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산 김도현 선생이 바다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도해단. 건너편 포구로 어선이 들어오자 갈매기들이 몰려들어 하늘을 날고 있다.
그해 겨울 짙푸른 동해바다,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한 선비가 갯바위 위에 섰다.
하얀 옷자락이 바람에 심하게 날렸다.
그는 암초가 삐죽삐죽 물속으로 뻗어 있는 바다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천천히 한 걸음씩 미끄러운 돌부리를 밟으며 검푸른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까지 따라와 울먹이는 조카에게 “결코 시신을 찾지 말라”고 이르고는 시린 바닷 물속으로 서서히 잠겨 들어갔다.
지금부터 101년 전인 1914년 12월23일 동짓날,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독립운동가 벽산 김도현 선생이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던 장렬한 순간을 상상해 봤다.
1910년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 오면서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처절한 저항이 전국 각지에서 이어졌다.
그동안 구국ㆍ항일의 의지를 펼쳐오던 벽산 김도현도 자결을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음독자살이나 단식이 아닌 도해(蹈海) 즉, 바다에 걸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도해라는 말은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바다를 밟고 들어가 죽겠다’고 저항했던 중국 제나라 노중련의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죽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육신을 적의 땅에 남겨둘 수 없다며 나이 63세의 벽산이 걸어 들어간 그 바닷가 암초는 산수암이라 이름 붙여졌다.
1915년 3월 전국의 유림들이 그를 사모하는 비를 세웠으나 일제가 뽑아버리기도 했다.
1950년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도해비 영림계’가 결성되어 모금을 시작하여 도해비는 복구되었다.
지금은 선생이 순절한 그 자리에 높게 단을 올린 도해단이 만들어져 숭고한 그 뜻을 기리고 있다.
197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친필 휘호 ‘천추대의’가 새겨진 도해단비. 지금은 비각 안에 서 있다.
197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천추대의’라는 친필을 올렸으며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지난해는 선생이 순절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추모사업회에서는 항일 구국정신을 되새기이고 도해단을 성역화하여 애국 독립운동을 선양하는 국민교육장으로 활용 추모하기로 했다.
100주기 추모행사도 열렸고 선생의 항일의병 활동 학술대회가 영양에서 개최됐었다.
도해단 아래쪽 공간에는 절명시비와 함께 처음으로 비각도 세워졌다.
선생이 순절한 지 100주년이 되는 지난해 도해단 아래쪽 공간에는 절명시비와 함께 처음으로 비각도 세워졌다.
도해단 위에 세워진 비각은 선생이 순절한 지 100주년이 되는 지난해 추모사업위원회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벽산선생창의전말’에 항일의병투쟁사 남아
벽산 김도현 선생의 초상화.
본관이 김녕인 김도현(1852~1914) 선생은 영양 청기면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대쪽 같았다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터지자 사재를 던져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10월까지 동해안과 안동ㆍ영양을 주 무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안동으로 진군하였으며 청송ㆍ의성ㆍ영덕ㆍ영해를 순방하며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선생은 영양 검각산성에 의병을 모아 본진을 주둔시켰다.
이 산성은 1894년 무렵 사재를 털어, 자신의 집 뒷산 검각산에 쌓은 성이다.
이곳을 근거지로 1896년 10월15일까지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는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최장기간에 걸친 항전이었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는 비밀리에 세력을 규합했다.
서울로 올라가 상소를 올리는 한편 각국 공관에 포고문을 보내 역적의 처단과 조약의 무효를 주장한다.
하지만 상소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6년1월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포수들을 규합해 거사를 도모한다.
1906년 고종이 직접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밀지를 내리자 의병을 일으키려다 1907년 2월 계획이 사전에 발각, 일제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서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 후 의병을 해산하고 1908년 영양 객사에 교실을 만들어 영흥학교를 개교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순절의 뜻을 품었고 부친의 장례를 마친 뒤 영덕 대진 앞바다 산수암에서 결행했다.
선생은 가족에게도 ‘바다에 빠진 시신을 수습하여 염하는 것은 뜻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미리 일렀었다.
정부는 선생의 항일정신을 기려 지난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국민장)을 추서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선생의 생일인 음력 7월14일 그의 정신을 추모하는 전례행사가 열리는데 올해는 오는 8월27일이라고 한다.
김도현 의병장이 사용하던 이 칼은 후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여 등록문화재 제465호로 소장되고 있다.
벽산이 남긴 유물로는 벽산집과 고종황제 하사품인 삼인검, 칙지, 밀지 등이 있다.
의병장이 사용하던 이 칼은 후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여 등록문화재 제465호로 소장되어 있다.

선생은 자신의 항일의병투쟁 전말을 일기체로 작성한 ‘벽산선생창의전말’이라는 기록물을 남겼다.
1895년 의병봉기를 모의하던 약 10개월 동안의 일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북 지역의 초기 의병항쟁의 전개 과정과 각 지역 의병진간의 연합 작전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구국위한 죽음, 또 다른 시작
좋은 장면의 사진을 잡고 또 조금이라도 시원한 시간에 촬영 작업을 하기 위해 해뜨기 전 대구를 출발해 아침 일찍 구국의 현장을 찾았다.
사실 도해단은 덩그러니 서 있는 비각과 산수암이라 새겨진 바위가 전부다.
얼핏 지나쳐 버릴 수도 있지만 도로변에 있어 찾기가 어렵지는 않다.
다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찾는 이가 드물 뿐이다.
계단을 걸어 단 위에 올라서니 채 여명이 사라지지 않아 바다는 불그스레하다.
파도 없이 잔잔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선생은 그날 왜 추운 겨울 동짓날을 택했는지 생각해 본다.
비석에 새겨진 절명시를 읽어 보고서야 분명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처절한 심정을 절명시로 남겼다.
그리고 ‘새 양기 돌아오는 동짓날 초이레이어라’라고 읊었다.
그날부터 낮이 길어지는 동지는 태양의 부활이라는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선생의 겨레 사랑은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같이 변함없었고, 그의 국권회복의 염원은 천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바위 같았다.
여기서 오언절구 한자로 된 절명시의 번역된 내용을 소개한다.
오백년 왕조 말에 나 어이 태어나 붉은 의분의 피 가슴에 가득하다/ 국모가 시해되고 그 뒤로 열아홉 해 머리털과 수염은 늙어 서릿발이 되었네/ 망국의 눈물 채 마르지 않았는데 어버이마저 가시니 가슴이 찢어진다/ 내 고장 푸른 산에 홀로서서 생각하니 백가지 계책 중 내 쓸 방법하나 없다/ 만리 바다를 보고자 하였더니 새 양기 돌아오는 동짓날 초이레이어라/ 희디 흰 저 천 길 물속은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 하여라//
동해안의 대진 벽산 도해단을 보면 비운의 나라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해변마다 한 서린 울분이 잠재돼 있을지도 모른다.
끝없는 아름다움 속에는 이면적으로 한없는 비애가 서려있는 것 같다.
동해가 더욱 신비로운 까닭은 바다에 감추어진 애달픈 한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겨울 바다는 분명 누군가에게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시발점일 수도 있다.
저 아득한 영혼의 바닥까지 침잠하다 보면 새로운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선생이 떠난 지 백년,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동해안을 찾는다.
여행 중 영해면 대진 포구를 지난다면 한번은 도해단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벽산선생의 숭고한 뜻을 생각해 보는 여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영덕 대진에 간다면 벽산 선생이 남긴 시 한 수를 읊으며 지사의 높은 뜻을 가족과 함께 되새겨보길 권한다.
관심가지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변함없는 동해와 어우러진 도해단은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통해 올바르고 곧은 신념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곳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대의명분과 의리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한 유교적 지식인의 삶과 뜻을 영원히 보여주고 있다.

글ㆍ사진=박순국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