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문자와 상징
1. 이집트 상형 문자, 히에로글리프
이집트 상형 문자는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라 불린다. 그리스어로 '성스러운 기록(sacred carvings)'을 뜻하는 히에로글리프는 기원전 3,200년부터 394년까지 약 3,600여 년 동안 사용되었던 고대 이집트의 공식 문자이다.
2. 로제타 석과 샹폴리옹
1799년 나일 강 삼각주의 마을 라시드에서 글이 새겨진 현무암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로제타 석(Rosetta Stone)으로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식을 기념하여 만들어졌으며 이집트 상형 문자와 그리스어로 같은 내용의 글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석판은 이집트 학 붐을 일으켰고 해석을 위해 많은 학자들이 도전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4세기 말을 끝으로 급격히 사라져 버린 언어인데다 히에로글리프는 표의 문자(表意文字)라는 선입견이 해독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샹폴리옹(J. F. Champollion)은 '히에로글리프는 표의 문자'라는 기존의 설을 버리고 표음 문자라는 전혀 새로운 가설을 세워 그리스어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응되는 상형 문자를 대조·분석한 결과 상형 문자 해독에 성공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집트 학은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다.
3. 고대 이집트의 수호 부적
1) 스카라베(scarab)
스카라베, 즉 쇠똥구리는 고대 이집트에서 수호 부적과 인장으로 사용되었다. 쇠똥구리를 의미하는 고대 이집트어의 케페레르(Kheperer)라는 말이 '생성·재생'을 의미하는 케페르(Kheper)와 음이 유사해 천지창조의 신 케페리(Kheperi)로 숭배되었다.
2) 호루스의 눈, 우자트(Uzat)
하늘의 신 호루스의 두 눈은 태양(오른쪽 눈, 흰색)과 달(왼쪽 눈, 검은색)이라고 여겨진다. 이 호루스의 왼쪽 눈 우자트는 완전함, 밝은 통찰력, 풍요함을 상징하며 널리 사용되었다. 호루스가 세트에게 빼앗긴 눈동자를 되찾아와 살해됐던 오시리스가 부활했다는 신화에 의해 건강과 안전의 부적으로 사용된다.
3) 앙크 (Ankh)
앙크는 고대 이집트의 상징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생명·삶'이라는 뜻이다. 오시리스가 죽자 그의 아내 이시스가 태양신 라에게 기도해 지혜의 신 토트에게 영원한 생명과 치유를 상징하는 앙크를 받아 오시리스를 부활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대 이집트의 문자와 상징 (이집트에서 보물찾기, 2005, 아이세움)
고대 이집트 사원과 상류층의 무덤인 피라미드 벽에는 이상야릇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학문이 높은 사람들은 그 불가사의한 무늬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오랫동안 애썼다. 일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나타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림만 보면 이집트 공장의 모습, 시장에서의 거래, 왕의 행렬 등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주위의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수많은 그림과 기호들은 골칫거리였다.
뱀, 올빼미, 매, 집오리, 작은 새의 머리와 사자, 연꽃, 손, 앉아 있는 사람들,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 단단한 나무로 만든 큰 망치, 야자나무 잎이 조각되어 있었다. 책에 쓰인 글자처럼 길게 행을 이룬 모습이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기하학적 도형, 사각형, 삼각형, 원형 등 수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 불가사의한 기호들을 '상형 문자'라고 한다. 상형 문자 안에는 이집트 사람들의 역사, 풍속, 습관이 숨어 있다. 수많은 학자들은 무진 애를 썼지만 이를 풀지 못했다. 이집트 원주민의 한 부족인 콥트 인, 곧 고대 이집트 사람의 자손들도 조상의 문자를 잊은 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문자 해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내 그 어려운 상형 문자의 비밀이 풀리게 되었다. 1799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이집트 해안에 상륙해 로제타 시 근처에서 참호를 파다가 평평한 돌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스 어와 이집트 문자로 새겨진 커다란 돌이었다. 이 돌은 '로제타 석'이라고 명명됐는데, 이 돌이 바로 상형 문자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었다. 그리스 문자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서로 대조해 보면 쉽게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간단치는 않은 작업이었다.
그리스 어와 이집트 상형 문자가 함께 새겨진 로제타 석
25년이 흐른 뒤, 프랑스 학자 샹폴리옹은 어떤 이집트 기호가 조그만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기호에 해당하는 그리스 비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있었다. 샹폴리옹은 테두리 안의 단어가 프톨레마이오스를 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착안해 샹폴리옹은 테두리 안의 갖가지 기호가 문자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p, t, l, o, m, e, s, k, a, r'에 해당하는 10개의 문자를 알아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테두리에 싸여 있지 않은 다른 단어를 읽을 수는 없었다.
샹폴리옹
로제타 석의 이집트 상형 문자 '프톨레마이오스'
알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문자로 쓴 것은 사람 이름뿐이었다. 그 밖의 다른 단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쓰였다. 어떤 기호는 그 하나만으로 완전한 단어를 뜻했고, 다른 기호는 각각의 음절을, 또 다른 기호는 단지 문자만을 뜻한 것이다. 이집트 상형 문자를 완전히 해독하기까지는 이렇게 복잡한 과정이 수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계 여러 나라의 고대 문자 (백지 위의 검은 것, 2008, 아이세움)
고대 이집트 문자, 히에로글리프(기원전 3200년)
고대 이집트 문자로는 히에로글리프(hierogrlyph, 신성문자(神聖文字)) · 히에라틱(hieratic, 신관문자(神官文字)) · 데모틱(demotic, 민중문자(民衆文字)) 등 세 가지가 있다. 히에로글리프는 수메르 문자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로서 선사시대 말기(기원전 3200년경)부터 고안되어 왕의 이름과 업적 등을 기록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히에로글리프는 돌이나 나무 등에 새겨졌다고 해서 성각(聖刻)문자라고도 하는데, 때론 벽이나 파피루스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 이 문자는 상형문자 · 회화문자라고 일컬어지듯 대단히 구상적인 문자로도 유명하다. 문자의 소재가 인체와 인체의 각 부분과 사람의 동작, 동물과 식물, 지형, 천체, 갖가지 모양의 물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문자의 수는 700여 개로, 각 문자는 본래의 소재 자체를 나타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였으나, 일찍부터 음의 전용에 의해서 표음문자의 구실도 하게 되었으며, 두음(頭音)의 활용에 의해서 24개의 알파벳이 정해졌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각종 알파벳의 가장 먼 선조이다.
표음문자가 첨부됨으로써 문자로서의 히에로글리프의 구실은 더욱 확대되었다. 또한 한글이나 한자와 마찬가지로 가로세로로든 좌우로든 자유자재로 방향을 다르게 해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표음문자가 첨부됨으로써 피할 수 없는 결함도 생겨났는데 그것은 동음이의어의 경우였다. 이집트인들은 이 결함을 해소하고 말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 한정사(限定詞, determinative)를 사용했다.
히에로글리프는 셈 · 햄 계통의 대부분의 문자가 그러하듯이 자음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찍이 그리스 어 같은 외국어로 옮겨진 신명(神名) · 왕명 · 지명을 통해서든지, 혹은 고대 이집트 문자의 바로 뒤를 이어 사용된 콥트 어 같은 언어를 통해 유추되는 히에로글리프의 모음부가에 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는 있으나, 아직 이 문자로 기록된 말의 발음을 완전히 복원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집트인들은 히에로글리프를 발명하고 나서 이내 히에라틱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훨씬 후인 기원전 8세기경에는 데모틱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히에로글리프를 신의 말씀으로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4세기까지 3,000년 동안 사용했다. 그러나 이 신성한 문자는 '진보'가 없었다. 다만 세월이 더해지면서 처음 700여 개였던 기본문자의 수가 프톨레마이오스 조(기원전 305~기원전 30)에 이르면서는 수천 개에 달했다. 그러나 언어의 근본법칙만큼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조 때의 사제(司祭)가 무려 3,000년 전의 석판에 새겨진 〈피라미드 문서〉를 해독하여 에드푸 신전의 비문을 새길 수 있었다. 언어란 몇백 년만 흘러도 특별한 지식이 없이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정말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히에로글리프의 끈질긴 생명력은 이 문자가 바로 신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 문자는 인간이 신을 찾아 헤맬 때 의지해야 하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히에로글리프로 쓰인 고대 이집트 어는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지극히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생각뿐만 아니라 지극히 물질적인 현실 세계도 잘 묘사하고 있다.
1세기에 기독교가 이집트에 전파되면서 그리스 문자에 7개의 문자가 추가되어, 기독교가 이집트 말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 뒤 5세기경에는 이집트 각지에서 대부분의 문헌이,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문헌이 이 문자체계에 맞추어 기록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나타난 이집트 문자가 콥트 문자이다. 이것을 고대 이집트 어가 발전하는 마지막 단계로 본다.
그러나 콥트 문자체계는 순수한 이집트 문자체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 문자를 차용해서 표시했기 때문이며, 이 문자에 의해 표기된 콥트 어에는 고대 이집트 어에서 자음의 발음이 일부 변화 · 탈락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또한 방언으로 변화가 많았던 것이다. 어쨌든 콥트 문자는 계속 사용되었으나 아랍 어가 확산되면서 8세기부터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아랍 어가 이집트인들의 언어로 자리잡으면서 15~16세기부터는 그리스도 정교의 한 분파인 콥트 교의 종교용어로만 쓰이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 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조가 이집트에서 멸망(기원전 30년)한 뒤로 히에로글리프는 차츰 잊히기 시작했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이교도와 우상숭배자에 대한 억압으로 전수조차 어려워졌으며, 더욱이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가 신전 폐쇄령을 내리면서 히에로글리프를 알던 사제들마저 사라짐으로써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망각되어버렸다.
이렇듯 철저하게 망각 속으로 사라진 히에로글리프는 이집트를 침입했던 프랑스군이 1799년 로제타에서 비석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다시 알려졌고, 프랑스인 쟝 프랑소와 샹폴리옹이 읽는 법을 알아내면서 비로소 신비의 베일을 벗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대 이집트 문자, 히에로글리프 - 기원전 3200년 (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 100, 2009.4.30,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