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저택, 세 사람의 숨소리……
죽은 그녀가 아직 이곳에 있다
고급 주택단지 ‘손필드’에서 부잣집 개를 산책시키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제인’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불행한 과거와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제인은 여느 날과 같이 부자들의 개를 산책시키다 잘생기고 부유한 손필드 주민 ‘에디’를 만나고 빠르게 호감을 느낀다. 처음에는 에디의 재력과 에디가 사는 으리으리한 저택에 매력을 느꼈지만, 데이트가 반복될수록 제인은 진심으로 에디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딱 하나 신경 쓰이는 것은 에디가 의문의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는 점이다. 몇 달 전 친구와 함께 보트를 탔다가 호수에 빠져 실종되었다는 에디의 아내 ‘베’. 제인은 에디의 전처 베의 정보를 모으며 흠잡을 데 없는 ‘베’의 모습을 상상하고 열등감을 느낀다.
여자 친구라는 신분으로는 고급 주택단지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던 제인은 에디의 새로운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마침내 에디와 동거를 시작하고 프러포즈까지 얻어낸 제인. 그러나 함께 살게 된 에디의 저택에는 죽은 아내 베의 흔적이 너무나 짙게 남아 있는 데다, 아무리 베의 망령을 쫓아내려 해도 베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제인의 주변을 집요하게 떠돌아다닌다. 설상가상으로 에디가 집에 없을 때만 들려오는 수상한 기척에 제인은 베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에디와 깊게 연관된 ‘사건’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고, 안전하다고 믿은 에디의 곁에서 불안감을 느끼는데…….
죽은 아내가 존재하는 저택, 그 화려하고 섬뜩한 공간에서 제인은 무사히 살아남아 원하던 인생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반짝이는 것을 언제나 가장 조심하라
두 여자가 밝혀내는 ‘완벽한 삶’의 실체
『기척』은 파트가 바뀔 때마다 제인과 베라는 두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며 고급 주택단지 ‘손필드’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의 내막에 다가간다. 첫 번째 주인공 제인은 고급 주택단지의 외부인으로, 상류 사회의 질서에 속하고자 자신의 본성을 철저히 숨기면서도 새로운 삶의 무대가 자신에게 정말 안전한 공간인지 확인하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정보의 퍼즐을 모은다. 실종 사건의 당사자이자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베는 모든 퍼즐을 손에 쥔 인물로, 세간에는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제인과 에디가 함께 사는 저택 밀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베는 밀실에서 탈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동시에 완성된 그림의 각도를 조금씩 달리하여 조명하듯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남편이 자신을 위층에 감금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제인이 주어진 단서를 손에 쥐고 과정에서 결과로 천천히 나아간다면 베는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과정을 풀이하는 셈이다. 에디를 사이에 둔, 역할도 성격도 상반된 두 여성 인물이 마침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제인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건 당일의 진실이 세 사람의 저택을 뒤흔든다. 아름다운 동네와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새 삶…… 제인이 발 들여놓은 매혹적인 세계. 그러나 반짝이는 것을 언제나 가장 조심해야 한다. 화려한 보석함 속 장신구의 광채가 방심하는 사이 날붙이의 번뜩임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명을 쓰는 진창의 삼각관계 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이야기
‘평온한 주택단지에서 두 여성이 실종되었고, 어쩌면 그 범인은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스릴러의 정석적인 전개 속에서 독자를 진정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을 맞닥뜨리는 제인의 심리이다. ‘제인’은 제인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과거에 알던 여자아이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발목 잡혀 ‘제인’으로서의 삶을 빼앗기고 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고상하고 정돈된 손필드라는 질서에 녹아들기 위해 진짜 나를 숨기고 다른 사람을 연기해야 한다는 피로감. 평범한 자신이 독보적인 베의 존재감을 지워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모처럼 잡은 일생의 단 한 번뿐인 기회가 한순간의 실수로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그리고 기회라고 생각했던 새 삶이 어쩌면 목숨까지 위협할 덫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이 모든 심리적 압박을 짊어지고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어떻게든 위기를 헤쳐 나가는 제인의 조용한 사투가 독자의 심장을 불안으로 물들이다 끝내 차가운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에디 역시 에드워드라는 본명 대신 애칭을 쓰고 있었다. 베에게도 어떻게든 감추고 싶은 진짜 이름이 있다. 삼각관계 꼭짓점에 서 있는 모두가 보잘것없는 과거를 숨긴 채 얽히고설키며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연출해낸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 자신이 창조한 각본 속 인물을 연기하며 도금이 벗겨질까 전전긍긍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인을 믿고 따라가보자. 이 숨 막히는 난장의 끝에서 진정한 자신과 만나는 순간 절망 대신 거대한 해방감이 당신을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19세기 여성 성장 소설 『제인에어』가
20세기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지나
21세기, 마침내 『기척』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다
“『제인에어』를 유쾌하되 서스펜스가 넘치도록 비튼 놀라운 작품”(〈뉴스위크〉)이라는 찬사를 받은 『기척』은 해외 독자들 사이에서 ‘미래 세대가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나란히 놓고 읽을 걸작’으로 인정받으며 큰 화제를 모았다. 19세기 여성의 주체적인 자아 성립과 성장을 다룬 소설 『제인에어』가 레이철 호킨스의 『기척』에 전체적인 모티브가 되었다면, 『제인에어』 속 미치광이 아내 버사 메이슨을 제국 남성과 식민지 여성이라는 지배-피지배 관계 속 착취 구도 안에서 재해석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기척』 속 버사, 즉 베의 입체성과 존재감에 영감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제인은 더 이상 사랑스럽고 선량한 여주인공이 아니다. 다만 그런 사람을 연기할 뿐인 영리한 속물이며 부자들의 소지품을 습관적으로 슬쩍하는 좀도둑으로, 두 눈을 번득이며 신세를 역전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제인에어』에서 제인과 에드워드 로체스터의 사랑을 방해하는 걸림돌에 불과했던 버사는 더 이상 잠자코 남편의 관리하에 나날이 미쳐가다 파국을 맞이하는 여자가 아니다. 능력 있고 야망 넘치는 자수성가 사업가로, 저택 위층에서 숨죽인 채 이 모든 관계를 전복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두 소설을 재밌게 읽은 독자라면 레이철 호킨스가 새롭게 탄생시킨 『제인에어』 속 등장인물과 문장을 발견하는 재미와 더불어 촘촘히 배치해놓은 장치에서 원작과의 유사점 및 차이점을 찾아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