - 영화 포스터
- 저자 시오노 나나미 - 르네상스의 주역 중 하나인 보르히아(보르지아)가의
교황의 아들이라는 이단아로 출생, 잔혹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야심가라는 흥망성쇠를 다룬 영화.
평가 속에 가려져 있던 체사레 보르자의 삶을 현실주의자의 '우아한 냉혹'으로
복원시키는 시각이 새롭다.
<창세기 외전> <칸타렐라>
- 게임과 만화 속에서 체사레를 모티브로한 인물들
체사레 보르지아를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 당시 분열된 이탈리아의 시대적 배경에 맞추어 그에 맞는 군주에 대하여 집필된 것으로 오늘날 현실과는 상이한 부분이 존재함이 사실이다. 그 부분이 바로 도덕성으로 이 때문에 그가 주장한 이상적 군주의 모습 또한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분명 오늘날 우리나라의 한 대통령 후보가 도덕적 문제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체사레 보르지아가 현재의 이상적 군주라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정치적 카리스마와 뛰어난 행정가적 능력, 대담한 행동력 등은 정치가들에게는 반드시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그의 야망은 비록 우리 개인의 것들과는 모두 다를지라도 목표를 위한 갈망과 그것을 위한 노력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