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이야기>
13. 진구지와 검은구지
옛사람들은 아주 먼 미래까지 예견하는 능력이 있었는가! 우리가 사는 마을의 이름은 언제, 어떻게 붙여졌는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 이름의 뜻이 현재의 상황과 아주 딱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예스러운 맛이 담긴 지명도 있다. 오리정(五里亭)이라든지 장승박이, 선너머 마을 등. 오리정은 중심지역에서 오리쯤 떨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부안읍에서 주산쪽으로 오리정도 떨어진 곳에 오리정이란 마을이 있고, 전주에서 남원을 가다보면 남원읍에 들어서기 직전에 오리정이란 지명이 있다. 장승박이는 마을을 들어오는 고갯길에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서 마을 어귀나 길가에 세운 푯말이지만, 지금의 도회지로 들어가는 도로의 고갯마루에 이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선너머 마을 역시 도시로 들어오는 고개정도에 있는 마을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의 특징이 잘 들어난 이름으로는 정읍(井邑)이다. 주변 땅 속에 물이 풍부하여 어디를 뚫어도 맑은 샘물이 펑펑 쏟아진다하여 정읍이라고 하며 순수한 우리말로는 샘골이라 한다. 또, 정읍시 영원면의 수성리(水城里: 물의 성이란 뜻)는 원래 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마을이었는데 계화도 간척공사 후 그곳으로 물을 보내기 위한 물길이 성처럼 만들어져 마을 주위를 돌아서 간다. 이것을 어떻게 알고 옛적 사람들이 예견하여 수성리(水城里)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정읍시 산외면 온수리(溫水里)는 따뜻한 물이 솟아 온천으로 개발되었고, 칠보면의 아주 깊은 산골에 수청리(水淸里)나 수곡(水谷)도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지어진 지명이다 김제시에도 그런 곳이 많다. 황산(黃山)은 이 지역의 대부분이 황토로 이루어져서 일컬으며, 넓은 평야에 적합한 지명으로 광활(廣闊)면이 있고, 금구(金丘), 금천(金川), 금산(金山) 등은 옛적 사금이 많이 나와 금을 채취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지명을 보고 그 지역에서 많은 사금(砂金)을 채굴해 갔다고 하며, 지금도 이 지역의 곳곳에는 당시에 금을 채굴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는 그 지역 이름과 그 지역의 특성이 맞게 지어진 이름이 많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부안군 동진면의 이름도 그렇다. 동진(東津)은 동쪽에 있는 나루터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그때 유유히 흐르는 동진강은 부안과 김제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왕래를 해야 되는데 지금처럼 다리가 없었을 테니 몇 군데에서 배로 건너 다녔을 것이다. 그런 곳을 더듬어 보면 한 곳이 우리 마을인데, 내가 어렸을 적에 나루터라고 불렀던 팔왕부락의 끝에 있는 곳이다. 그리고 또 한 곳은 부안과 김제를 가장 가깝게 잇는 곳으로 지금의 동진대교 자리인데 옛적에는 그곳이 부안에서 김제의 죽산쪽으로 건너가는 가장 큰 나루터였을 것이다. 그래서 동진(東津)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다녔던 동성국민학교의 학구에도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지명이 많다. 우선 반월(半月)부락은 마을의 모습이 반달의 형태를 닮았다는데서 지은 이름이다. 남쪽의 고부들을 내려다보면서 낮은 야산으로 반달모양의 마을을 이루고 있으니 그에 맞는 지명이다. 궁월(弓月)부락은 지금의 고마제 저수지를 둘러싸고 활모양의 마을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장기(場基)마을은 그때에 장터라고도 하였는데 옛적에 그곳에서 장이 열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았던 만들부락이란 이름도 넓은 평야의 한복판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당시, 원하장부락은 진구지로, 현호(玄湖)부락은 검은구지로 불렀다. ‘구지(九地)’는 원래 여러 종류의 땅 중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땅이란 뜻인데 이곳의 위치가 동진강의 하류인 만큼 낮아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원하장부락의 땅은 물기를 머금으면 질척거려서 걸어 다니기도 힘든 땅이라 진구지, 현호부락의 땅은 검은색을 띄고 있어서 검은구지라 불렸다. 이 두 곳을 진구지나 검은구지로 불렀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 또한 지역의 특성과 관련이 있었다. 동진면은 면의 중앙에 해발고도 20미터 내외의 구릉이 있을 뿐, 옛적부터 퇴적층으로 이루어 충적평야로 넓은 고부들을 이루고 있다. 특히 진구지나 검은구지로 불리었던 원하장부락이나 현호부락은 가장 하류에 있어서 배수가 잘 되지 않는 회색토(灰色土)나 흑색토(黑色土)인 개펄로 형성이 되었으니 개펄의 특성상 흙의 성분이 질고 검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원하장부락 부분은 흙에 물기만 품으면 질퍽거려서 진구이라 불렀고, 현호부락 부분의 흙은 검게 보여서 검은구지라 불렀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2/3가 산지여서 어느 곳이든지 흙을 파헤쳐보면 대부분이 적황색토(赤黃色土)인 황토(黃土)나 적토(赤土) 또는 마사토(磨沙土)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향인 고부들에는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진흙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흙은 기름지고 물기를 많이 품어 벼농사에 적합하여 품질이 우수한 쌀이 생산된다. 이 흙들은 날씨가 맑으면 단단해 지고 부서진 흙들은 퍼석퍼석 먼지를 날리지만 비만 내렸다하면 질퍽거리는 흙으로 변해 사람들이 걷기에도 힘들어 진다. 특히 겨울철에 물기를 머금은 흙이 얼었다 녹았다하면 찰흙처럼 쫀득거려 보통 신발로는 걷기가 힘들어 진다. 초봄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다닐 때쯤 저녁에 꽁꽁 얼은 땅이 낮에 녹으면 흙이 쫀득거려 검정 고무신을 흙속에 놓쳐 버리고 양말까지도 진흙으로 범벅이 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옛적엔 우리 고향을 두고 이런 말도 있었다고 한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