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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 柳 마 을 원문보기 글쓴이: 류하연
시작하기 전에 율곡 선생에 대해 잠시 언급하면…
율곡선생의 위대한 학문은 후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선생이 추구했던 사심 없는 인물과 사물에 대한 직설적 비판은 당시 선비들에게 팽배했던 허례와 허식을 꼬집었다 생각합니다. 붕당 초기 동/서 분열의 중간에서 '양비양시론'을 펼치며 분열을 막으려 노력하셨습니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서애선조가 이산해에게 '서인에도 율곡같은 선비가 있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했죠.
이렇듯 율곡은 붕당을 막고 훌륭한 인재를 추천하고 양성하여 조선 건국 후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부강하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조선을 만들려 선생의 이상을 실천해 나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아쉽게도... 노력은 실패하고 선생도 인간인지라 말기에 친구인 성혼,정철등과 제자들의 추대, 동인의 완강한 비판에 지쳐 서인쪽에 편향된 행보로 이른바 선생이 추구했던 ‘양비양시론’은 빛을 잃게 됩니다. 47세라는 이른 나이에 율곡 선생의 죽음... 선생이 몇년만 더 사셨다면 서애선조와 더블어 '기축옥사'를 막을수 있지 않았을까요? 운명의 장난처럼 율곡선생이 총애했던 제자 정여립이 기축옥사의 원인이 되고 율곡선생의 친한 동료였던 정철, 송익필, 성혼이 천여명의 선비를 도육할지 율곡선생은 상상이나 하셨을까요? 그리고 훗날 율곡의 씨앗인 김장생, 송시열이 역사와 선생의 뜻을 왜곡하여 율곡이 꿈꾸던 조선이 아닌 '노론의 나라' 조선으로 망국의 길을 가게 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살짝 감정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생전에 율곡 선생이 추구했던 뜻은 후대에 많은 이들이 옳바르게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믿고 싶습니다. 새로운 정책과 인재 추천관련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했던 선생의 노력은 분명 조선조 최고로 평가되어 마땅합니다. 율곡의 직설적 인물평은 ‘석담일기’ 내내 언급되며 친구와, 스승에 대한 비판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칭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단점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죠. 율곡이 언급한 서애 선조 관련 글들을 보다 보면 '재주와 식견은 높이 평가하고 무리란 표현으로 당색에 소속되어 일심으로 봉공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를 돌아보는 뜻이 있다’ 라고 가볍게 비판하죠. 서애 선조에 대한 이런 비판은 율곡의 인물평들을 보면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갑니다. 예를 들면 스승인 ‘백인걸’에 대해 선조가 물으니 ‘기는 높으나 글이 거칠다’ 라고 살짝 비판하죠. 그리고 스승의 스승인 조광조에 대해서는 ‘그의 이상주의가 너무 조급하다’, ‘일을 꾸미는 데 점진성이 없고 너무 날카롭고 예리하다’ , '존경하지만 어려서 깨우치지 못한체 관직에 올라 부족했다' 라고 비판합니다. 죽을때까지 함께하자고 했던 절친 ‘우계 성혼’을 누가 관직에 추천하자 율곡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계는 그런 일을 할 위인은 못되고 단지 착실한 선비일 뿐입니다.’ 또 모든 사림에게서 존경받던 서경덕에 대해서는 ‘성리학자 답지 않게 도에 치우쳤다’ 라고 비판합니다. 더 나아가 율곡이 젊은 시절 칭송했던 퇴계선생에 대해서도 '이기이원론'에 대해 원색적으로 비판합니다. 비교적 장,단점 모두를 평하는 율곡 선생도 이상하게 초당 허엽(허균,허초희 부친,강릉 초당 두부 주인공) 과 이준경(율곡이 이준경을 처벌하려할때 서애선조가 변호하여 위기를 넘김)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비판만을 남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선생은 지금 치면 좌,우 극단주의 모두를 비판하고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던 조선이 남긴 ‘천재 사상가’임이 분명합니다. (서애 선조도 율곡선생도 칭송 받아 마땅한 분들이십니다.) 율곡의 ‘석담일기’에 서애선조 관련 기록에 비판도 있으므로 율곡의 스타일을 참고하시고 즐기시라는 뜻에서 언급하다 보니 서두가 너무 길었졌습니다.
석담일기(石潭日記) 중에서
만력 사년 병자(萬曆四年丙子) 1576년(선조 9)
○ 정철ㆍ구봉령(具鳳齡)ㆍ신응시(辛應時) 등은 다 김효원을 소인이라 하고 깊이 배척하려 하였다. 정철이 장차 남으로 돌아갈 때 이이에게, “효원을 배척하라.” 권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저 사람의 죄상이 형적이 없고 사류가 소중하게 여기니 만일 깊이 배척하면 반드시 사류에게 연루가 되어 크게 분란을 일으키어 조정이 손상하리라.” 하고, 마침내 듣지 아니하였더니, 정철이 시를 지어 보이기를,
군의 뜻은 산과 같아 끝내 움직이지 않고 / 君意似山終不動 나는 물처럼 흘러가니 어느 때에나 돌아올고 / 我行如水幾時回
하고, 개탄하고 돌아갔다. 전배는 효원을 이렇게 미워하고, 후배 사류는 효원을 매우 아끼어 이이보고 효원을 내어보낸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이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둘다 옳거나 둘다 그른 경우는 없는 것인데, 공의 근일 처사에는 시비를 분별치 아니 하고 둘다 온전하게 하려 하니 인심이 불만히 여긴다.” 하니, 이이가 답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둘다 옳거나 둘다 그른 경우가 있다. <중략> 시비를 어찌 한때 기세의 강약(强弱)으로써 정하겠소? <중략> 인백(김효원의 자)이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국사를 하고자 했고, 혐오를 피치 않고 선배를 배척하니 선배 사류의 연장자들이 노여움을 품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세력이 두려워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소. 내가 인백의 처사를 보니 후폐가 없지 아니할 것이기에 좀 누르자는 의논을 내었소, 당초에는 선배들이 나를 중하게 여겨 말마다 듣더니 내 손으로 인백을 눌러놓은 뒤에는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잊은 것과 같아서 가소롭소. 대체 이 일은 인백을 누르는 것은 옳거니와 너무 공격하는 것은 그르니, 드러난 죄가 없는 까닭이요, 나의 말이 중하게 여김을 받지 못한 것은 계함의 소견이 지나친 까닭이요, 계함이 청명(淸名)으로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동류 들이 계함을 믿고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오.” 하였다. 우옹이 말하기를, “장차 어떻게 구하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 기를, “이현(而見)류성룡(柳成龍)ㆍ숙부(肅夫)김우옹(金宇顒)ㆍ경함(景涵)이발(李潑)이 요지에 모이면 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우옹이 말하기를, “공도 가는데 우리들이 비록 머문들 무엇이 유익하리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의 진퇴는 이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오.” 하였다. ? <중략> 허엽이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근일의 일은 진실로 한심하오.” 하니, 이이가, “무슨 말이오?” 물었다. 허엽이 말하기를, “백년 이래로 외척이 항상 국권을 잡아서 세상 사람들이 귀에 익고 눈에 젖어서 당연하게 알다가 하루 아침에 연소한 선비가(효원을 가리킴) 외척을(의겸을 가리킴) 배척하니,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괴상하게 여기는 것이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말은 바른 듯하나 실은 그릇되었소. 오늘 인백을 그르다 하는 이가 어찌 방숙(方叔 심의겸)을 위한 것이겠소? 공의 말이 그르오.” 하였다. 허엽이 말하기를, “화숙(和叔 박순의 자)ㆍ계진(季眞 이후백의 자)ㆍ중회(重晦 김계휘의 자)가 비록 시망(時望)이 있으나, 식자(識者)가 논한다면 반드시 방숙의 문객이라고 할 것이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말이 크게 그르오. 이 세 사람은 다 사림(士林)에게 인망이 있는 사람들이오. 어찌 방숙에 의지하여 발신(發身)한 사람이겠소.” 하였다. 허엽의 의사에는 대개 의겸을 외척ㆍ권간으로 여기고, 박순 무리들이 다 외척에게 붙어서 대관(大官)이 되었다가 효원이 외척을 누르니까 시론(時論)이 효원을 재제(裁制)한다는 것이다. 이이가 한수ㆍ남언경에게 이르기를, “허태휘(許太輝 허엽의 자)의 소견이 심히 그릇되었소. 후일에 시사를 그르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이오.” 하였다. 이이가 노수신을 보고 말하기를, “시론이 분운한데 상공(相公)이 어찌 진정시키지 아니하오?” 하니, 수신이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능히 진정시키겠소?”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공이 이것을 맡지 아니하면 다시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겠소?” 하니, 수신이 말하기를, “공 같은 이는 퇴거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오늘날 김효원을 그르다 하는 사람들이 급급히 그의 잘못을 드러내려다 오히려 남의 의심을 일으킨 것이오. 당초에 김을 제재한 것은 중도(中道)를 얻어 사람들이 다 공론이라 하였는데 공격을 너무 심히 함에 이르러 사류들이 도리어 의심하기를 사감(私憾)을 가지고 그것을 풀기 위해 그(김효원)의 잘못을 드러내려 한다 하여 오히려 그를 옳게 여기는 의논이 나오게 만들었으니, 그르다고 하기에 더욱 주력하면 반드시 옳다고 하기를 더욱 강조하는 자가 있을 것이오.” 하니, 수신이 말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옳소. 제공(諸公)들에게 분명히 말해 두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이가 구봉령을 보고 말하기를, “사림이 분열되어 인심이 흉흉한데 사람 들이 이르기를 공이 주론(主論)한다 하니, 과연 그러하오?” 하니, 봉령이 말하기를, “내가 병으로 한 구석에 엎드려 있는데 어찌 능히 주론하겠소. 만일 지금에 다시 처분이 있으면 시사가 그르게 될 것이니, 마땅히 조용하게 진정시킬 것이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이것이 내 뜻이오.” 하였다. 이이가 박순을 보고 말하기를, “시사에 진보할 만한 곳이 없으니 구차하게라도 화패(禍敗)를 면하면 족하게 되었소. 조정이 불화하게 된 것이 깊이 근심할 바이요, 연소한 사류의 의구 (疑懼)가 매우 심하니 모름지기 안정시키는 것이 가하오.” 하니, 박순이 묻기를, “계책을 어떻게 해야 하겠소.”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류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의 무리가 귀향하고 오지 않는 것은 아마 이간하는 말에 흔들린 모양이니, 이 말을 주상께 아뢰어 특명으로 부르게 하시오. 그리고 김우옹이 근래에 주상께 소대(疏待)를 당하니 또한 주상께 아뢰어 경연으로 끌어들여 이발 무리와 더불어 시론(時論)을 잡게 하고, 계함(季涵 정철) 역시 오지 아니하니 역시 특명으로 부르도록 청하시오. 이렇게 인재를 모아 등용할 때에 저울질을 공정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조화롭게 진정하기를 힘쓰시오. 이렇게 1, 2년만 하면 조정이 맑아질 것이오. <중략> 이이가 이미 귀향하니 시론이 더욱 나뉘어져 구할 수가 없었다.
만력 육년 무인(萬曆六年戊寅) 1578년(선조 11) ○ 양사(兩司)가 논박하여,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윤현(尹晛)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이때에 선비들이 둘로 나누어지니 소위 동인에는 청명(淸明)이 있는 후진이 많고, 서인에는 다만 전배(前輩) 수 인뿐이요 따르는 사람은 모두 시망(時望)이 없었다. 이에 선비들이 동인이 성하고 서인이 쇠한 것을 알고, 또 서인이 김효원을 내어보낼 때에 거조 (擧措)가 적당치 못하여 공론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 진취적인 무리들이 모두 동인으로 들어가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고 기세를 올렸다. 김계휘(金繼輝)는 비록 서인이라 지목받았으나 연소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연소한 선비가 간혹 김계휘에게 품명(稟命)을 하였다. 윤현과 김성일(金誠一)이 함께 전조랑(銓曹郞 이조랑)이 되었으나 의논이 맞지 않아 틈이 생기고 윤현의 숙부 윤두수와 계부 윤근수가 모두 요직에 있어서 매양 서인을 붙들어주고 동인을 꺾을 의논을 하니 동인이 깊이 미워하였다. 윤두수는 집에서 청렴하고 삼가지 않아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말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김계휘에게 말하기를, “윤두수를 논박하여 내어 보낼것이다.” 하니, 김계휘가 말하기를, “방금 선비들이 분열하니 진정하는 데 힘 쓸 것이요,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연소한 무리들이 이것 때문에 김계휘를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홍문관 수찬(修撰) 강서(姜緖)가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선비들이 동ㆍ서 두쪽으로 분립되었으나, 모두들 쓸 만한 사람들이니 한쪽만 쓰고 한쪽은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동ㆍ서라는 것을 알았다. 이발(李潑)은 동편을 주장하고, 정철은 서편을 주장하였다. 두 사람의 견해는 같지 않았으나 모두 인망이 있고 나라에 봉사하는 점에 있어서는 당시 제일이었다. 이이가 매양 정철과 이발에게 이르기를, “군들 두 사람이 화합 하여 동심(同心)으로 조화시키면 사림(士林)이 가히 무사할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간절히 말하니, 정철이 합심하여 이발과 교제하며 서로 화평을 이룰 것을 논하려 하였으나, 동인 가운데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인의 착하지 못한 사람들을 공격하여 후환을 막으려고 하여 모두 윤두수 삼 부자(父子)를 서인의 괴수라 하여 쫓아버리기로 결의하였다. 오로지 류성룡(柳成龍)과 이발(李潑)은 따르지 않았다. <중략> 삼가 생각건대, 조정에서는 견식(見識)이 중요한 것이다. 식견이 없으면 비록 현인이라도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다. 지금 선비들의 싸움은 모두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첫 번에 이해하지 못한 것은 김성일(金誠一)이 그 일을 발단한 것이요, 두 번째 일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김계휘가 선비들의 노여움을 격동시켜놓은 것이요, 세 번째 이해하지 못한 것은 이발(李潑)이 3 윤(尹)씨 일가의 숨은 죄를 허실도 알아보지 않고 추하게 헐뜯은 것이요, 네 번째 이해하지 못한 것은 정철과 이발이 틀어져서 동ㆍ서가 합할 가망이 영영 끊어져버린 것이다. 이뒤로부터 동에 붙은 자들이 날로 성하여 새로운 의론을 전개하였고, 유속(流俗) 구신(舊臣)으로 전에 서인에게 배척당한 사람들이 요지 (要地)에 있게 되어 권세를 부리고 감정을 펴 그들의 의논을 준절(峻切)하게 하여 동인들에게 충성을 보이려 하였다. 서인은 아무리 착한 선비라도 모두 쓰이지 못하고 청명(淸名)있는 선비들이 도리어 속류(俗流)와 하나가 되어 청탁이 혼잡해지니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 김성일은 진실로 괴이한 귀신 같은 무리니 그리 책망을 할 것도 못 되나, 소통(疏通)한 김계휘와 중망(重望)있는 이발과 강정(剛正)한 정철들마저도 모두 함께 일을 그르치게 했다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어찌 운명이 아닐까. 남쪽에 월백(月魄)이 땅에 떨어져 하늘에는 달이 없어지니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만력 칠년 기묘(萬曆七年己卯) 1579년(선조2) ○ 이수(李銖)의 옥사가 오래도록 성립되지 않았다. <중략> 삼가 생각건대, 이수(李銖)가 뇌물을 준 사실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장세량(張世良)이 쌀을 받아두었다는 죄는 몹시 가벼운 것이다. 만약 장세량이 간여한 증인이라 하여 똑바로 초사(招辭)하려 하여도, 간여된 증인에게 장형 (杖刑)을 내리는 것은 3번에 불과한 것이 법례인데, 장형을 20여 차나 하였으니 될 것인가? 만일 장세량이 정범(正犯) 이라 할지라도 국법(國法)에 원래 죽을 죄가 아니면 꼭 자백받는 것이 한계가 아니요, 꼭 죽을 죄라야만 자백하기까지 문초하는 것이다. 그러니 장세량의 죄는 장벌(杖罰)에 해당하는 것인데 어찌 자백하도록 끝까지 심문하는가. 선비들의 식견이 불명(不明)하고 마음을 넓게 쓰지 못하고, 단지 옥사가 성립되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 하니, 의리에 해가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후의 시비를 들어보지 않고 오로지 옥사만 성립시키려 힘썼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 없지만 류성룡(柳成龍)ㆍ이발(李潑) 같은 무리로도 이와 같은 거조(擧措)를 하는가. 아! 남에게 알려질까 걱정이다. → (서애선조와 이발이 율곡 본인과 뜻을 같이 못함을 한탄하는 표현) 5월 도승지 목첨(睦詹)을 특별히 호조 참판을 시켰다. 목첨은 용렬하고 무능한 까닭으로 임금에게 발탁되었다. ○ 허엽(許曄)을 가선(嘉善 종이품)으로 올려 경상 감사를 시켰다. 당시에 경상 감사 정지연(鄭芝衍)이 병으로 갈린 것이다. 임금이 영남은 큰 도이고 겸하여 섬나라 오랑캐(일본을 가리킴)의 염려가 있었으므로 대신에게 명하여 자격이 문무를 겸비하여 영남을 진압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 하여, 대신이 구봉령(具鳳齡)ㆍ이이(李珥)ㆍ김여경(金餘慶)ㆍ 이산해(李山海)ㆍ허엽(許曄)으로 응명(應命)하였다. 임금이 허엽은 나이 많은 구신(舊臣)이라 하여 먼저 썼던 것이다. 허엽은 사실 백성을 무마하고 중민을 인도할 재주가 없어서 문서가 산더미 같이 쌓였으나 처리를 못할 뿐더러 백성의 송사가 생기면 이것을 분별하여 답하지 못하고 오로지 아전들만 신임하니 백성들이 심히 원망하였다. → (율곡과 초당의 관계는 상호 비판적인 정적관계였습니다. 그 시작은 율곡의 직선적인 비판에 초당은 율곡이 예의도 모르는 건방진 선비라 공격했고 끝내 두분은 생전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영향인지 '교산 허균'은 이른바 고향 강릉 선배인 율곡 이이를 비판하는 쪽에 서게 됩니다.)
만력 팔년 경진(萬曆八年庚辰) 1580년(선조 3)
류성룡(柳成龍)을 상주(尙州) 목사로 삼았다. 류성룡이 모친이 늙어서 가까운 읍을 얻어 봉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네가 나가면 내가 한 신하를 잃는다. 다만 모자의 정이 간절하니 듣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상주 목사를 시키니 선비들이 모두 그가 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류성룡은 재주와 식견이 있고 경연에서 계사(啓辭)하면 잘 설명하여 아룄으니, 사람들이 모두 찬미하였다. 다만 일심으로 봉공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를 돌아보는 뜻이 있으니, 군자는 부족하게 여겼다. 정구(鄭逑)를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삼았다. 정구는 예학(禮學)에 힘써 몸단속을 몹시 엄하게 하며 의논이 영발(英發)하고 청명(淸名)이 날로 드러났다. 여러번 벼슬을 시켰으나 나오지 않더니, 이번에 상경하여 배명(拜命)하였다. 임금이 인견하고 배운 것을 물어보는 말씀이 온순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정구가 부임하였다.
만력 구년 신사(萬曆九年辛巳) 1581년(선조 14)
○ 류성룡(柳成龍)이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서울에 들어와 사은하였다. 사류(士類)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바람직한 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 헌부(憲府)에서 이조 좌랑 이경중(李敬中)을 파면하기를 청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경중은 본래 학식이 없었고 또 성질이 탐닉하고 막히어 착한 것 따르기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전랑으로 매우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스스로 천단 하는 습성이 있었다.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은 그 하는 바를 미워하여 탄핵하려 하였는데, 대사헌 정탁(鄭琢)이 고집하여 따르지 않으므로 각각 소견대로 아뢰고는 피혐하여, 사퇴하였다. 사간원에서 정탁은 체직시키고 인홍은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더니, 드디어 경중을 탄핵하여 파면시키자 그 무리들은 의심과 두려움을 품어 뜬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 일은 류성룡(柳成龍)도 자못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이(李珥)가 밝게 깨우치기를, “정덕원(鄭德遠) 인홍(仁弘)의 자 은 초야(草野)에서 일어난 고독한 이로서, 충성을 다하고 공도(公道)를 받들고 있었다. 그가 논한 바에는 지나친 것이 있는 듯하나, 이것은 실로 공론인데 어째서 옳지 않다 하겠는가.” 하니, 성룡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갔다. 인홍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위풍으로 제재하여 백료들이 진작(振作)되고 숙정(肅正)되었고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감히 금하는 물건을 밖에다 내놓지 못하였다. 한 무부(武夫)가 시골에서 입경하여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장령 정인홍은 그 형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 위엄이 먼 외방(外方)까지 뻗치어 병사ㆍ수사나 수령 무리까지도 두려워하고 삼가 경계하니, 진실로 장부다.” 하였다. 이 말을 이이가 듣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덕원(德遠)인홍(仁弘)의 자 이 헌관(憲官)이 되니 많은 사람이 꺼려하고 미워하는데, 이 무부는 감히 칭찬하니 그가 바로 장부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가니, 성(城) 안의 방종한 자들은 모두 기뻐하기를, “이제야 어깨를 펴겠다.” 하였다. 다만 인홍은 기운이 경박하고 도량이 좁아서 처사가 혹 조급하고 떠들썩 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이가 매양 글을 보내어 권하고 경계하기를, “큰 일에는 마땅히 분발하여 일어날 것이지만 작은 일은 혹 간략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소. 뭇 사람의 말썽이 떼지어 일어나게 되면 시사(時事)가 더욱 할 수 없이 될 것이오.” 하였다. 인홍은 이이가 지나치게 유약하다고 의심하여 안민학(安敏學)에게 말하기를, “숙헌(叔獻 이이의 자)은 굳세게 꿋꿋하게 일할 사람은 아니다.” 하였다. 민학이 이이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는 덕원을 위(韋)로 삼고 덕원은 나를 현(弦)으로 삼아 덕원이 나와 하나로 합친다면 어찌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하였다. 이때 청명(淸名)의 선비인 성혼ㆍ이이ㆍ류성룡ㆍ이발ㆍ김우옹ㆍ정인홍 등이 성 안에 모이기는 하였으나, 임금의 뜻이 선비를 믿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시사가 진보될 형세가 없었다. 류성룡이 이이에게 묻기를, “지난번 대궐 뜰에서의 의논을, 공은 근본적인 장책(長策)이 아니라 하였는데, 근본적인 장책이란 어떤 것이오?” 하기에, 이이는 대답하기를,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아래로는 조정을 맑히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이오. 임금의 마음이 사류를 가벼이 여기고 오히려 유속(流俗)을 좋아하시는데 어찌 시사가 다스려질 가망이 있겠소?” 하였다.
○ 이산해(李山海)가 병이라 하여 사면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이가 가서 묻기를, “공은 나라의 두터운 은의(恩義)를 입었는데, 나라가 위급한 이때를 당하여 마땅히 직분을 다하여 군은(君恩)에 보답해야 할 것이어늘, 어찌 물러나 선비 들의 소망을 저버리오?” 하니, 산해는 말하기를, “총재(冢宰 이조 판서의 별칭)는 한 나라의 중임인데 내가 어찌 감당 하겠소?” 하였다. 이이는 말하기를, “그러면 누가 감당하겠소? 2품 이상에는 용렬하고 못난 무리들이 가득 차있어 다행히도 공 같은 이가 그 직책에 있으므로 선비들의 바라는 바에 심히 만족스럽소. 공은 어째서 굳이 사퇴하려 하오. 또 공은 이미 육경의 반열에 있으므로 관직을 쉬지는 못할 것이니, 공의 재주로서는 오직 이조 판서가 합당하고 다른 직분에서는 아마도 직책을 다하지 못할 것이오. 호조와 형조 같은 데는 공의 재주로써는 처리될 곳이 아니요, 이조라면 공은 틀림없이 사사로운 정(情)에 따르지 않고 공도(公道)를 크게 베풀 것이니 이 어찌 도움이 적은 것이겠소. 근래에 정사가 매우 흐려졌으니, 공은 억지로라도 나와서 묵은 인습을 씻어주기 바라오.” 하니, 산해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공은 어찌 나의 재주의 세세한 것까지를 다 아시오. 공의 말이 매우 간절하므로, 나는 마땅히 다시 생각하겠소.” 하더니, 오래지 않아 산해는 나와서 일을 보았는데, 정사를 하는 데 청탁을 듣지 않았으므로 문정(門庭)이 쓸쓸하기가 빈한한 선비의 집 같았다. 이이가 듣고 말하기를, “여수(汝受 이산해의 자)의 정사하는 것이 조금 사람의 뜻에 맞으니 가히 세도(世道)를 구할 것이다.” 하였다. ○ 이조에서 김효원(金孝元)을 사간(司諫)의 망(望)에 추천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을 불화하게 한 자는 모두 그르다. 김효원은 다만 서관(庶官)이나 낭료(郞僚)에 두면 족할 것이지, 어찌 사간의 망에 올리겠는가?” 하니, 이에 사류들이 매우 불안해하였다. 이발이 이이에게 묻기를,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이 일을 논하려 하는데 어떻겠 는가?” 하니, 이이가 답하기를, “이 일은 다만 대신이 아뢸 일이지, 젊은 사류들이 경솔히 아뢴다면 주상의 의심만 더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박순을 보고 말하기를, “지금 사류들이 화합하지 않는 것은 동인ㆍ서인의 말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까닭이므로 지금 마땅히 동ㆍ서를 씻어버리고, 다만 재기(才器)를 보아 기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김효원은 쓸만한 재기인데도 주상께서 청직(淸職)의 망(望)에 올리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직 동ㆍ서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니 계책을 얻음이 아니요, 대신이 마땅히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뒤에 경연에서 박순이 아뢰 기를, “동ㆍ서란 말은 항간의 잡담이오니, 조정에서는 마땅히 입에 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이것으로써 기용해야 될 인재를 버릴수 있겠습니까. 김효원은 재기가 가히 쓸 만하므로 버리기는 아깝습니다. 근일 동ㆍ서란 말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논박을 당하는 사람이나 산직(散職)에 두어진 사람들이 모두 동ㆍ서로써 구실을 삼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효원을 기용하지 않는다면 핑계하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효원을 기용하지 않는다 해도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이는 아뢰기를, “한 사람을 쓰거나 버리는 것은 비록 큰 상관이야 없 습니다. 그러나 다만 동ㆍ서란 말이 해소되지 못한다면, 사류들이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무사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반드시 동ㆍ서를 씻어서 털끝만한 흔적도 없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효원이 재기가 없다면 버린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효원의 재주가 가히 쓸 만한데도 동ㆍ서의 말썽에 이끌리어 쓰지 않는다면 심히 사류들이 불안해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부제학 류성룡(柳成龍)ㆍ수찬(修撰) 한효순(韓孝純)도 역시 효원의 쓸 만한 점을 되풀이하여 진달하였고 옥당에서는 차자까지 올렸으나, 임금은 끝내 석연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병으로 사면하였는데, 임금은 의원을 보내 병을 묻고 적당한 약을 내려주고는 사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신은 나라에서 재해(災害)를 입어도 별로 건의하는 방책도 없이 날마다 잡객(雜客)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고 나라 일에는 생각도 없었으므로 비웃는 사류들이 많았다. 수신은 그래서 병을 핑계하고는 나오지 않았다. 이때 가뭄이 치열하여 이해도 흉년이었는데, 평안ㆍ황해 두 도가 더욱 심하였다. 임금이 경연에서 시종하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흉년이 이와 같고, 서도(潟)는 더욱 심하다는데, 기근이 있는데다 병화(兵禍)라도 더한다면 그 계책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재력(財力)을 미리 저축하여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는 아뢰기를, “만약 폐법(幣法)을 변통하여 간난(艱難)을 구제하지 않고, 다만 곡식을 옮겨서 백성을 살리려고 한다면, 곡식도 역시 결핍되어 옮길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이 같이 위태로우니, 주상께서는 모름지기 변통할 계책을 생각하셔서 쓰이는 경비도 마땅히 줄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은, “용도(用度)가 별로 늘어난 것도 없으며, 다만 예전 규정대로만 하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니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 에서는 세입(稅入)이 매우 많았으나, 지금은 풍년이 들지 않아서 세입이 매우 줄었는데도 경비를 예전 규정대로 쓴다면 어찌 결핍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입을 적당하게 참작하여 증가시킨다면 나라의 용도에는 여유가 있을 것이나 백성 들의 생활이 더욱 곤궁해질 것이므로,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먼저 백성들의 쌓인 고통을 해소시켜 민심을 감복시킨 뒤에 세(稅)를 적당하게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호(民戶)의 수나 전결(田結)의 다소를 헤아리지도 않고서 어수선하게 분배하여 정했고, 또 토산물(土産物)도 아닌 것을 징수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들이 이익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졌습니다. 지금 공안을 뜯어고쳐서 민호와 전결을 헤아려 균평(均平)하게 정하여 토산물을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의 쌓인 고통이 풀릴 것입니다.” 하였다. 류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이 일은 매우 급급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는 또 아뢰기를, “반드시 사람을 얻어야만 시사(時事)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민(生民)의 편안 함은 수령에게 매여 있고, 수령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은 감사(監司)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자주 바뀌므로 다만 세월이나 보내면서 정사에는 기꺼이 유념하지 않고 관례대로 갔다가 올 뿐이니, 간혹 직분에 충실한 이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시행할 겨를이 없습니다. 반드시 대읍(大邑)을 영(營)으로 하여 감사에게 그 읍(邑)의 수령까지 겸임하게 하고 가족들을 데려가게 하여, 책임지고 성공토록 위임하여 그 직에 오래 있도록 하되 특별히 조정의 신하 가운데서 다스리는 재기(才氣)가 가히 공보(公輔)를 감당할 만한 이를 뽑아 시키신다면 반드시 그 공효(功效)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오래도록 맡긴다면 전천(專擅)하여 권세를 마구 부리는 허물이 없겠는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이것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으며, 권세를 부리는 사람이라면 어찌 뽑아 보내어야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심히 많아서 수령을 제대로 선발하기가 어려우니, 병합하여 줄이려고 하는데 어떻겠소?” 하니, 군신들이 아뢰기를, “주상의 하교가 매우 지당합니다. 만약 극히 쇠잔한 읍을 다른 읍에 붙인다면 백성들의 부역이 매우 여유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력을 고치는[沿革] 일은 경솔하게 거론하기 어려우니, 나로서는 그 고을 이름만은 버리지 않고, 단지 한 고을의 수령이 2, 3 고을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겠소?”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에서도 내력을 고치는 일은 빈번하였으며, 이 일은 심히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였다. 이때 나라의 저축(貯蓄)이 이미 다 되어 다음해에는 구황(救荒)할 방책이 없어서 그 걱정이 막대하였는데도, 상하(上下)에서는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 이이가 깊이 민망하게 여겨 동료와 더불어 상의 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폐법을 변통해야 할 것과 공안(貢案)을 고칠 것과, 주현을 줄여 병합하고, 감사에게 오래도록 맡길 것과 그리고 어진 이를 기용(起用)하여 인재를 진작시킬 것과 몸을 닦아 맑게 다스리는 근본을 밝힐 것과 사사로운 붕당을 버리고 조정을 화합케 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자못 가상하다. 구법(舊法)을 고치는 것은 경솔히 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마땅히 대신들에게 의논토록 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곧 대신에게 내렸으나 노수신(盧守愼)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회의를 할 수 없었다.
○ 신축일. 비바람이 있었고, 낮이 어두웠는데, 뇌성과 번개가 여름철보다도 심하였다. 병오일에 천재(天災)로 인하여 공경(公卿)에게 두루 물었는데, 입시한 이는 영상 박순ㆍ병조 판서 유전(柳㙉)ㆍ형조 판서 강섬(姜暹)ㆍ한성 부윤 임열(任說)ㆍ좌찬성 심수경(沈守慶)ㆍ우찬성 이생문형(李文馨)ㆍ공조 판서 황림(黃琳)ㆍ 예조 판서 이양원(李陽元)ㆍ이조 판서 정지연(鄭芝衍)ㆍ호조 판서 이이(李珥)ㆍ도승지 이우직(李友直)ㆍ대사헌 구봉령 (具鳳齡)ㆍ부제학 류성룡(柳成龍)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좌정하자 임금은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천변(天變)이 비상하니,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소?” 하니, 좌우에서 차례대로 품은 바를 진술하는데 모두 좀스러워서 취할 것이 없었고, 오직 이이와 류성룡의 아뢴 바가 능히 정치하는 대체(大體)를 말하였던 것이다. → (율곡도 선애선조를 인정) 이이의 말에, “천도(天道)가 현원(玄遠)하여 진실로 헤아리기 어려우나 다만 고사(古史)로써 보건대 치란(治亂)의 형세가 이미 결정되어버리면 별로 재이(災異)가 없는 것이며, 재이는 반드시 장차 치(治)와 난(亂)이 갈릴 즈음에 일어나기 때문에 비록 어진 임금이라도 역시 재이를 면(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재이로 인하여 깨우쳐 두려워하거나 반성하신다면 재변은 도리어 상서로 화하는 것이니, 대개 천심(天心)은 인애(仁愛)하여 인군(人君)으로 하여금 경성(警省)하여 다스림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재이에 응하기를 실상있는 일로써 하지 않으시면 나라는 이로 인하여 어지러워지고 망하는 것이니, 사책(史冊)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자고로 나라를 세운 지가 오래 되면 점점 법제(法制)의 폐단이 생기고 인심이 해이해지는 것인데, 반드시 어진 임금이 생겨나서 폐하고 타락된 것을 말끔히 가셔서 정치를 고쳐야만 국세가 떨쳐 운명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순고식하다가 퇴락하여 구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니, 그 형상을 보기가 어렵지도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나라를 세운 지 거의 2백 년이라, 이는 중쇠(中衰)의 시기에 당하는데, 권간(權姦)이 어지럽혀 화(禍)를 많이 겪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노인이 원기가 다 되어 다시 떨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에 다행히 성상께서 나셨으니, 이는 장차 다스려질 수도 있는 때입니다. 만일 이때에 분발ㆍ진작하시면 억만년에 이르도록 끝이 없이 동방의 복이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장차 무너지고 잦아들어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중략> 지금 비록 공자(孔子)나 맹자(孟子)가 좌우에 있다 하더라도 만일 시행되는 것이 없으시면 무슨 유익한 것이 되겠습니까. 경제사의 설치는 듣고 보는 것이 생소할 듯하오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국사를 해볼 수가 없어서 점점 비하(卑下)해지 기만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제사를 설치한다면 뒤에 반드시 폐단될 일이 날 것이오. 우리 나라에서 모든 정사를 육조가 분장한 것은 뜻이 있는 것이오.” 하였다. 대사헌 구봉령(具鳳齡)은 나와서 유생들이 글은 읽지 않고 빈 말만 숭상하는 폐단을 아뢰었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유생의 폐단은 마땅히 유생에게 책(責)할 것이지 위에 아뢸 일은 아닙니다. 다만 주상께서 벌써 이 폐단을 아시고 계시니 마땅히 교화(敎化)할 방책을 생각하시어 그 사표(師表)에 가히 합당한 사람을 가려 위임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교화를 밝히시려면 반드시 선현(先賢)을 높이 장려하시어 후학의 모범이 되게 해야 할 것인데, 주상께서는 매양 이 일을 어렵게 여기십니다. 근일 어진이를 다 사전(私典 공자의 묘(廟)에 종사하는 것)에 넣을 수는 없으나, 조광조(趙光祖)는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였고, 이황(李滉)은 이치(理致) 에 침잠(沈潛)하였으니, 이 두 사람을 실로 종사(從社)하여 많은 선비의 선(善)을 향하는 마음을 흥기시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일은 할 수 없다.” 하였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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