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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名字)의 언(言)〉
데즈카 오사무 씨의 ‘인생의 은인’
2024년 8월 12일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씨가 인생의 은인(恩人)으로 이름을 든 인물(人物). 그 사람은 초등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초등학생 때, 노트 한 권 분량의 만화를 그렸다. 그것을 수업 중에 읽고 있던 친구가 선생님에게 들켜 노트를 빼앗겨 버렸다.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날 줄 알았는데,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 주며 “위대한 만화를 그렸으면 좋겠다.”라고. 데즈카 씨는 “선생님 덕분에, 나는 인생에 광명(光明)을 찾았다.”라고 회상했다. 〈『글라스(유리)의 지구(地球)를 구하라』 코분샤(光文社)〉
좋은 교사(敎師)와의 만남은 인생을 풍부하게 한다. 그의 선생님은 모두가 어떤 꿈을 갖고, 인생을 어떻게 걸어가고 싶은지를 평소에 잘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육(敎育)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소리를 ‘잘 듣는’ 일 것이다. 이케다(池田) 선생님이 “말에 의한 표현(表現)에서 그 속에 있는 정신(精神)의 심음(心音)을 잘 들어간다.”라고 강조한 것은 1975년 8월 12일. 소카대학(創價大學)에서 실시된 교육부(敎育部)(당시)의 하계강습회(夏季講習會)였다.
오늘은, 이 강습회를 연원(淵源)으로 하는 ‘교육본부(敎育本部) 원점일(原點日)’. 당시, 선생님이 말한 “나의 최종(最終) 사업(事業)은 교육(敎育)”이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창가(創價)의 교육자는 ‘아이의 행복(幸福)이 제일(第一)’인 사회(社會)를 목표(目標)로 진력(盡力)하고 있다. 벗의 분투는 미래를 여는 광명이며, 그 꾸준한 헌신(獻身) 속에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모습이 있다. (剛)
〈명자(名字)의 언(言)〉
상대를 보다 가깝게 느끼려면?
2024년 8월 13일
신임(新任) 남자지구리더가 좌담회(座談會)에서 자기소개를 한 후 말했다. “여러분을 기억(記憶)하고 싶기에, ‘지쳤을 때, 리프레시(refresh)하는 방법’을 들려주세요.” 그는 참석자의 ‘책을 읽는다’ ‘흑초(黑醋)를 마신다’ 등의 회답(回答)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용모(容貌)와 이름뿐만 아니라, 상대를 가깝게 느끼는 정보(正報)가 있으면, 보다 기억에 남는다. 그 행동에 납득(納得)하면서 진지(眞摯)하게 듣는 자세에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도 느꼈다. 그것은 “모두를 빨리 기억해, 함께 지역광포(地域廣布)에 힘쓰고 싶다.”라는 정열(情熱) 때문이라고.
소설 『신·인간혁명(新·人間革命)』에도, 야마모토 신이치(山本伸一)가 만난 사람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장면(場面)이 곳곳에 있다. 창립자로서 소카학원(創價學園)에 갔을 때는, 함께 스포츠에 열중하는 속에 학생에게 말을 건네며 얼굴이나 이름, 출신지 등을 마음에 새겼다.
또, 회합(會合)에서 재회(再會)한 벗에게는 당시를 술회(述懷)하며, “당신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요. 잘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따뜻하게 격려했다.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엮었다. “광선유포(廣宣流布)란, 인간관계(人間關係) 속에서 깊은 우정(友情)의 씨앗을 심고, 강한 신뢰(信賴)의 씨앗을 심으면서, 존귀(尊貴)한 불연(佛緣)을 넓혀 가는 작업(作業)이다.”라고. 그 씨앗을 키우는 것은 상대를 깊이 알고 싶다는 진지한 정열(情熱)과 마음을 맺으려는 성실(誠實)한 행동(行動)이다. (白)
〈명자(名字)의 언(言)〉
파나마운하 건설에 참여한 유일한 일본인 기사
2024년 8월 14일
독일의 문호(文豪)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야마시타 하지메(山下肇) 번역〉라며 꿈꿨던 것이 있다. 파나마운하(運河)의 완성이다. 세계의 해운(海運)에 혁명(革命)을 가져온 항로(航路)는, 1914년의 8월 15일에 개통했다.
이 공사(工事)에 종사한 유일한 일본인이 기사(技師) 아오야마 아키라(青山士). 건설현장은 말라리아 등으로 인한 희생자가 끊이지 않아 “신(神)이 버린 땅(地)”이라고까지 불렸다. 하지만 그는 가혹(苛酷)한 환경(環境)을 견디며, 탁월(卓越)한 기능(技能)으로 난사업(難事業)에 공헌(貢獻)했다.
아오야마(青山)를 지탱한 것은, 스승으로 우러른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의 만남. 후세(後世)에게 보내는 최대 유물(遺物)은 “용감(勇敢)하고 고상(高尙)한 생애(生涯)” - 우치무라의 이 말이, 그를 세계사에 남을 대사업으로 몰아넣었다. 그 후, 아오야마는 자기 방에 우치무라의 사진을 장식하고 만년(晩年)까지 사제(師弟)의 길에 살았다.〈타카사키 테츠로(高崎哲郎) 저(著) 『기사(技師) 아오야마아키라』 鹿島出版会〉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항상 말했다. “마키구치(牧口) 선생님께 있어서 도다(戶田) 선생님은 좋은 제자(弟子)였다. 도다 선생님께 있어서 나는 좋은 제자였다. 제자에 의해 스승의 가치(價値)가 결정(決定)된다. 스승이 아니라 제자로 결정된다.”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해, 자신의 행동으로 광포(廣布)의 항로(航路)를 세계로 열었다. 그 길을 잇는 우리들이다. 지금 이 때 어떻게 싸우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자세야말로 후세에게 보내는 최대의 유산(遺産)이 되고, 사제(師弟)의 정의(正義)를 미래에 빛나게 하는 힘이 된다. (当)
〈명자(名字)의 언(言)〉
평화는 ‘망각과의 싸움’
2024년 8월 15일
‘전쟁을 모르는’ 전후(戰後) 출생의 비율(比率)은 지금, 일본의 총인구의 90%에 육박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전쟁체험(戰爭體驗)의 풍화(風化)가 우려(憂慮)되고 있다.
한 장년부원(壯年部員)의 사망한 장모는, 히로시마(広島)에 원폭(原爆)이 투하(投下)되었을 때, 폭심지(爆心地)로부터 약 3.2킬로의 지점에서 피폭(被爆). 당시 장모는 뭘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생전에 말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장년은 장모의 체험을 듣지 마음에 남았다(안타까웠다).
마음의 구멍을 메우듯 어느 날부터 도서관 등에 다니며 피폭의 실상(實相)을 공부했다. 그 속에서 느낀 것이 있다. “장모님은 말씀을 안 하신 것이 아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우셨던 것이다.”라고. 깨달은 것은 “내가 배운 것을 미래를 위해 전해야 한다.”는 결의로 바뀌었다. 그리고 원폭(原爆)의 비참함을 전하는 종이연극을 다수(多數) 작성(作成). 초·중학교 등에서 피로(披露)하고 있다.
일찍이 고르바초프(Mikhail Sergeevich Gorbachev, 1931~2022) 전(前) 소련 대통령은, 이케다(池田) 선생님과 엮은 대담집(對談集) 『20세기 정신의 교훈』 속에서 말했다. “평화란 일면(一面), ‘잊지 않는 것’이며, ‘망각(忘却)과의 싸움’이다.”라고. ‘잊지 않는’ 것이, 같은 과오(過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힘이 된다. ‘잊지 않도록’ 전쟁체험을 구전(口傳)하는 것은 미래의 평화를 쌓는(구축하는) 토대(土臺)가 된다.
오늘은 ‘종전일(終戰日)’. 전몰자(戰歿者)를 추선(追善)하며, 과거의 교훈(敎訓)을 진지하게 계속 배우고 싶다. (子)
〈명자(名字)의 언(言)〉
‘잘 먹겠습니다’는 무슨 의미?
2024년 8월 16일
식사 전에 말하는 ‘잘 먹겠습니다(いただきます[이타다키마스], 잘 받겠습니다])’는 ‘동식물(動植物)의 생명(命)’을 받는다는 의미(意味)이기도 하다고 들었다.
식육연구가(食育硏究家)인 사토 고시(佐藤剛史) 씨의 『자취(自炊) 남자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 이야기』(現代書林)에서는, 다른 견해(見解)로 ‘잘 먹겠습니다’를 파악하고 있다. 식사(食事)를 준비해 준 사람은, 먹는 사람을 위해서 요리를 하고, 시간을 썼다. 따라서 만든 사람의 ‘존귀한 인생의 일부 시간’을 받는 것에 감사(感謝)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라고.
사물(事物)을 이해(理解)할 때, 널리 알려진 내용 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통찰(洞察)을 거듭해 본다. 그러한 자세는 이해를 한층 더 깊게 만든다.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어서(御書)의 “우리가 살고 법화경(法華經)을 수행(修行)하는 장소(場所)는, 어디나 상적광(常寂光)의 도읍(都邑)이 된다.”(신판1784·전집1343, 통해)를 배독(拜讀)하며, 자신이 있는 ‘지금’ ‘여기’가 적광토(寂光土)다, 라고 지도(指導)했다. 덧붙여 선생님은 이 가르침은 ‘자신으로부터 멀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존귀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권위주의(權威主義)에 대항(對抗)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며, “인간은 가까운 것의 존귀함을 잊기 쉽다.”라고 논했다.
자기 자신의 지금의 과제에 도전하며, 눈앞에 있는 한사람에게 진력한다. 이것은 자신의 성장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가정(家庭), 지역(地域)이라고 하는 환경(環境)을 빛내는 한 걸음(一步)이 된다. 이 시점(視點)을 득(得)한 사람은 보다 강하게 보다 잘 살 수 있다. (白)
〈명자(名字)의 언(言)〉
서민의 풍토기(風土記)를 기록한 민속학자 미야모토 쓰네이치 씨
2024년 8월 17일
세토내해(瀨戶內海)에 떠 있는 야마구치(山口)·스오오시마(周防大島)의 미야모토 쓰네이치(宮本常一) 기념관(記念館)을 방문했다. ‘여행하는 거인(巨人)’이라고 불린 민속학자(民俗學者)의 미야모토(宮本) 씨는 일본 열도(列島)를 구석구석까지 걸어, 팽대(膨大, 방대)한 조사(調査) 자료(資料)를 남겼다.
들은 것을 기록(記錄)한 노트나 원고(原稿) 등의 문서(文書)는 1만점을 넘고, 각지에서 촬영한 사진은 10만장에 이른다. 왜 그렇게까지 걷고, 사람과 만나고, 계속해 기록했는가. 무엇을 전하려고 했던 것인가.
미야모토 씨는 ‘서민(庶民)의 풍토기(風土記)를’이라고 제목을 붙인 문장에 기록했다. “일반대중은 목소리를 세우고(높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항상 비예(誹譽)되고 간과(看過)된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행동(行動)했다. “옛날부터 전쟁을 싫어하며 일벌레처럼 일하고 궁핍(窮乏)했지만, 끝까지 살아가는 힘을 갖고 이웃을 믿고” 걸어온 서민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 라고.〈『풍토기 일본』 제2권 ‘주고쿠(中国)·시코쿠(四国) 편(編)’ 월보(月報), 平凡社〉
니치렌 대성인(日蓮大聖人)께서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속에 국(囗)에 옥(玉, 왕이라는 뜻)의 ‘국(国)’이 아니라 국(囗)에 민(民)의 ‘국(囻)’이라는 글자를 많이 쓰셨다. 다른 어서(御書)에는 “왕(王)은 백성(百姓)을 어버이로 하고”(신판1886·전집1554)라고도 말씀하셨다. 봉건시대(封建時代)의 한복판(한가운데)에서, 그것이 얼마나 용감(勇敢)하고, 획기적(劃期的)이었는가.
민중(民衆)이야말로 일체(一切)를 낳는 ‘부모’이며, 사회(社會)의 ‘주역(主役)’ - 이 신념(信念)으로 평화(平和)와 행복(幸福)의 대화(對話)를 넓히고 싶다. 서민(庶民)의 대연대(大連帶) ‘창가(創價)’라는 긍지도 드높게. (実)
名字の言
手塚治虫氏の「人生の恩人」
2024年8月12日
漫画家の手塚治虫氏が人生の恩人として名前を挙げた人物。それは小学校の先生だった▼小学生の頃、ノート一冊分の漫画を描いた。それを授業中に読んでいた友人が先生に見つかり、ノートを取り上げられてしまう。職員室に呼ばれ、怒られると思ったら、よくできているとほめてくれ、「大いにマンガを描きなさい」と。氏は「先生のおかげで、ぼくは人生に光明を見いだした」と振り返る(『ガラスの地球を救え』光文社)▼良き教師との出会いは人生を豊かにする。氏の先生は皆がどんな夢を持ち、人生をどう歩んでいきたいかを日頃からよく見ていたに違いない▼教育にとって最も大事なことは、子どもたちの声を「よく聞く」ことであろう。池田先生が「言葉による表現から、その奥にある精神の心音を、よく聞いていく」ことを強調したのは1975年8月12日。創価大学で行われた教育部(当時)の夏季講習会であった▼きょうは、この講習会を淵源とする「教育本部原点の日」。当時、先生が語った“私の最終の事業は教育”との言葉を胸に、創価の教育者は“子どもの幸福が第一”の社会を目指して尽力する。友の奮闘は未来を開く光明であり、その地道な献身の中に教育の目指すべき姿がある。(剛)
名字の言
相手をより身近に感じるには?
2024年8月13日
新任の男子地区リーダーが、座談会で自己紹介した後に言った。「皆さんのことを覚えたいので、“疲れた時のリフレッシュ方法”を聞かせてください」。参加者の「本を読む」「黒酢を飲む」などの回答に、彼は耳を傾けていた▼確かに容姿と名前だけでなく、相手を身近に感じる情報があれば、より記憶に残る。その行動に納得しつつ、真剣に聞く姿勢から、彼の心の奥にある思いも感じた。これは“皆のことを早く覚えて、共に地域広布に励みたい”との情熱ゆえだと▼小説『新・人間革命』にも、山本伸一が出会った人のことを覚えようと努める場面が随所にある。創立者として創価学園に行った際は、一緒にスポーツを興じる中で生徒に声をかけ、顔や名前、出身地などを心に刻みつけた▼また、会合で再会した友には当時を述懐し、「あなたは小学校の五年生だったね。よく覚えているよ。私はこれからも、ずっと見守っていきます」と温かく激励した▼池田先生は記している。「広宣流布とは、人間関係のなかに、深き友情の種を植え、強き信頼の種を植えながら、尊き仏縁を広げていく作業だ」と。その種を育むのは、相手を深く知りたいとの真剣な情熱と、心を結ぼうとの誠実な振る舞いである。(白)
名字の言
パナマ運河の工事に携わった唯一の日本人技師
2024年8月14日
ドイツの文豪ゲーテが「私の目の黒いうちに」(山下肇訳)と夢見たものがある。パナマ運河の完成だ。世界の海運に革命をもたらした航路は、1914年の8月15日に開通した▼この工事に携わった唯一の日本人が技師・青山士。建設現場はマラリアなどによる犠牲者が後を絶たず、「神の見捨てた地」とまで称された。だが彼は過酷な環境に耐え、卓抜した技能で難事業に貢献した▼青山を支えたのは、師と仰いだ思想家・内村鑑三との出会い。後世への最大遺物は「勇ましい高尚な生涯」――この内村の言葉が、彼を世界史に残る大事業へと駆り立てた。その後、青山は自室に内村の写真を飾り、晩年まで師弟の道に生きた(高崎哲郎著『技師 青山士』鹿島出版会)▼池田先生は常々語っていた。「牧口先生にとって、戸田先生は、よき弟子であった。戸田先生にとって、私は、よき弟子であった。弟子によって、師匠の価値が決まる。師匠ではなく、弟子で決まる」▼池田先生は師の心をわが心とし、自らの行動で広布の航路を世界へと開いた。その道を継ぐ私たちである。今この時にどう戦い、何を成し遂げるのか。その一人一人の生き方こそ後世への最大の遺産となり、師弟の正義を未来に輝かせる力となる。(当)
名字の言
平和とは「忘却との戦い」
2024年8月15日
“戦争を知らない”戦後生まれの割合は今、日本の総人口の9割に迫る。社会全体で戦争体験の風化が懸念されている▼ある壮年部員の亡き義母は、広島に原爆が投下された時、爆心地から約3・2キロの地点で被爆。当時、義母が何を見て、何を感じたのか。生前に語ることはなかったという。壮年は、義母の体験を聞けなかったことが心残りだった▼心の穴を埋めるように、ある日から図書館などに通って被爆の実相を学んだ。その中で感じたことがある。“義母は語らなかったのではない。語れないほど、つらい思いをしたのだ”と。気付きは“私が学んだことを未来のために伝えなければ”との決意に変わった。そして原爆の悲惨さを伝える紙芝居を多数作成。小・中学校などで披露している▼かつてゴルバチョフ元ソ連大統領は、池田先生と編んだ対談集『20世紀の精神の教訓』の中で語っている。「平和とは一面、『忘れないこと』であり、『忘却との戦い』である」と。“忘れない”ことが、同じ過ちを繰り返さないための力となる。“忘れさせない”ように戦争体験を語り継ぐことは、未来の平和を築く土台となる▼きょうは「終戦の日」。戦没者を追善し、過去の教訓から真摯に学び続けたい。(子)
名字の言
「いただきます」はどんな意味?
2024年8月16日
食事の前に言う「いただきます」は“動植物の命”を頂く意味でもあると聞いた▼食育研究家の佐藤剛史さんの『自炊男子 「人生で大切なこと」が見つかる物語』(現代書林)では、別の見方から「いただきます」を捉えている。食事を用意してくれた人は、食べる人のために料理をし、時間を使った。よって、作り手の“尊い人生の一部の時間”を頂くことに感謝する意味でもある、と▼物事を理解する時、広く知られる内容のほかに、“別な意味があるのでは?”と洞察を重ねてみる。そうした姿勢は理解を一層深いものにする▼池田先生は、御書の「われらが住んで法華経を修行する場所は、どこであれ常寂光の都となる」(新1784・全1343、通解)を拝し、自分がいる“今”“ここ”が寂光土である、と指導した。加えて先生は、この教えは“自分から遠く、高い所にあるものが尊いと思わせる権威主義に対抗するものでもある”とし、「人間は身近なものの尊さを忘れがちなのである」と論じる▼自分自身の今の課題に挑み、目の前にいる一人に尽くす――それは己の成長のみならず、自らの生きる家庭、地域といった環境を輝かせる一歩となる。この視点を得た人は、より強く、より良く生きられる。(白)
名字の言
庶民の風土記を記録し続けた民俗学者・宮本常一氏
2024年8月17日
瀬戸内海に浮かぶ山口・周防大島の宮本常一記念館を訪ねた。「旅する巨人」と呼ばれた民俗学者の宮本氏は、日本列島を隅々まで歩き、膨大な調査資料を残している▼聞き書きノートや原稿などの文書は1万点を超え、各地で撮影した写真は10万枚に及ぶ。なぜそれほどまでに歩き、人と会い、記録し続けたのか。何を伝えようとしたのか▼氏は「庶民の風土記を」と題する文章に記している。「一般大衆は声をたてたがらない。だからいつも見すごされ、見おとされる。しかし見おとしてはいけない」と思って行動した。「むかしから戦争ぎらいで、仕事の虫のように働き貧乏したが、生きぬく力をもち、隣人を信じて」歩んできた庶民の姿を残したい、と(『風土記 日本』第2巻〈中国・四国篇〉月報、平凡社)▼日蓮大聖人は「立正安国論」の中で、囗に玉(王の意)の「国」ではなく、囗に民の「?」という字を多く書かれた。別の御書には「王は民をおやとし」(新1886・全1554)とも仰せだ。封建時代のただ中で、それがどれほど勇敢で、画期的であったか▼民衆こそ一切を生み出す「親」であり、社会の「主役」――この信念で平和と幸福の対話を広げたい。庶民の大連帯「創価」の誇りも高く。(実)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