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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소명
출 3: 1-8
우리들이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전환점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소명의식을 느낄 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의 삶을 새로운 장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명의식(sense of calling)이라고 하면 목회자, 혹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나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소명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에서도 구경꾼으로 서 있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늘 아웃사이더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소명, 부르심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어떤 경험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적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부르심 없는 믿음의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진다는 것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가장 중요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들을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내십니다. 맨 처음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불렀습니다. “아담아 내가 어디에 있느냐?” 이 부르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사람들을 죄와 저주,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기 위해 섭니다. 그래서 요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우리가 얻은 구원이 우연한 사건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어쩌다가 보니 예수 믿게 되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요6:44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알 때 우리는 구원의 감격과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부르심은 사명(사역)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된 일군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 구석 구석에서, 심지어 저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역에로의 부르심에 대한 개념이 과거에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중세 카톨릭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제계층에만 국한 시켰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중세 시대에는 사제계층과 평신도 계층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사제들 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주장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인 구분을 철폐하는 만인 제사장의 원리입니다.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인 제사장의 원리는 자연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직업이 바로 성직이 될 수 있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평신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평신도들의 모든 직업 활동도 바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주어진 고귀하고 값진 것이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신의 소명론을 주장했는데, 그가 말한 신의 소명(divine calling)을 받은 자는 사제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 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에게서 신적 소명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의 직업이 대장장이든, 구두 수선공이든, 푸줏간주인이든, 슈퍼마켓 주인이든 상관없습니다. 농부든 학생이든 주부든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과 소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인 성직자론, 만직 성직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명 받은 삶입니다. 소명 없는 삶이란 없습니다. 단지 문제는 소명감을 갖고 일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명을 가지고 일하는 것과 그냥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과 그냥 하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헌신하는 이 사역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 직업, 내 직장, 내 가정에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소명을 이루는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준비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명의식이 없던 그의 인생은 실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난 이후 그의 인생은 진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환경이나 건강도 두 번째 문제입니다. 소명을 받은 모세는 드디어 위대한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소명 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불렀습니까?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위해섭니다. 우리는 모세가 소명받은 사실을 통해서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모세를 부르기 전에 모세 주변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기 전에 이미 모세주변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모세가 소명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계획을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세우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오히려 모세가 준비된 것입니다.
출2:23-25에 보면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탄압했던 애굽 왕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고역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이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에게 상달하게 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속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주변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고 백성들을 권념하기 시작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행해 부르짖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을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표현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어 갔습니다. 보십시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애굽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애굽을 떠날 준비가 되자 드디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준비하셨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모세를 준비시켰습니다. 사실 40년 전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학문과 자신의 지위를 믿었습니다. 아주 자신 만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신 만만한 모세를 그때는 부르지 않았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자신 만만함이 깨어지고 하나님 앞에 낮아질 때를 기다린 것이지요. 얼마를 기다렸습니까? 40년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글에 보면 “하나님은 절대 자신만만한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자신 만만이 아니라 주신 만만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self-confidence 가 아니라 Lord-confidence 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믿지 말고 하나님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자신 만만이 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보십시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이제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습니다. 아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이 역사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런 모세의 변화를 눈치 챌 수 있는 것이 그의 아들들에게 붙인 이름들에서 입니다.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낳은 첫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단어는 ‘나그네’ 혹은 ‘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둘째 아들을 낳고는 그 이름을 엘리에셀이라고 부릅니다. 엘리에셀은 ‘나의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되신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광야에서 첫 아들을 낳고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며 별 볼일 없는 사람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낳고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 주위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사이에, 깨닫지 못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나의 주변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우리를 찾아와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짖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르짖어야 할 때 부르짖어야 합니다. 모세처럼 자신 만만이 아니라 주신 만만해야 합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입니다. 우리는 힘든 것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힘들어서 부르짖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가시떨기에 붙은 불꽃
두 번째 하나님이 모세를 평범한 일상적인 삶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양을 치는 것은 일상적인 삶입니다. 1절에 보면 “모세가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호렙산은 시내산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마 산의 다른 능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 호렙산에서 양떼를 먹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치는 모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보통 다른 종교는 신을 만나기 위해 특별한 것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40일, 100일 이라는 날짜를 정하기도 합니다. 삼천 배, 만 배 등 온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삼각산에 올라가야 하고, 며칠씩 굶어가면서 소리를 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막 소리를 지르다가 무슨 소리가 들리면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인가, 바람 소리인지 헷갈려서 혼나기도 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해서 밤을 새워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환상인지 꿈인지 정말 비몽사몽간에 뭔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엇인지도 모르게 헷갈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까?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 우리를 만나주시고 불러주십니다. 고기잡이하는 현장에서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 아모스는 뽕나무 농사를 짓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무 신비하게, 헷갈리게 무슨 이상한 소리나, 꿈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 소명을 받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되고난 다음에도 계속적으로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본문을 계속해서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가시떨기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나무는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모세는 그 불을 보려고 가까이 가게 됩니다. 무슨 가시떨기 나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떨기나무는 아주 흔한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불이 붙는 것도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가끔씩 떨기나무가 타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습니다. 날마다 보는 나무, 날마다 하는 일,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어 이상하다’ 아마 모세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 불붙은 나무를 보기위해 가까이 갔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느 날 일상적인 삶의 환경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보통 때가 다르지 않는 평범한 일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늘 드리는 주일 예배가 어느 날 이상하게 가슴 벅차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늘 하는 새벽기도인데 어느 날 마치 주님이 나를 감싸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슨 40일 철야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산에 올라가서 소리 지른 것도 아닌데 그런데 늘 하는 평범한 일상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의 발걸음을 붙잡아 둔 것은 이 불붙는 보잘것없는 나무였습니다. 오늘 우리를 붙잡는 것이 오늘 주일 예배일 수 있습니다. 저녁예배일 수도 있고, 새벽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광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일을 통해 모세를 불렀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모세가 받은 소명
세 번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구체적인 소명을 주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보면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두 번씩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모세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 그것도 두 번씩이나 불렀다는 것은 도저히 잘못들을 수 없는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번만 불렀다면 ‘잘못 들었나?’ 라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또렷하게 자기 이름을 그것도 두 번씩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희미하게 마치 안개에 가리워진 것처럼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헷갈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은 헷갈리지 않습니다. 헷갈리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너무 자기 생각, 자기 방법으로 가득해서 도무지 하나님의 음성을 안듣고 자기 고집을 피웁니다. 또 자기가 원하는 음성만 듣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음성만을 기다리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지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76년도 겨울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진로에 대해 굉장히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중 3때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겠다고 헌신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그런 마음이 많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속으로는 경북대 의대를 갈생각을 하고 슬그머니 문과가 아니라 이과를 선택하고 대구에 있는 유신학원에 다니면서 수학2, 물리등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에 가니까 목사님의 말씀이 서원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원을 안지키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저는 다른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설교하신 목사님이 헌신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수요일저녁에는 또 다른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는 사면초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제가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마당에 있는 나무에 싹이 나게 해주세요!’ 그 때가 1월, 한 겨울이었습니다. 싹이 날 리가 없지요. 저는 확실하게 싹이 안 날줄 믿었고 신학교에 안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기도하고 난 다음날부터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는데 봄 날씨처럼 되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나무에 싹이 났습니다. 저는 마당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두려워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다시는 헷갈리지 않았습니다. 혹시 목회하다가 어려움을 당해 목회를 그만 둘까 하다가도 그때마다 제 눈앞에는 싹이 난 나뭇가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희미하지 않습니다. 왔다 갔다 하지도 않습니다. 다 우리들의 믿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세의 이름을 부른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속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땅 자체가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이 거룩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가시떨기에 불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해 있기 때문에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의 경험은 장소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입니다. 왜 교회가 거룩한 곳입니까? 건물이 거룩합니까? 아닙니다. 이곳이 거룩한 이유는 이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이곳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체험, 그냥 장소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거룩,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러운 신발을 신고 서 있을 수 없어요. 두려움으로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라는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는 다는 것은 자기의 권리, 자기의 주장을 다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보면 노예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마치 노예가 주인 앞에 서듯이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이 거룩의 체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 떠는 일과 함께 시작됩니다. 교회가 가장 좋지 못한 것은 말이 많은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 가면 갈수록 말이 많고 자기주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거룩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잠잠합니다. 자기 논리 자기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7-8절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목적은 바로 이 일에 사용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브리스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까지만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십시요!’ 아마 모세는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기 원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시면서 ‘모세야 이것은 네가 할 일이다’ ‘이 일에 내가 너를 사용하기 원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보았습니까?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소명은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8절까지만 듣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말씀, 다 좋지요, 맞아요. 그럼요! 라고 반응합니다. 10절까지 안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네가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8절까지만 읽고 그냥 위로받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까? 소명 받은 자의 삶을 살려면 10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에 나를 불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소명 있는 자의 삶과 소명 없는 자의 삶은 다릅니다. 그냥 교회 출석하는 것과 소명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에 헌신했을 때 그는 놀라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네가 이 일을 해야 한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고 신앙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호렙산으로 가는 모세
출 3: 1-8
오늘은 본문을 중심해호렙산으로 가는 모세 출애굽기 3:1-8서 호렙으로 가는 모세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 또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의 종"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그 이전의 생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관심 밖의 일로 생각한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전의 생활을 살펴보면서 피차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모세가 지도자가 되었던 것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호렙산으로 향해서 가는 도중에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당시의 모세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1. 호렙으로 가는 모세는 새로운 계획을 할 수 없는 나이었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애굽인이 히브리인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인을 죽였고 히브리인끼리 다투는 것을 책망하던 때는 40세 되던 때이었습니다. 그때는 천하를 호령하고 싶고 히브리인의 구원자가 되고 싶었고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과 마음속에 간직한 인생의 계획은 안개처럼 지워지고 바로의 궁궐에서 쫓겨나서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이드로의 딸을 만나서 양치는 소녀 십보라와 결혼을 하였고 그와 함께 그 장인 이드로의 양을 먹이면서 생활한 것이 40년이 지나 그는 80세라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인생의 계획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그 나이가 되면 공상마저도 버려야하는 시기입니다.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젊은 사람들이 보면 웃음거리가 되는 정도입니다. 그러기에 그때는 그날 그날이 무사히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때입니다.
이런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연약한 자를 붙들어 사용하십니다. 에스겔37장의 마른 뼈의 환상이 그것입니다. 마른 뼈가 일어나 큰 군대를 이루는 환상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면 마른 뼈와 같이 소망이 없는 것도 새로운 군대가 되어 승리하게 됩니다. 모세가 자기의 계획도 세울 수 없는 나이이지만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이전의 실패와 좌절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소망이 있고 없고 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쓰신 대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를 부르셨던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붙들어 사용하시기만 하면 자신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없다고, 실패했다고, 죄인이라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서 사용하신 대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주님의 계획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자신의 소유에 대한 욕망이 없을 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소유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의 것을 탐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몇年 전에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야곱은 20年 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살면서 대단한 가정을 이루었고 거부로 불리울만큼 재산을 모아서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 형 에서를 위해서 짐승 떼를 선물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소유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젊었을 때부터 40년이나 장인 이드로의 양을 먹였지만 자신의 소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80세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있던 것도 귀찮아지고 버리고 싶은 것들이 늘어나는 나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의 모세는 이드로의 양 먹이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자기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없는 때가 된 것입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이 없어진다는 것은 욕심이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맡겨도 그 백성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망을 채우거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하거나 그 말씀을 어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죄악 속에서 방황하는 이유도 욕망을 이루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제 그런 욕망이 다 사라지고 없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 모세는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처럼 보이게 되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도 자신의 소유를 만들겠다는 욕망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욕망과 소망이 없어졌다고 하나님의 은총의 줄도 끊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붙들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모세에게 민족을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명이 주어진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명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의 소유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진 모세를 소망의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께 우리가 쓰임 받고 새로운 능력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계획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될 것입니다.
3. 모세는 양무리를 인도하였습니다.
본문 1절에는 모세가 그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고 그 양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시떨기 불꽃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까지 그는 양무리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양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가 그 양무리를 인도하여 광야 서편으로 간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충성된 사람을 찾습니다. 딤후2:2에는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하십니다. 또 눅16:10에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을 때도 자기가 맡고있는 양을 충성스럽게 돌보고 있을 때입니다. 나중에 사단의 유혹에 의해서 폐인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처음 왕인 사울도 자기의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때도 그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최선을 다한 모세를 향해서 히3:5에는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성품이 하나님의 일을 맡았을 때 그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최선을 다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까지 충성하였습니다. 히3:6 에서는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80세의 모세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무런 소유도 없고 개인적인 일을 가지기 위한 욕망도 없는 생활을 하였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이드로의 양을 먹이는 일에는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양을 먹이면서 호렙으로 갔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한시대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고 그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도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다고 버려서도 안되고 늦장을 부려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게 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호렙산으로 간 모세는 그 나이가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 없는 나이 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욕망도 사라진 대입니다. 그러나 이드로의 양을 먹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호렙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세를 부르시고 새로운 인생 길을 가게 하였습니다. 그 모세가 꿈도 꿀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그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하나니께 붙들려서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소망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름 받은 모세
출애굽기 3장 1~8절
찬 송 : 329장(주 날 불러 이르소서). 509장(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
아프리카 선교사로 활약했던 원시람의 성자 리빙스턴은 "인간은 사명이 끝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그만큼 중요하고 그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일을 맡기시고 인간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장 8절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보낼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부름 받은 모세의 사명적인 삶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께서 호렙산에 임하셨습니다(1~4절 상).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고 있을 때 호렙산의 떨기나무 불꽃 중에 여호와께서 임하셨습니다. 호렙산은 후에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거룩한 여호와의 산'으로 불려졌습니다. 이는 그 산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임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고, 이곳에서 십계명을 주셨으며,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있나이다." (출 3:4).
2.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4절 하).
호렙산에서 불꽃으로 임하셨는데, 오순절 오순절 성령 감림 때에도 타지 않는 불로 성도들의 심령에 임하셨습니다(행 2:2~4).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가이 갔습니다. 이 공경은(떨기나무) 힘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같은 환난 중에서 별망하지 않겠다는 하나니므이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은 어떤 환난 중에서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과 축복의 길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통당하고 수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햇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르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3. 모세가 거룩한 땅에 섰습니다(5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선 곳이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불결한 신을 신고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룩한 곳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자는 중생(重生)을 받아야 합니다. 죄인을 부르셔서 성령의 역사로 중생시켜 의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시키시려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4~25).
정리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문은 두드리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가정과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명을 깨달으시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거룩함과 중생함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사명을 발견한 순간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행복한 사명적인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소망의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끄싱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