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창리(大昌里)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에 있는 이(里).
마을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고 웅천천이 흐른다. 방축리와 벽동을 병합하여 크게 창성하라는 뜻으로 대창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남당, 방축, 벽동, 시장, 절골, 한내, 접동곡 등이 있다. 방축은 마을에 방축이 있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벽동은 대창리 중심에 있는 마을로 음지뜸, 양지뜸으로 나뉜다. 시장은 웅천장이 5일에 한번씩 서는 마을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다. 절골은 옛날에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하여 생긴 이름이다. 한내는 한내라는 냇물 옆에 자리한 마을이라하여 생긴 이름이다. 접동곡은 시장 남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옛날엔 한 때 큰 마을이었다.
대창리(大倉里)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에 있는 법정리(里).
남쪽으로 명량산(鳴良山)[51.7m]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 김제시 성덕면과 이웃하고 있다. 지형 특성상 일제강점기부터 방조제를 쌓아 간척 사업을 하였던 곳으로 대창방조제와 서포방조제가 해일의 침해를 막아 주고 있다. 남으로 원평천이, 북으로 신평천이 흐르고 서쪽은 황해와 인접한 충적평야지역이다. 대창리는 동진강(東津江)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마을이다.
조선 말기 김제군 서포면(西浦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화동리·대장리·창리 일부, 반산면 화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창리라 하고 김제군 죽산면에 편입하였다. 대장리의 ‘대’자와 창리의 ‘창’자를 따서 대창리(大倉里)라 하였다.
-1995.1.1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가 되었다.
1927년 완공된 대창방조제는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종신리·죽산리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접안 하천은 동진강·원평천(院坪川)·신평천(新坪川) 등이며, 200여 호가 넘는 농가가 있다. 1929년 완공된 서포방조제는 서포지구·연포지구·서포특별지구 등으로 나누어 관리해 왔으며,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와 연포리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장·장돌(長乭)·우마(雨麻)·화동·해창 등이 있다. 대장은 약 25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 인근에 있는 강물이 항상 번들거렸기 때문에 번들이라고도 불렀다. 장돌은 마을 서쪽 약 3㎞ 지점 갯벌 속에 2,644.63~2,975.21㎡(800~900평) 정도의 돌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우마는 해일이 일어났을 때 장마철인데도 비를 맞지 않았다 하여 비 ‘우(雨)’자를 따고, 처음 터를 잡았다는 마씨(麻氏) 성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동은 이영최라는 사람이 마을 북동쪽에서 숙화봉무(菽花蜂舞) 형국의 명당을 찾아 선대의 묘소를 만들었는데, 주위에 꽃이 있어야 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자손들이 사는 터전에 꽃나무를 많이 심고 이화동(李花洞)이라 부르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동으로 고쳤다. 해창은 명량산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로, 해상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세금으로 거두어 들인 쌀을 보관하던 나라에서 운영하던 사창(舍倉)이 있던 동네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총 198가구에 415명[남자 218명, 여자 197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 가운데 6가구가 빈집이다(2009년 11월 현재). 전체 면적은 6.64㎢로 논 2.75㎢, 밭 5,008㎡, 목장 2,148㎡, 대지 0.09㎢, 임야 0.04㎢이다.
대창리
전라남도 완도군 군외면에 있는 리.
대창리 1, 2구로 나뉜다. 앞바다에 등대섬이 있다.
대창리(大倉里)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에 있는 리(里).
행정구역 폐합 당시 통폐합된 여러 지역 중 성대과 사창의 지명 한 글자씩을 따서 대창리라 이름 붙였다. 자연마을로는 창서마을과 성대마을이 있다. 창서(倉西)마을은 옛날 사창제도가 있었을 때 마을 동쪽에 사창(社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하여 사창(社倉 )마을이라 불렀고 그 후에는 사창(士昌)과 창서(昌西)라 나누어 불렀으며 이 창고 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창서(倉西)라 하였다. 성대(成大)마을은 안동김씨가 들어와 터를 잡고 살었는데 나라에 지은 죄가 있어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며 살았기 때문에 마치 성 안에 사는 것과 같다 하여 성대(城大)라 했는데, 후에 성대(成大)로 변했다고 전하기도 하고, 옛날에는 마을 앞의 벌판까지 마을이 이루어졌던 큰 곳이었다 해서 성대(成大)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대창리(大昌里)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에 있는 법정리(里).
서남쪽으로 멀리 금발산(金泊山, 432m) 꼭대기가 보인다. 동으로는 구릉야산을 지나 채약산(採藥山, 498.6m)에서 뻗은 연봉이 가로 막고 있다. 북쪽은 탁트인 넓은 들판이 펼쳐져있다. 대창천이 거의 마을 중앙을 굽이쳐 흐르고 있다.
대창리는 서남쪽의 금박산에서 동쪽으로 구룡산(九龍山, 674.4m)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준령과 동북쪽의 채약산에서 뻗은 연봉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북서 방향으로 흐르는 대창천을 따라 열촌(列村) 형태로 촌락이 형성되고, 그 주변으로 길게 농경지가 있다. 대창천은 북서쪽으로 흘러 금호강(琴湖江)에 유입된다.
대창리는 조선 말 흥해군 북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영천군 모사면 대부분과 현재 금호읍인 영천군 창수면의 일부 및 흥해군 북안면의 일부가 합쳐져 대창면이 신설됨에 따라 영천군 대창면에 편입되었다. 이때 흥해군 북안면 대창과 영천군 모사면의 사리를 병합하여 영천군 대창면 대창동이 되었다.
-1988.5.3에는 동(洞)을 이(里)로 바꾸면서 대창리가 되었고,
-1995.1.1 영천시·영천군 통합으로 영천시 대창면 대창리가 되었다.
대창리는 대창면 소재지로, 대창면의 북서부에 위치한다. 법정리인 대창리는 대창 1리와 대창 2리의 행정리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창(본동), 세마, 신당, 포척(浦尺)마을 등이 있다. 대창은 앞으로 마을이 크게 번창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포척은 원래 이름이 개자리였으나 한자로 표기하니 포척이 되었다.
대창리의 면적은 2.13㎢이며, 인구는 432가구, 915명으로, 남자가 485명, 여자가 430명이고, 인구 비중으로 따지면 대창면의 28%에 해당하는 인구가 대창리에 밀집해 있다(2012년 4월 현재).
대재리와의 경계가 되는 마을의 남동부에는 다수의 공장이 입주해 있으며, 지방도 909호선을 따라서 촌락과 함께 공장들이 입지해 있다. 대창면 소재지로서 대창면사무소, 경북 대창우체국, 대창면 보건지소, 대창면 농민상담소, 대창면 복지회관, 영천소방서, 대창면 의용소방대 등의 관공서가 있어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대창리의 교육 기관으로는 영창 중학교가 있으며, 신당길·공인길·금박로·금창로·선진길·용대로·대창시장길 등을 중심으로 도로명 주소가 부여되어 있다.
대창리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의 옛 이름.
대창리(大昌里)
황해북도 은파군 금대리 영역에 있던 폐리.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봉산군 감당면의 상창동 · 하창동 · 상보동 · 하보동 · 조동 · 한구동을 병합하여 덕재면에 신설한 리로서 큰 창고가 있다 하여 대창리라 하였는데, 창고 "창(倉)" 자 대신에 번창할 "창(昌)" 자를 따서 표기하였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은파군 금대리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