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학기 3주차 과제
“경건의 일기” - 다시 쓰는 주기도문
정 우 조
드높은 하늘에 계시지만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내려오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
자녀들의 고통과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소서.
선지자들이 노래했고 죽어가는 모든 이들이 갈망한
당신의 나라가 곧 임하게 하소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당신의 공의로운 뜻이
이제는 타락한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오늘날 우리 중 다수는 일용할 양식조차
누리지 못한 채로 죽어갑니다.
강하고 부유한 자들은 죄를 저질러 놓고도
자신이 용서를 구해야함을 깨닫지 못하고,
연약하여 억압당하는 자들이 도리어
감당하기 무거운 법의 권세에 짓눌려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써 이 거대한 죄,
강자지존과 적자생존이라는 사회 구조적 죄악을,
부디 용서하시고 부숴주십시오.
타인을 지배하려는 원초적 욕구와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으로 번영을 누리고자 하는
추악한 유혹에 우리가 빠지지 않게 하시고.
다만 이 모든 악으로부터,
증오의 굴레와 폭력의 쳇바퀴에서 우릴 구원하소서.
모든 나라와 권세, 그리고 영광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겸손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당신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통치는 영원할 것이며,
고통 받는 자들의 절규는 언젠가 완전히 그칠 것입니다.
아멘.
‘다시 쓰는 주기도문’이라는 글을 뜬금없이 적어본 이유는 최근 몇 달간 기도 중에 하나님의 깊은 부재(임재가 아니라)를 체험하며 절망했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가슴만 치며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다 어느 날 문득 주기도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를 해도 해도 그분이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날이 갈수록 악의에 가득찬 응답만 돌아오는 것 같았기에.
그 날 새벽에 주기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문장을 도무지 넘어설 수가 없었다. 당장 내 눈 앞에서 죽음의 분투를 감당하고 있는 지체와, 내 주변에만 해도 너무나 많은 환우들,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그들의 가족들과 가난한 그들을 향한 이 사회의 냉대 어린 시선까지.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행여 다른 이들의 기도에 방해가 될까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채 고개를 처박고 한참을 꺼윽거리며 오열했다.
예수께서 이 땅을 거니셨던 시절, 그분은 빛나고 영광스러운 저 ‘신의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의 소외된 땅 갈릴리에서, 율법의 전문가들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기본적인 경건의 의무조차 지킬 여력이 없어 부정한 사람들로 분류되었던 ‘암 하아레츠(עם־הארץ, 땅의 사람들)’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그 분이 보여주신 낮은 자의 하나님이 성서의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나의 기도를 통해 이 땅의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연약하고 아프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도래하여 그들을 절망 가운데서 구원해내고 온전히 회복시킬 것을 믿는다는 선언이다.
난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할 때, 정말 하늘에 계신 저 분은 내 이야길 듣고 계신 것일까. 다시 아버지의 보좌 우편으로 되돌아가신 주 예수께서는 혹 이 땅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닌가. 그 분은 이제 드높은 하늘에, 너무 멀리 계셔서, 우리의 피맺힌 기도가 닿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임하지 않는 구원을 부르짖으면서, 회복은커녕 더욱 가파르게 죽음의 비탈길을 치달아가는 내 사랑하는 이웃들을 보면서 마음이 찢어지고, 믿음은 희미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올 것인가. 아니, 그런 곳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나는 이제 역사적 예수를 향한 믿음보다, 어쩌면 그의 나라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당위에 기대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기도를 다시 써보았다. 그것은 나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실은 퇴락해가는 내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