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보고 싶어.......”
“.....?.......”
방금 할머니와 헤어져, 강릉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첫째 딸 아이가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소리를 했을 때, 우리 가족은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1 분전에 만났던 할머니가 왜 보고 싶냐 고 되물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김장 하는 날,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아내는 할머니가 이제 늙으셔서 김장하는 것이 힘들어하시니까, 너희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학교 공부보다 어른들 김장하는 것을 도와주고 그러면서 김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학교공부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 주었다.
어디서든, 어떤 일이든, 반듯한 우리 아이들이 아빠나 엄마의 파격적인 말에 군말 않고 따라 준 것은, 나의 급진적인 교육철학을 이해 했다기 보다, 아마 아이들이 두 노인네를 생각하는 정이 각별한 때문이리라.
특히, 첫째 아이는 나를 닮은 구석이 있어서, 당찬 면이 많다. 노인에 대한 그 아이의 각별한 점은 몇 년 전 사건을 되새기면, 증명이 된다.
하교 시간, 시내 버스에서 노인이 차에 올랐는데, 노인을 앞에 두고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어떤 아이를 향해 첫째 아이는 빨리 일어나라고 호통을 친 적이 있었다. 절대 남에게 허튼 짓을 하지 않는 여자 아이가 그런 무서운 면을 보인 것은 오로지 노인에 대한 각별함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 첫째를 낳고, 두 달을 키우고 한국 부모님에게 맡기고 우리 부부는 일본에 갔다.
그리고 아이가 첫 돌 정도 지났을 때, 귀국을 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아이의 암죽(이유식)을 먹어보라고 나에게 권했다.
그 맛은 상상을 초월할 훼괴한 맛이었다.
“이게 무슨 맛이야?”
나는 놀라서 아내를 쳐다 보았고, 아내의 말로 왜 그런 얼토당토 않는 맛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 암죽은, 두 노인네가 구할 수 있는 좋다는 것들이 전부 들어 있었다.
마늘, 파, 당근, 문어, 미역, 닭고기, 현미, 수수......두 노인네가 얻어들은 몸에 좋다는 것들은 육해공군 가리자 않고 전부 집어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첫째 아이는 유난히 튼튼하다,
초유를 두달 밖에 먹지 않아서 걱정을 했는데, 두 노인네의 그런 암죽은 아내의 초유를 능가했던 것이다.
노인네들이 시골에 거처를 정하고, 바쁘다는 핑개로 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나보다 오히려 첫째의 전화가 더 많았다.
첫째가 노인네들을 대하는 방식은, 손자가 할머니 할아버지 대하는 그런 평범한 방식이 아니라, 가여워서, 애처러워서 어쩌지 못하는, 두 노인네를 아이 다루듯이 보살피는 면이 있다.
17년 전, 마치 자신을 그렇게 키워 준 두 노인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맏아들로 귀엽게만 키워져, 부모에게 잔정도 표현 할 줄 모르는 불효막심한 나의 모자란 면을 채워줄 듯 말이다.
“이번 배추는 포기가 좀 작은 것 같던데........”
“그래도, 그 배추......농약 모종 때 딱 한번만 친 거예요.”
“그래?”
아내는, 그런 배추임을 강조했고, 나는 가슴이 아려왔다.
고추며 배추를 우리에게 먹일려고, 어떻게든 농약을 안치고 키우려고 고생했을 두 노인네가 가슴이 아팠다.
그것을 매년마다 염치 없이 받아먹는 나는, 첫째 아이 보기가 미안했다.
“주희야.....앞으로 매주 마다 아빠가 옥계에 태워줄테니, 책 가지고 가서 할머니 집에서 있다가 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 보고 싶다는 아이를 차에 태워 주는 것 뿐이었다.
“올해 배추는 유난히 맛있어요. 아마 김장도 참 맛있을 거예요.”
“...........”
나는 아내의 이야기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