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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죽다
창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 50:22-26 / [요셉의 최후] 요셉은 집안 식구들과 함께 계속해서 애굽에서 살다가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 23) 그는 자식인 에브라임 자손을 삼 대까지 보았으며, 맏아들 므낫세가 낳은 손자 손녀들까지 슬하에 거느리면서 살았다. 24) 그러고 나서 요셉은 `이제 나는 세상을 떠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이삭 할아버지 또 아버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약속하신 대로 이 땅을 떠나 너희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이끌어 내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25) 그러면서 요셉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맹세를 시켰다. `나하고 약속하자.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 이 몸도 꼭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말이다.' 26) 요셉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요셉의 몸에 향료와 향유를 넣어 미이라로 만든 뒤 관에 넣었다.
본문은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이자 야곱과 더불어 시작된 요셉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장수와 번성의 축복을 누리던 그의 생애를 하나님의 신앙적 고백 가운데 마무리합니다.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음(22-23)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낯선 애굽 땅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형통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자손의 축복을 주셔서 큰 가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백십 세를 살면서 삼대에 이르는 후손까지 보았습니다. 즉 요셉이 이스라엘의 성장을 목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의 가정을 통해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위대한 약속들을 따르도록 자손에게 말씀을 전하고 인도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수많은 열매, 즉 장차 하나님을 따르고 믿을 자손들을 주셨습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24) 요셉은 자기의 죽음을 예견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담담히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은 당신들을 돌보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인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언약의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임을 믿음으로 말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예언, 즉 이스라엘이 사 백 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살 것이라는 예언을 염두에 둔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요셉은 자기를 통해서 애굽과 열방을 구원하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그가 약속하신 뜻을 이루실 것이란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요셉의 죽음(25-26) 요셉이 나중에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때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라는 맹세를 그의 형제들에게 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위대한 신앙 고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에 있어서 애굽은 평생을 살아온 땅이며(41:46)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을 그리워한 것은 바로 언약을 철저히 신뢰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라고 증언하였습니다. 한편 요셉의 사망 후(주전 1805년경), 그 유해는 곧바로 가나안에 장사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약 삼백육십 년 후에 출애굽하면서(주전 1446년) 후손들의 손에 의해 가나안 땅에 안치되었습니다(수 24:32).
적용: 우리는 이생에서 부귀영화를 누림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본향을 더 귀하게 여기고 사모하고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가진 것이 많고 높은 위치에 있으면 사람에게 대접을 받습니다. 어떻게 보면 없는 사람과 좀 달리 차별적으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게 예외 없이, 또 예고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데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천국으로 이끌림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 없고 부족해도 아무 공로 없어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영원한 기쁨이 있는 천국에 들어가 쉼을 얻을 것입니다.
< 설 교 >
끝이 아름다운 요셉
창세기 강해설교를 마감합니다. 종종 우리는 역사 속에서 아름답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일본인에게 존경을 받는 혼다 자동차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라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대 기업을 이룬 그는 66세에 "내가 사장자리에 계속 있다면 회사의 성장이 둔화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는 아들 등 직계 가족의 혼다자동차 입사는 막아놓고, 기술자 후배에게 사장자리를 넘겨주고 떠났습니다.
깅리치 전 미하원의장도 "내가 하원에 남아 있으면 새로운 지도자가 성장하고 배울 기회를 얻는 것이 어려워진다"라는 말을 남기도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인생에서는 마지막 매듭을 어떻게 짓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끝을 맺느냐는 중요합니다. 어떻게 끝을 맺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이겠습니까?
110년 동안 이 땅에 살다간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몇 지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책임져 가족에게 인정받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요셉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책임지며 돌보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 가족으로부터 배척받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형제들에게 인신매매되어 애굽에 팔려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힘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명예도 얻고 권력도, 부도 얻었습니다. 얼마든지 가족에게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돌봅니다.
1. 원수같은 형의 아들들을 돌봅니다(21).
2.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손자까지 돌봅니다(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이 양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 첩의 아들입니다. 대상 7:14절을 보십시오.
"므낫세의 아들들 그 처의 소생은 아스리엘이요 그 첩 아람 여인의 소생은 길르앗의 아비 마길이니 (대상 7:14)"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이방 여인 그것도 첩의 아들까지 자애롭게 돌보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3. 그는 끝까지 경건한 가정을 가졌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들입니다. 요셉은 권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돈도 있습니다. 명예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첩을 거느릴 수 있는 문화입니다. 그러나 그는 깨끗한 가정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많은 어머니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히 가정을 정결하게 지켰습니다.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창 41:50)"
이 말씀이 오늘 날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끝은 가족을 책임지며 가까운 가족에게 인정받는 죽음입니다.
요셉은 출세를 하였습니다. 80년 동안을 총리로 있었습니다. 명예도 얻었습니다. 부도 얻었습니다. 많은 백성에게 유익함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그가 실패하였다면 그의 죽음을 결코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움 마무리는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은퇴를 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을 하여도 가정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참다운 성공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지 못했다하더라도 가정에서 성공한 사람이 참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흠이 무엇입니까? 하갈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가정의 실패입니다. 그의 사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류는 그것으로 지금까지 종교전쟁, 민족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습니까? 야곱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다윗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가정의 실패입니다. 그것으로 가족이 분열되고 나라가 분열됩니다. 마지막 순간 가족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잠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에 간 후 아이들이 아버지의 생을 돌이켜 보며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가정에 실패한 아버지다라고 말한다면 저의 삶은 아름다운 삶이 아닐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홀아비 과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 시기와 기간을 모르지만 같이 살다가 홀로 살 때가 옵니다. 그 때 남편은, 아내는 나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얼마 전 영락 교회 모 장로님의 장례를 치른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6.25 때 월남하여 열심히 사업을 하여 큰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초대 장로로 열심히 수고하여 큰 교회도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얼마 전 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 장례식에서 손녀가 나와 추모사를 읽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는 할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진실과 겸손과 바르게 사는 길의 표본이 되어 주시고 말없이 실천해 주신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모신 것을 저는 행복하게 생각하고 …… 할아버지, 우리가 할아버지 같은 신랑 얻게 해 달라고 소원했던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죽은 후 할아버지와 같은, 아빠같은 삶을 나도 살아야겠다고 하는 자식들이, 손자 손녀들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끝이겠습니까?
2.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요셉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미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24절을 보면 이제 죽음을 앞둔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유언적인 말을 합니다. 30세에 국무총리가(창41:46) 되어 80년 동안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의 유언적인 고백은 무엇입니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권고하시고,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라는 말입니다. "나는 죽으나"라는 말입니다. 인생의 한계와 유한성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권고하시고...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미래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일에 있어서 우리가 최선을 다 하되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에게 형제들에게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110살입니다. 조상들에 비하면 한참 일할 나이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장수한 것이지만 그 당시 조상들의 나이에 비교하면 중년입니다. 아브라함 175세(창24:7,8), 이삭 180세(35:28,29), 아버지 야곱이 147세(47:28; 49:33)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 비하면 110세는 아주 젊은 나이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인간들의 병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자신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부터 시작한 창세기는 마지막 족장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인간은 끝이 나지만 하나님은 계속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여호수아를 세워놓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보십시오. 시작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이 나라를 붙들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메시야적 예언을 해주려고 하시는데 자신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인천대 총장인 김학준 교수가 언젠가 신문에 '국민이 슬퍼하는 죽음'이라는 사설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죽음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 스탈린처럼 지도자가 죽으면 국민이 기뻐하는 죽음 이고
둘째 케네디나 처칠, 드골처럼 국민이 슬퍼하는 죽음입니다.
셋째는 헝가리의 카다르 죽음처럼 기뻐하는 쪽도 슬퍼하는 쪽도 있는 죽음이 있고
넷째 필리핀의 마르코스처럼 경멸하는 죽음이 있으며
대부분의 지도자처럼 추도식은 가족행사로 끝나는 무관심한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온 국민이 슬퍼한 죽음은 김구, 신익희, 조병옥박사의 죽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구분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한 일들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때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분명한 사명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리사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 방법과 똑같이 합니다. 목회를 기업을 이루듯 생각하고, 사회에서 출세하듯 신앙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 우리가 쓰임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님 왜 그만 두게 합니까?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 맡긴 일 충실히 하다가 영원한 나라로 가면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 순간까지 약속을 붙들고 소망을 갖는 신앙인- 나와 하나님에 대하여
요셉은 죽음의 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땅으로 자신의 시신을 안장해 놓을 것을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입니다. 애굽은 자신이 평생 산 땅이고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땅입니다.(창41:46) 그러나 그는 그곳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언약을 철저히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은 요셉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 11:22)"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미래를 소망하기 때문에 현재의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5:1-10) 우리는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갖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임종자들의 모습을 몇가지 유형별로 분류 하였습니다.
① “안죽어”형- 평생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형입니다.
② “왜 죽어”형- 분노를 터뜨리면서 죽어가는 형입니다. 죽을 이가 없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억울해 하면서 죽는 사람입니다.
③ 간청형- 죽음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 보고 애걸복걸하는 형입니다.
④ 절망형- 죽음 앞에서 충격을 너무 받아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죽는 사람들입니다.
⑤ 승리형-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부활이요 길이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웃으며 아름답게 인생을 끝마치는 형입니다.
우리들은 어느 형입니까? 마지막 순간 붙잡어야 할 소망이 없는 사람들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의 끝이 얼마나 추하게 보입니까?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라고 소리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라며 초라하게 숨졌고, 장개석은 "영웅이란 용감하게 실패하는 자이다. 그러나 희망은 ... " 라며 대륙 수복의 한을 남기며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싸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 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라는 말씀처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유명한 19세기의 미국 부흥사 D. 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습니다.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
죤 칼빈은 임종시에 "주님! 당신께서 저를 묻어 주시는군요 이것이 당신의 섭리로 된 것이기에 저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자 톰슨은 임종시에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것 중 최대의 발견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하자 "나의 생애에서 가장 큰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김활란 박사는 세상을 떠날 때 모두 슬퍼서 장송곡을 준비하려 했는데, 김 박사는 장송곡 대신에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고전 15:55-58 / 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있느냐?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죄, 곧 죽음을 가져오는 독침은 없어지고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율법도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재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57)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어찌 이루 다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58)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장래의 승리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에 항상 힘쓰십시오. 부활은 분명히 이루어지며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죽음까지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다하여도 희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시작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끝은 더욱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요셉의 유종의 미
창세기는 요셉의 별세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요셉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 조부의 장점만을 한 몸에 지닌 구약의 대표적 인물이요, 이상적인 성도의 모형(상징)입니다. 요셉은 가정에서 꿈꾸는 소년으로, 남의 집에서 봉사하는 노예로, 옥중 죄인들 속에서 죄인으로, 궁중 어전에서 해몽하는 지혜자로, 노년에 운명하는 자로서도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위인입니다. 요셉은 위로 하나님을 대하나 자신에 대해서나, 주인을 대하여나, 노예를 대하나, 부친을 대하나, 형제를 대하나, 왕을 대하나, 국민을 대하나, 불행한 역경에서나, 순경에서나,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을 대하나 조금도 변하지 않는 신앙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요셉은 높은 이상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을 잘 꾸었으며 해몽 또한 잘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 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상을 세우는 것입니다. 옛 말에도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면 안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요셉은 고난 중에도 인내했습니다. 우리가 높은 이상을 가질 때 필연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을 탄생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모양이 됩니다. 진주도 조개 속에 모래가 들어갔을 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모래를 부드럽게 쌉니다. 여기서 탄생된 것이 진주입니다. 요셉은 갖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서 그 시련을 이긴 것입니다. 요셉은 깊은 신앙이 있었기에 그 시련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 50:20에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았던 옛날의 사실에 대해서 복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으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라고 위로했습니다. 바로 요셉의 이 깊은 신앙이 그로 하여금 성공케 했습니다. 요셉은 이런 신앙으로 생활하였고 그의 생은 종말을 아름답게 맺었습니다.
1. 효행의 미 창 37:13에 “요셉은 어려서 명령에 순종하였고”라고 했고, 창 47:12에 “애굽 총리가 되어 영달할 때 성심으로 노부를 봉양하시었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효자 요셉 덕분에 노경에 최대의 우대와 존경을 받으면서 다복하게 살다가 향년을 누리고 늙고 쇠약해져 하나님의 섭리대로 고요히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창 50:1에 “요셉이 아비의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다.”라고 했습니다. 떠나간 영혼에게는 우리의 눈물과 입맞춤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나 남아 있는 유해에 우리의 경의를 표함으로써 떠나간 영혼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요, 그의 몸이 훗날 주님의 재림과 아울러 영광스럽게 부활 변화할 것을 믿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창 50:2-3에 “아비의 몸에 향 재료를 넣는데 40일이 걸렸고 70일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수종 의사에게 시체를 방부조치 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부친이 애굽에서 별세하였기 때문에 애굽 풍습을 따른 것이 아니라 부친의 유언에 따라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할 목적이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그 당시 애굽에서 가나안 복지까지는 장장 300여리 길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시체를 방부처리하는 미이라를 만드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본문에 의사라고 하는 것은 시체해부를 포함한 미이라 만드는 특수 기술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체 방부 절차는 이러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의 비공을 통하여 뇌수를 긁어내고, 옆구리를 찢고 내장을 긁어낸 후 청결하게 하여 향료와 장비와 기름으로 채우고 혈관에는 액체를 주입하고 한 달동안 소금과 소다같은 강한 용액에 두었다가 종려나무 술로 씻은 다음에 40일 후에는 주단 등속의 천으로 그 신체를 잘 싸고 고무진액을 발라 흰 천으로 다시 싸서 관에 넣는다고 합니다. 왕의 시체는 먼저 금관으로 만든 내관에 넣고 그 후에 돌로 만든 외관에 넣었다고 합니다. 요셉 시대의 미이라가 지금도 애굽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70일 동안 그를 위해 애곡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곡하는 기간은 30일(민 20:29, 신 34:8)이요, 애굽 왕을 위한 애도 기간은 70일이었다고 디오더로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을 위해서 70일간이나 애도했으니 국장의 대례로서 예우한 것입니다. 요셉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가나안 땅에 매장할 것을 결심하고 바로 왕에게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얻었습니다. 여기서도 요셉의 겸손과 순종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평시에 부친이 소원하시던 대로 가나안 복지 선영의 묘실에 장사 지냈습니다. 요셉의 덕행 중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별히 효행을 다한 미는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2. 화목의 미(용서의 미) 형제의 우애와 화목을 도모하여 따뜻한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요셉에게는 위로와 즐거움이요, 형제들에게는 영계요, 이로움이 되어왔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죽은 후 형제들을 향하여 “두려워 마옵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니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형제의 화목과 관용과 용서해 주는 요셉의 인격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요셉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관대하고 보복하기를 싫어하고 용서하는 성품을 가진 것을 봅니다. 이 점이 요셉의 성격 중에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덕목입니다. “당신의 자식을 기르리이다.”라고 하는 적극적 사랑은 과연 요셉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적인 모습입니다.
3. 죽음의 미 창 50:22-23에 “요셉이 일백 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장수하여 증손까지 자기 무릎에서 양육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지성으로 효성을 다하고, 형제들에게 위안과 자비와 화목을 베풀더니 계명에 약속한 장수와 형통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자 형제들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창 50:24에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죽어가는 마당에 저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애굽에서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녕 너희들을 찾아오셔서 너희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내신다.” 라고 했습니다. 애굽 땅에 정주하지 말라, 약속의 땅을 사모하라, 영광의 그 날을 대망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신앙으로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도록 훈계하였습니다.
바세르 월크스는 말하기를 “요셉의 이와 같은 미덕의 기초는 신앙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마음, 정신, 사상, 인격, 행동, 그 전부가 하나님이라는 보자기에 싸여 있다.” 고 했습니다. 히 11:22에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다.” 고 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보다 미래를 믿는 신앙이 위대한 신앙이요, 면류관입니다. 창 50:25-26에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죽으매 그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야곱도 애굽에서 죽었고, 요셉도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유해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 선영에 매장되었고, 요셉의 유해는 방부처리하여 애굽에 입관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출애굽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여 출발하였고(출 13:19), 그 후 약 40년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셉의 뼈를 세침 땅 막벨라 굴 선영에 장사 지냈습니다(수24:32). 야곱의 해골은 가나안 땅에서 그의 자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표적이 되었고, 요셉의 해골은 그의 자손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신앙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창세기는 창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창 50:26에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는 말로 마쳤으니, 창조에서 시작하여 사망으로 마친 비극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는 창조에서 출발하여 미래의 부활 세계로 전진하는 신앙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창세기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요셉의 마지막
(창50:22-26)
창세기의 끝부분에는 요셉의 마지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창50:22-23의 내용으로 요셉이 애굽에서 110세를 살며 자손 3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창50:24-26의 내용으로 요셉이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니 그때 자신의 유해를 가지고 가서 그곳에 장사 지내 달라 유언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창50:22대로 요셉은 가족들과 함께 애굽에 거하며 110세를 살았습니다. 요셉은 어려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 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였습니다. 다시 가족들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오랜 시간 후에 가족들을 다시 만났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기적이었습니다. 게다가 110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창50:23대로 자신이 애굽에서 낳은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성장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다시 그 자녀들이 성장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애굽에 홀로 버려졌던 어린 요셉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두 지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창 49:22에서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야곱을 통해 말씀하신 복된 예언의 성취이며, 또한 창 1:27-28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요셉처럼 죄 가운데 팔려서 하나님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다시 하나님 가족을 만나고 성령의 권능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들을 낳고 기름으로써 하나님 가족의 큰 지파를 이루는 복을 누리게 됨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받는 풍성한 은혜와 사랑이요, 큰 복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가 되게 하실 것이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127:3-5에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자녀가 가득한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영적으로 요셉처럼 자녀의 자녀의 자녀까지 보고 양육하는 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 요셉이 이제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창50:24대로 아버지 야곱과 똑같이 형제와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말합니다. 이 애굽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저 가나안이 영원히 살 곳이며 때가 되면 이 애굽을 떠나 저 가나안으로 꼭 가게 될 것임을 확신시키고 소망을 굳게 갖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의 형제와 자손들에게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임을 증거하고 확신시킴으로써 하늘나라에 대한 굳은 소망 가운데 살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고난의 삶이라면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위안을 얻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혹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린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소망을 주고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
요셉이 전한 말은 그의 후손들이 요셉이 죽은 후 본격화된 애굽의 탄압을 겪게 될 때 요긴한 말씀이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의 때에 붙들고 위안 받고 견뎌낼 수 있는 말씀을 미리 준비해 주십니다. 사람인 요셉을 붙들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늘 함께 하시며 권고하시고 마침내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위안 받고 견뎌내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권고하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것을 말입니다.
요셉은 창50:25대로 자신을 후손들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권고하사 구원하여 가나안 땅에 인도하여 들이실 그 날에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서 그곳에 장사 지낼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11:22에서는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죽지만 끝이 아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도리어 가나안에서의 새 삶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50:26대로 요셉의 후손들은 요셉이 죽자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입관하였습니다. 그 후의 매장은 먼 훗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나안에 이를 때 그곳에 할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는다 해도 그것은 단지 입관할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늘나라에 이르는 그 날까지 우리는 썩지 않게 보존될 것이요, 마침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시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우리는 애굽 백성이 아닌 가나안 백성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하늘나라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는다 해도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새로운 삶을 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담대하십시오.
애굽 총리인 요셉의 유언
요셉이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을 그의 형제들에게 하며 애굽에서 110세에 죽는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 하면서 시작하여 야곱의 장례식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친히 언약을 주시도 그 하나님의 언약을 대대로 흘러가게 하시어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인 야곱을 통해 그리고 요셉을 통해 더욱 구체화 시키고 계신다.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을 애굽으로 요셉에게 내려 가기전 구체적으로 확인을 받은 브엘세바 에서의 제단을 쌓고서 드린 제사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한번 야곱은 확인을 하였다.
네 허리에서 난자들이 장차 이룰 큰 민족인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이 죽는 날까지 17년동안의 고센땅에서의 그의 삶은 이 하나님의 언약을 그의 아들들 에게 입이 닳도록 말을 해 주었을것이다. 지금 요셉이 그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 보았던것 같다.
지금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 으로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를 애굽 이라는 당대 강대국에서 권력자로 살아온 80년의 요셉의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 앞에서의 유언은 현재 세상을 살아가는 나 에게 다른 가치관으로 마지막 그의 유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가 멸시천대를 다 받아가며 살았던 그의 종살이 에서 또한 오해를 받아 감옥의 죄수로 전락해 버린 그의 삶속에서 이젠 애굽의 총리가 되어 80년 동안 애굽 안에서 바로 왕 다음 으로의 권력을 가진 자로 살아간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세상성공 이고 이 땅에서의 번영이고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이 땅에서의 그런 삶을 추구하는 성공한 삶의 모본이었지만 이 땅에서 정작 성공을 이룬 당사자인 요셉 안에 있는 가치관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꿈꾸는 자로 살아간 하늘에 속한 가치관으로 살아간 것이다.
야곱의 마지막 유언과 비슷한 맥락의 유언을 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두 가지 언약 중에 한 가지인 자손에 대한 부분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셔서 애굽의 고센땅에서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신 것은 보았고 목격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관한 부분은 아직 보질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부분도 마치 지금은 보질 못하고 지금 죽으나 반듯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확신 하며 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말을 한다. 이 말속에 요셉의 믿음의 확신이 깔려 있다. 추측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죽어 그것을 보지 못하나 언젠가 그 날이 올때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고 부탁을 한다. 요셉은 지금 애굽의 권력의 2인자인 총리다. 그가 죽으면서 하는 대목이 그의 인생 최대 관심사 였었는데, 요셉의 관심은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바라보고 살았다. 요셉이 이 땅에서의 삶 자체가 모든것을 가진자의 위치 에서 살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앞에 엎드리는 자로 하나님 나라를 품고 살았던 이 땅에서도 성공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도 성공한 사람으로 그의 인생을 마감하고 있다.
요셉의 유언대로 요셉의 해골을 유월절을 지내고 애굽에서 출애굽 하는날 모세의 손에 요셉의 해골이 주어져 모세가 직접 들고 애굽을 나온다. 광야 40년간 모세는 요셉의 해골을 잘 보관하였다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행하며 정복한 에브라임 지파의 영역 안에 있는 세겜에 요셉의 뼈를 묻는다. 요셉의 유언은 400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후손들에게 정확히 전달되어진 것 같다. 언젠가 애굽을 나갈 때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나가야 된다는 사실을 누군가 모세에게 전해 준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산 요셉의 일생에서 나는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지금 나는 매일 하나님 마음을 깨닫고 사는 자인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며 살고 있는가? 나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나는 나의 자식들에게 무슨 말을 남기며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이 무엇이지를 알고 내 인생을 정리를 할지를 생각하게 하신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포기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 나라를 나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소원을 오늘도 이루어 드리는 그런 인생으로 살아가도록 나를 이 아침에 깨우치게 하신다...
요셉의 사망
서론
창세기 1~11장은 이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하늘과 땅, 인간을 포함해서 이 세상은 어디에서 기원되었는지, 인간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죄는 어디에서 왔는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종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국가는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 복음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모든 것의 기원을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에, 마귀는 이 부분을 신화나 가설이라며 집중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참으로 귀한 내용이 담겨있고,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할 확실한 진리인 것입니다.
12~50장까지는 네 명의 족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그리고 50장에 기록된 요셉의 사망으로 창세기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것으로 시작되어, 50장의 사망에 대한 내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요셉 인생의 후반부는 매우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창세기 50장 22~23절에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자식을 낳고 손자와 증손자, 고손자, 현손자를 보았고, 그들을 자기 슬하에서 양육하였습니다. 생각 만해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손자를 보는 것이 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복의 개념이 좀 바뀌었습니다마는 구약성경에서 복의 상징은 손자입니다. 잠언 17장 6절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잘 되는 것이 영화가 되고,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 됩니다. 그래서 손자가 많이 있으면 여러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격입니다. 저는 이제 손녀가 하나 생겼는데, 지금도 손주만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요셉은 110세에 죽었습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110세를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수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10세 이전에 죽으면 좀 아쉽고, 110세를 넘기면 오래 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적인 인간의 수명을 110세로 보았는데 요셉도 110세에 죽었고, 여호수아도 110세에 죽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면 그는 17세에 노예가 되어 13년 동안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노예 생활뿐만 아니라 감옥 생활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의 시간을 지나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10세에 죽을 때까지 애굽의 총리노릇을 했으니, 80년의 세월을 총리로 봉직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총리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총리가 되어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애굽 총리는 바로가 임명하고 신임하는 이상 죽을 때까지 총리를 하였습니다. 13년을 고생하고 80년을 총리로 일하게 되었다면 이 일은 할 만한 일인 것입니다. 요셉은 80년 동안 총리로 일하면서 권력과 부요를 누리고 바로 왕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할 사람이 없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13년 동안 고생하게 하셨지만 80년 동안 애굽의 총리로 살도록 보상해 주셨으니, 하나님이 요셉의 고난에 대해 엄청난 보상을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고생한 사람에 대해서는 넘치도록 보상해 주시는 ‘보상의 하나님’(God of Compensation)이십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이 젊은 시절에 잠깐 동안 고생을 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재산, 자식, 건강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그 모든 고난의 시간동안 입술을 지키고 믿음을 지켰더니, 후에 하나님이 그를 칭찬하시고 보상해 주셨습니다. 욥기 42장 10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명의 자식을 잃었기에 10명의 자식을 주셨는데 세 명의 딸과 일곱 명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 딸들은 전국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만일 그곳에서도 미스코리아대회가 열렸다면 언니가 진, 둘째가 선, 막내가 미였을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보상입니다. 그리고 욥은 140세까지 사는 장수의 복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잠깐 고생을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고생에 대해서 엄청난 보상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때로는 고생과 슬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생도 하고 슬퍼보기도 하고 괴로워 울면서 기도도 해 봐야 인생과 하나님을 배우는 시간이 되는 것이고, 또 그 고생 중에도 믿음을 지켜 나가게 되면 하나님의 보상도 만 배, 억 배로 돌려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모든 고생과 슬픔을 다 보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요셉의 사망에 대한 본문을 살펴보며 세 부분(요셉의 현실, 요셉의 소망, 요셉의 믿음)으로 나누어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창 50장 24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이제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당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에게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에 그는 자기 해골을 애굽에 묻지 말고 출애굽을 하게 되는 그 날 반드시 나의 해골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갈 것을 맹세시켰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믿음입니다.
Ⅰ. 요셉이 당한 현실
요셉은 24절에 “나는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다 똑같은 말을 해야 할 때가 오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꼭 말하지 않을 지라도 결국은 현실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애굽에서 입관되는 것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처음 1장과 2장은 생명력이 넘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생명체로 가득 채우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이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만 합격하면 영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온통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계속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0장은 요셉이 애굽에서 관에 들어갔더라(He was put in a coffin in Egypt.)는 내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으로 시작해서 사망으로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시작과 끝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다를까요? 왜 영생할 수 있었고, 소망이 있었던 존재인 인간이 관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인간은 왜 죽어야만 하는 걸까요? 왜 인간은 늙어야만 하는 걸까요? 30대의 나이로 계속 영생을 누리면 안 되는 건가요? 왜 인간은 늙고 병들고 고생하고 재난을 당해야 하며, 태풍과 토네이도는 왜 부는 것이며, 쓰나미와 에볼라는 또 무엇입니까? 왜 결국 인간의 인생은 이러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인들이 이것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대답을 내 놓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창세기 3장에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반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죄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마귀를 통해서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 창세기 3장의 대답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사망의 원인은 죄에 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창세기 3장만 잘 읽어도 세상 모든 철학자의 지혜를 합친 것보다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롭고 훌륭하게 산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 위대한 족장들도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치사한 짓을 했고, 야곱도 남을 속이고 사기를 쳤던 사람입니다. 또한 다윗과 같은 인물도 많은 허물이 있었고, 당대의 의인이라고 불린 노아도 술을 마시고 나체로 잠들었다가 자기 아들인 함을 저주받은 인생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허물이나 실수, 죄가 단 한 가지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행위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라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가 죽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셉도 결국 애굽에서 입관되는 것으로 생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혹 “나는 죄인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는 분이 계시다면, 돌아가시지 않고, 늙지 않으시면 그 주장을 믿어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요셉도 이 피할 수 없는 위대한 진리를 현실로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물론 불신자도 죽음이 끝이 아니지만 죽어봐야 더욱 좋지 않은 것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비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죽음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성경은 창세기로 끝나고 그 다음 출애굽기 이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책의 분량이 줄어좋고, 읽기 편해서 좋겠지만 그러나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이어 출애굽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소망스러운 일입니까? 출애굽을 통해서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신약성경에는 성도의 죽음을 ‘별세’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이중표 목사님이 ‘별세의 신학’을 강조하신 바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1절을 보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눅 9:31). 여기서 ‘별세’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가 ‘엑소더스입니다. 그러므로 별세가 출애굽인데, 출애굽이 절망스러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은 소망스러운 일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출애굽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5절에도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을 출애굽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벧후 1:15). 베드로는 ‘나의 죽은 후에라도’라고 말하지 않고 ‘나의 떠난 후에라도’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떠난다’는 의미의 헬라어 단어로 ‘ἔξοδος’가 사용되었습니다. ‘ἔξοδος’(엑소더스)는 두 단어의 합성어인데, 접두사 ‘εκ’는 영어의 ‘out’을 의미하고, 뒤에 영어의 ‘way’라는 의미로, ‘Way out’, 즉 ‘나가는 길’, ‘벗어나는 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셉은 죽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벗어나는 길이 있음을 말해주는 책이 출애굽기(Exodus)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죽음을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 이후부터의 중요한 주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더 좋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늙거나 병들거나 아프거나 죽음이 다가오는 현실이 있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시고 더 큰 소망을 갖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Ⅱ. 요셉의 소망
24절에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죽을 때가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 건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셔서 반드시 너희에게 방문하실 날이 온다. 그 날이 오면 너희들을 애굽에서 건져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시편 102편 26~27절에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신명기 33장 27절에도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의 피난처가 될 것이다(Eternal God will be your refuge). 사람은 죽고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계속 바뀔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토록 죽지 아니하시고, 바뀌지도 아니하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은 이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문하실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리라’는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God will surely visit you.”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방문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서 출애굽(Exodus)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요셉의 소망이 헛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맹세로 약속하신 내용에 근거한 소망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14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자손은 400년 간 애굽에서 종이 될 것이지만 내가 그 애굽을 징치하고 그 백성을 다시 애굽에서 이끌어 낼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약속하신 것을 요셉이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6장 3~4절에도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 요셉은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 46:3~4).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을 확실히 소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출애굽은 BC 1446년에 일어났습니다. 야곱이 70명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430년 전이기 때문에 BC 1876년입니다. 야곱이 내려올 당시 요셉의 나이는 39세였고, 요셉이 110세에 죽었으니 하나님이 방문하실 것이라고 말한 때는 아직 354년이 남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확신하는 것입니다. 354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너희를 방문하시고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요셉은 말씀에 근거를 둔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소망대로 요셉이 죽은 뒤 354년 후에 그들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장 16~17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출 3:16~17).
4장 29~31절에도 하나님이 방문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출 4:29~31). 여기 기록된 ‘권고하셨다’, ‘돌아보셨다’는 의미의 동사는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파카드’라는 동사인데, ‘방문하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문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소망은 정확히 354년 후에 모세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소망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육신이 죽었더라도 생명의 부활을 통해 영생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방문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Ⅲ. 요셉의 믿음
25절에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자손들에게 맹세를 시켰습니다.
장례식의 중요한 절차가운데 입관, 발인, 하관이 있습니다. 입관은 시신을 관 속에 넣는 것이고, 발인은 하관하는 장소로 떠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관은 관을 땅 속에 묻는 것입니다. 하관을 하면 인간의 시신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몸에다 향재료를 넣고 자신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이것은 입관만 하고 하관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반드시 나의 해골을 가지고 올라가서 가나안 땅에 하관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지금 300여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방문하실 테니 그 때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서 하관을 하라고 자손들에게 맹세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은 자기 아버지처럼 가나안 땅 헤브론 막벨라 굴에 하관을 하라고 요청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요셉이 애굽 사람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애굽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인이고 국가적인 영웅입니다. 그런 영웅이 가나안 땅에 가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면 국민들이 이를 허용할 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국장으로 치러야 하고, 70일 동안 애곡을 해야 하는 애굽 사람들의 정서를 잘 알고 있다 보니 애굽에서 입관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큰 권력과 부요를 누렸고, 애굽에 마음을 두고 살아도 아무도 책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마음은 애굽에 있지 않았습니다. 애굽은 자신이 묻힐 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 기록된 히브리서 11장에는 요셉의 믿음이 최고조로 올라갔던 순간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 11:22). 후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출애굽이 있을 것이며 그 때에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했던 것이 요셉 생애의 최고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요셉이 꿈을 해석한 일이라든지, 형들을 용서한 일이 아니라 내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당부한 것이 요셉의 최고 믿음이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은 과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까요?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요셉의 해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354년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할 때에 그가 맹세시킨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요셉의 시신이 들은 관을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한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두 개의 박스를 가지고 다녔는데, 첫째는 율법의 두 돌비가 들어 있는 법궤였고, 둘째는 요셉의 해골이 들은 박스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법궤라는 단어와 관이라는 단어가 ‘아론’이라는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셉은 그 믿음대로 자신의 해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사망 사건은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망은 애굽을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굽은 언제나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력과 부요를 누려도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두고 살 곳이 못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애굽과 같은 세상을 벗어나면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은 ‘낙원’(Paradise)입니다.
결론
우리는 죽으면 낙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낙원은 원래 이 땅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영생할 수 있었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낙원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서사 시인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창세기 3장을 중심으로 『실낙원(Paradise Lost)』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낙원은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장소가 옮겨진 것뿐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낙원이 하늘로 올라가 버린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은 강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옮겨갔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4절에도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영혼이 낙원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낙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애굽과 같은 이 세상을 벗어나 하늘의 낙원으로 들어가는 출애굽(Exodus)인 것입니다.
저는 미국 남부 뉴올리언즈에서 5년 동안 공부를 했고, 또 1년은 버밍햄 알라바마에서 티칭을 해서 도합 6년을 미국 남부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은 신분 때문에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신발을 신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만 보면 그의 신분을 금방 알 수 있었는데, 이 흑인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송가를 지었습니다. 이런 가사의 찬송이었습니다. “I got shoes, you got shoes, all of God's children got shoes to wear. When I get to Heaven gonna put on my shoes. I'm gonna walk all over God's Heaven. (나 신발 신었네! 너 신발 신었네! 우리 신발 신었네! 나는 천국에 가서 내 신을 신고 천국을 돌아다닐 것이네!)” 그들에게 천국은 신발을 신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신발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는 아름답고 기쁨이 있고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하늘에 있던 낙원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하늘의 낙원이 땅으로 내려와서 이 땅이 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생하며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늘 요셉의 관을 들고 다녔는데, 관이 계속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방문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계속해서 요셉의 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관을 보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끝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사람은 죽지만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 “성도에게는 애굽과 같은 세상이 아니라 낙원과 같은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죽음(출애굽)을 통과하여 낙원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이후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이 대답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예표로서, 신약성경은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만이 죄 사함을 받고 출애굽(Exodus) 이후에 낙원에 들어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낙원으로 들어갈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이 맹세하신 것이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이후로 요한계시록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데, 구약은 ‘오실 예수’, 신약은 ‘오신 예수’를 증거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어 애굽 같은 이 세상을 살다가 출애굽하면 낙원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