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 崔海(1895-1948)】 "북로군정서 여단장으로 청산리전투 참가"
1895년 2월 17일 강원도 울진군(蔚珍郡, 현 경북 울진군) 원남면(遠南面) 덕신리(德新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단사(檀史)이며, 이명은 최해일(崔海日)이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흥업단(興業團)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7년 4월 남만주(南滿洲) 화텐현(樺甸縣) 관가(官街)로부터 약 30지리(30支里)에 위치한 두도하자(頭道河子)에서 심규섭(沈奎燮)·임운집(林雲集)·권전세(權全世)·박영득(朴永得)·김종성(金鍾聲)·조의석(趙義錫)·김정범(金正範), 이관식(李寬植)과 함께 길창학숙(吉昌學塾)을 설립하였다. 길창학숙 서기(書記)에 선임되었다.
1918년 4월 13일 지린(吉林) 소동문(小東門) 외(外) 정안립(鄭安立)의 집에서, 4월 14일 지린 소동문 외 중국요리점 양양관(羊陽館)에서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에 정안립·여준(呂準) 등 21명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임원 선거, 규칙 공포, 회관 건축, 은행 설립, 수전(水田) 개척 등 11개 안건이 처리되었다. 이때 김유성(金有聲)·이대홍(李大洪)·정단(鄭丹) 외 20명과 함께 동성한족생계회 평의원(評議員)에 선임되었다. 동성한족생계회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韓人)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손일민(孫逸民)·김문삼(金文三)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산포(山砲) 2문, 총기 약 200정을 확보하였다. 1919년 3월 하순부터 5월 상순에 걸쳐 길창학숙에서 청년 100여 명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4월 26일 군사훈련을 마친 인원 중 선발대 50여 명을 하이룽(海龍)·차오양전(朝陽鎭)·펑톈(奉天)을 거쳐 국내로 파견하였다. 5월 6일 중국 측에서는 보병 20명, 순경(巡警) 15명을 파견하여 나머지 독립군 부대원을 해산시켰다.
1919년 8월 김좌진(金佐鎭)의 요청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김춘식(金春植)·오상세(吳祥世)·박영희(朴寧熙)·백종렬(白鍾烈)·강화린(姜化麟)·이운강(李雲崗) 등과 함께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로 이동하여 독립군 부대 대원을 양성하는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왕칭현에서 정의단(正義團)을 개편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조직되었다. 북로군정서 여단장(旅團長)에 선임되어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가하였다.
1922년 3월 5일 대종교(大倧敎) 종회(宗會)에서는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와 동이도본사(東二道本司)의 관할 구역을 획정하고 교구분리조례(敎區分理條例)를 발표하였다. 동일도본사는 간도 옌지(延吉)에 설치되었다. 김동삼(金東三)·서일(徐一)·조소앙(趙素昂)·나중소(羅仲昭)·현천묵(玄天默) 등과 함께 동일도본사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 간도 옌지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이 조직되었다. 고려혁명군은 자유시참변 이후 독립군 부대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단체이다. 고려혁명군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훈련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