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83
1월27일[연중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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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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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_y8Y2vpRSA (최진묵 리카르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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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아주 특별한 서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히브리서는 말 마디 그대로 히브리인들, 즉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이자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한 논쟁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 왔는데,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성경학계에서는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더 이상 바오로 사도를 히브리서의 저자로 단언하지 않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어휘나 문체가 놀랄 정도로 세련되고 수준이 높아, 비교적 거칠고 투박한 바오로 사도의 표현과 맥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과는 달리 히브리서에는 바오로 사도가 저자라는 언급은 물론 암시조차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 방법이나 신학적인 내용에서 바오로 사도의 서간과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의 배경을 지닌 유다계 그리스도인으로 추정합니다.
히브리서는 신약 성경들 가운에 가장 완숙한 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의 전통 안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탁월하게 풀어냅니다. 메시지 역시 심오하면서도 다양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 친절하고도 자상하게 답변을 이어갑니다.
베드로, 바오로 사도가 활발히 복음을 선포하던 시절 수많은 유다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잘 나가던 시절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유다인만 3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개종 작업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분위기였는데, 지상천국이 조만간 도래할 듯한 예감이었는데...
화려한 기적과 치유는 잠시뿐 이제 고통스럽고 지루한 광야 여정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에 상심이 컸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둘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누군가’가 이 히브리 서간을 쓴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을 읽다보면 때로 지나치게 강한 경고 말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고 말씀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진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어 감동적입니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위기를 맞이한 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지금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를 잘 극복하도록 돕습니다.
결국 히브리서는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실체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이자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희생 제물로서, 완전한 제사를 하느님께 바친 분임을 강조합니다.
더불어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따라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무엇보다도 강한 믿음과 불굴의 인내를 간직할 것을 당부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히브리서 10장 37~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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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LDoXzy4X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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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꿈을 주려는 꿈이 심어지는 것>
왜 애플사는 창조적일까요? 그들은 모든 경쟁사보다 훨씬 더 혁신적입니다. 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것일까요? 그가 미국 민권운동 이전에 고통받았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시대의 훌륭한 연설가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였을까요? 그리고 왜 라이트 형제는 동력 조절 유인 비행을 발명해 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골든 써클(Golden Circle)이라 부릅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이 작은 아이디어는 몇몇 단체 그리고 리더들이 왜 영감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왜?”라고 했을 때 “이윤 창출”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왜”라는 것은 즉, 무엇이 당신의 목적인지? 당신의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의 신념이 무엇인지를 의미합니다. 당신이 속한 조직은 왜 존재합니까? 당신은 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납니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애플사의 사례를 주로 듭니다. 애플사가 다른 여타 기업과 같다면, 그들의 마케팅 메시지는 이렇겠죠.
“우리는 훌륭한 컴퓨터를 만듭니다. 그것들은 매우 아름다운 디자인에, 쉽게 이용할 수 있고 편리합니다. 사고 싶나요?”
애플사가 실제로 선전하는 방식은 이렇죠.
“우리가 하는 모두 것들, 우리는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는 우리의 방식은 제품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며, 간단히 사용할 수 있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훌륭한 컴퓨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구입하고 싶은가요?” 분명하게 다릅니다. 저는 정보의 순서를 뒤집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라이트 형제의 일화만큼 좋은 예는 없지요. 대부분 사람은 사무엘 피에폰트 랭리(Samuel Pierpont Langley)에 대하여 모릅니다. 20세기 초, 인력에 의한 비행에 대한 추구는 오늘날의 닷컴 열기와 비슷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시도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성공 비법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미 육군성에서 5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버드 학위가 있고 학술 협회에서 일했으며 인맥 역시 아주 좋았죠. 그는 그 당시 모든 지식인을 알고 있었죠.
그는 풍부한 자금으로 최고의 지식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이후 시장 상황은 훌륭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지는 어디서나 그를 취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랭리를 지지했죠. 그런데 어째서 그에 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을까요?
백여 마일 건너 오하이오 데이턴에는 올 빌, 윌버 라이트 형제가 있었죠. 그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요. 자금도 없었고. 그들은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면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라이트 형제 팀 중 누구도 대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올빌, 윌버 둘 다 말이죠. 그리고 뉴욕 타임스지는 그들을 취재하지 않았죠. 다른 점은, 올빌, 윌버 이들은 이유, 목적, 신념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행 기계를 발명할 수 있다면, 세계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부유해지고 유명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결과를 추구했죠. 그는 부유함을 추구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꿈을 믿은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열과 성의를 다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랭리의 직원들은 단지 월급봉투를 위해 일했죠. 랭리가 잘못된 목적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증거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한 날, 그가 그만두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1963년 여름, 250,000명의 사람이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에 킹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초대장도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죠. 킹 목사만이 미국에서 유일하게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만이 미 인권운동 초기에 고통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변화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죠. 그리고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의 이유를 가지고 가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몇몇 사람들은 조직화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여기 250,000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날, 그 시간에 나왔죠,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말이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위해 나온 것일까요? 제로(0).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죠, “계획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아닌.
정치가들이 그들의 12가지의 포괄적 계획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감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리더와 이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더는 힘의 위치 혹은 권위를 쥐고 있죠. 하지만 우리를 이끄는 이들은 영감을 줍니다. 그들이 개인이건 혹은 단체이건 간에,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르죠. 우리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릅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왜”와 함께 시작하는 이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거나 영감을 주는 다른 이를 찾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이먼 시넥의 TED 강연, ‘위대한 지도자들은 어떻게 행동을 이끌어낼까’ 강연의 줄거리입니다. 사이먼 사이넥은 위대한 리더들이 사람들의 행동을 끌어내는 방법을 ‘골든 서클’로 설명한다. 이유(Why) ➡ 방법(How) ➡ 결과(What)입니다. 인간 뇌를 횡단면으로 자르면 골든서클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뇌의 겉에 있는 신경들은 행동을 지시 내리지는 못합니다. 느끼고 반응할 뿐이죠. 그러나 가운데 있는 신경은 행동하고, 말을 하라고 지시 내릴 수 있습니다.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그 가장 가운데 변연계라고 합니다. 거기서는 ‘믿음’이 형성됩니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왜의 순서로 산다면, 믿음이 심겨진 이들은 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의 순서로 삽니다. 육-혼-영의 순서로 사는 것이 아닌, 믿음의 사람들은 영-혼-육의 순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영 안에 당신의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심어진 이들은 평생을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증명할 꿈이 없다면 아직은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꿈의 성격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오늘 하느님 나라 둘째 비유에서 새들이 와서 쉬게 한다는 내용을 들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가진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와서 쉬게 하는 휴식 같은 친구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살아갑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그냥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에 순응합니다. 그는 자신이 유태인을 죽이는 데 엄청난 공을 세웠음에도 그저 시켜서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심판받은 이유는 ‘왜?’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에 휩쓸립니다. 그리고 결국엔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이웃에게 휴식과 에너지와 양식이 되어주라는 명령이 들어있음을 믿읍시다. 이 믿음은 방법을 찾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느님 나라가 심겨진 이들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찾는 이들이 와서 쉬게 됩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주위 사람에게도 그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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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후배 신부님 식탁에 멋진 그림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퍼즐을 맞춘 것입니다. 퍼즐은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퍼즐을 맞출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1000개의 퍼즐은 각자 서로의 짝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퍼즐이 조화를 이루려면 다른 점을 버리고, 같은 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4명의 신부님이 함께 했습니다. 서로 다른 4개의 퍼즐이 조화를 이루어서 은총이 가득한 순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4명의 사제는 각기 살아온 삶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퍼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퍼즐은 엉망이 되어서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퍼즐을 맞추지 못해서 헤어지는 부부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면만 보면 절대로 퍼즐은 맞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긍정적인을 찾아내면 퍼즐은 쉽게 맞출 수 있습니다. 화목한 부부는 문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서로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면만 찾으려면 얼굴을 보는 것도 고통입니다.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면 아침 인사가 즐거워집니다. 한 사람은 조직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책을 잘 찾아냅니다. 영어소통이 자유롭기 때문에 외부에서 오는 서류를 쉽게 이해합니다. 한 사람은 쾌활하기에 분위기를 밝게 합니다. 취재를 가서도 좋은 기사를 찾아냅니다. 한 사람은 차분하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을 쉽게 찾아냅니다. 서류정리도 늘 깔끔하게 해 놓습니다. 저는 일을 지시하기보다는 맡기는 편입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힘들어했습니다. 늘 지시를 받아서 일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알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회사 일로 크게 걱정하지 않고, 홀가분하게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 4년간 큰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정적인 면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서로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이번 순례의 여정 중에 신부님들의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한 신부님은 이번 순례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항공권 예약, 숙소 예약, 렌터카 예약을 모두 하였습니다. 매일 우리가 가야 할 순례 장소도 미리 정해 놓았습니다. 다만 정해진 약속 시간에 조금 늦게 나오는 편이지만 그 시간도 충분히 알기에 묵주기도하면서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간식과 의약품을 잘 챙겼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신부님께서 조용히 해결 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경건한 모습으로 순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을 보면 우리가 이곳에 왜 왔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이번 순례의 총무를 맡았습니다. 순례 중에 사용하는 모든 비용을 정산하였습니다. 모두가 피곤한 중에도 운전을 해 주었습니다. 버스로 이동할 때는 이동 방법도 찾아 주었습니다. 길 찾는 능력이 좋아서 잘 모르는 곳을 갈 때면 신부님을 따라갔습니다. 지난 4년 동안 같이 다니면서 저는 주로 정리와 청소를 하였습니다. 이번 순례에서 크게 할 일은 없었지만 조연으로 함께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순례 중에 겨자씨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작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하느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퍼즐을 사용해야 들어 잘 맞출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원망과 불평보다는 감사와 긍정의 마음을 지닐 때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위선과 교만보다는 겸손과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보다는 온유와 인내의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비록 멀고 험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맞추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2023년에는 감사와 긍정으로, 겸손과 봉사로, 온유와 인내로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잘 맞추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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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26-34: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길이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땅이 처음에는 싹을 트게 하고 줄기를 내고 그다음에는 이삭을, 또 그다음에는 이삭에 가득 달린 낟알을 낸다. 아직 약한 싹이지만 좋은 시작이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덕이 선행으로 발전할 때, 줄기에서 이삭이 패는 것이다. 덕에서 훌륭하고 완전한 행동이 나올 정도로 진보하면 마침내 이삭에 낟알이 가득 달리는 것이다. 그 낟알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절) 겨자씨는 아주 평범하고 하찮은 씨앗이다. 빻으면 그 힘을 드러낸다. 믿음도 처음에는 단순하지만, 역경으로 으깨어지면 그 힘을 발휘하여, 믿음에 관해 읽거나 듣는 사람들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운다. 하느님의 말씀은 분노의 쓸개즙을 가라앉히고, 교만의 불꽃을 억누른다.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났다.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분께서 상처 입지 않은 겨자씨였을 때,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분을 아직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즉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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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여기서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과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자연의 변화’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협력과 참여’입니다.>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나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6-9)
인간을 구원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혼자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당신과 함께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구원받는 일이니, 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니 내가 협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실 때의 일이 좋은 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1,43-44)
죽어서 무덤 속에 누워 있는 라자로를 깨운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살아난 라자로가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은 라자로 자신이 한 일입니다. 만일에 라자로가 그냥 무덤 속에 누워 있겠다고 고집 부렸다면? 예수님께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앞장서 가시면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으니 안 따라가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 그것은 무덤 속에 그냥 누워 있겠다고 고집 부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다면서 예수님을 안 따라가는 사람은, 자기가 안 따라가서 그 나라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협력자가 되는 것은 곧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나 자신이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받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를 대할 때, ‘작다.’ 라는 말과 ‘크다.’ 라는 말만 신경 쓰고, 그 말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해서 대단히 큰 결과를 얻는다.”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겨자씨의 ‘작음’이 아니라, 그 씨에 들어 있는 ‘생명력의 위대함’입니다. 씨가 작든지 크든지 간에, 그리고 나무가 크든지 작든지 간에, 겨자씨를 심어서 겨자나무가 나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놀라운 것은 씨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입니다. <모든 동식물, 그리고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생명력을 주시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처음 시작할 때의 모습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보인다고 해서 미리 실망하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생명력이 들어 있는 일이라면,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대단히 크고 거창하게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만심에 빠져도 안 됩니다. 자만심에 빠져서 하느님의 생명력을 잃으면,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은 일이 되어버리고, 그러면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간들은 그런 어리석은 짓들을 많이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인간들이 남긴 업적들은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들입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이 말은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가 최고의회에서 한 말입니다. <‘가말리엘’은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었습니다.(사도 22,3)>
아마도 그는 사도들의 선교활동에서 ‘하느님의 생명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을 박해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사도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은, 박해하지 말고, 선교활동의 자유를 주라는 뜻입니다.>
가말리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겨자씨의 비유’를 풀이했습니다. 사도들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일이었다면, 즉 하느님의 생명력이 없는 일이었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시는 하느님에게서 나온 일이었기 때문에, 즉 하느님의 생명력이 살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진 박해를 받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했어도, 계속 성장했고 발전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대로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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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던 가르침의 한 방식입니다. 오늘 첫째 비유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로 불립니다. 땅에 뿌린 씨는 저절로 자랍니다. 농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릅니다. 씨가 자라 수확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어들일 뿐입니다. 자연의 변화는 위대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하여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지만, 봄이 되면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을 보여 주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놀랍거나 화려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늘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당연하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 변화를 일상에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없던 싹이 나고 잎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만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싹이 자라는 과정을 하느님 나라에 비기십니다. 놀라운 변화이고 생명의 성장이지만, 우리는 농부처럼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매 순간에 현존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그렇게 우리 안에서 “저절로”, 곧 하느님의 섭리로 충만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여느 때보다 우리를 포함한 창조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의 집’인 우리 삶의 터전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돌려 주위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며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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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유난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저에게 있어서 세명의 조카들은 저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욱 저의 조카들에게 부채감이 있는데, 오랜시간 해외에서 유학기간을 거친 덕에 아이들이 자라는 순간순간을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조카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성장하는데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하지만 자세한 면모를 생각해 보면 아이의 교육과 정신적 성장에 있어서 그러할 뿐 육체적인 성장에 있어서는 많은 것을 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때마다 밥을 차려주고 뛰어노는 것은 아이의 육체적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크고 육체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어떠한 면에서 보면 온전히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찌 되는지 모른다”라는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합니다.
사실 씨앗을 심고 농사의 결실을 거두기까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적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고 씨를 뿌리고 나서 물을 주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역할일 뿐 씨앗이 자라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씨앗이 싹트고 그 싹이 자라서 줄기가 나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의 원초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씨앗이 열매 맺기까지, 한 생명을 성장시켜 결실에 이르게까지 하는 능력은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한 일에 개입하고자 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욕심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식물에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 주는 것처럼 기본적인 노력은 인간에게 맡겨져 있지만 사실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의 은총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에 인간이 개입하고자 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헛된 욕망이 될 뿐이고 오히려 원망만 갖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느님의 은총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스스로가 좋은 땅, 좋은 양분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 자신 안에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가꾸되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우리는 비로소 그 안에 머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 등장하는 겨자씨는 실제로 보면, 우리 손톱의 30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땅에서 잘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면 어떤 풀보다 크고 높게 자라게 됩니다. 이 모습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미소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많은 것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이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개입하고 알고자 하면 그것은 온전히 인간의 욕심이 되고 조바심만 생길 뿐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기대하되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는 창조주의 역할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비록 몸소 느껴지지는 않을지라도 하루하루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어느덧 제 모습을 갖춰나가는 아이들을 보듯 나에게 잘 맞춰져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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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주님의 발자국>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모른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때 하늘 저편에는 그 사람이 이제까지 걸어온 삶이 영화처럼 비추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 장면이 지날 때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의 발자국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하느님은 그 사람 옆에서 항상 함께 걸어오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때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 때는 정말 살아가기가 힘들고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힘들거나 어려울 때마다 발자국은 한 줄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따지듯이 여쭈어 보았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항상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작 제가 힘들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왜 주님의 발자국은 보이지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그대가 어려울 때마다 그대를 업고 갔다네. 한 줄뿐인 발자국은 그대 것이 아니고 나의 발자국이라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삶의 어려운 시기에 더욱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 혼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금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고 하루하루 지나면 씨앗에서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낟알이 맺히게 됩니다. 하지만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농사를 짓는 농부는 늘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기도합니다.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한 후에는 반드시 조상들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더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삶은 은총으로 충만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시며 우리 삶의 여정 어디에나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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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스스로 씨앗이 되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나머지 두 개의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절)와 ’겨자씨의 비유’(30-32절)를 한꺼번에 들려준다. 각 비유의 시작(26절, 30절)에서 직접 언급되었듯이 비유의 주제는 하느님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낟알을 맺는 이삭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어느 씨앗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땅에 심겨지면 새들이 둥지를 틀고 그 그늘에 쉴 수 있을 만큼 큰 푸성귀(나무; 마태 13,32)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비유의 특징은 시작과 끝의 대조, 작고 하찮은 것에서 시작하여 놀랍고 엄청난 결과로 끝맺는 대조(對照)에 있다. 오늘 두 가지 비유를 첫 번째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이해는 더 빨라진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아주 열악한 환경, 즉 길바닥이나,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을 제외하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 토양의 조건에 따라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따라서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경우에 한하여 세 가지 비유를 모두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세 가지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씨앗(seed)’과 ’성장(growth)’과 ’열매(fruit)’이다. 이 셋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요소들로서 씨앗은 시작을, 성장은 과정을, 열매는 마지막 결과를 뜻한다.
시작은 어떤 경우에든 작고 미약하다. 마지막 결과인 열매는 놀랍고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해당되는 성장은 사람의 머리로는 잘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덮여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작고 미약한 복음의 씨앗을 시작으로 누구도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성장과정을 거쳐 진정한 하느님나라로 완성된다.
이 완성은 곧 ’낫이 사용되는 추수의 때’로서 종말을 의미한다. 하느님나라의 완성은 조그만 씨앗이 놀라운 열매를 내듯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무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없다.
농부라면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농부에게조차도 성장의 신비는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놀라운 성장의 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려는 자는 스스로 씨앗이 되어 땅에 묻혀야 한다.
오늘 두 가지 비유의 청중은 누구인가? 앞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청중은 호숫가에 모여든 모든 군중이었고, ’등불의 비유’와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는 12제자와 다른 특별한 제자들에게 한정된
비유설교의 마지막 부분(33-34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 복음의 두 가지 비유는 다시금 전체 군중을 향한 말씀이다. 예ㅂ수께서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여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고 한다.
웬 차별인가? 예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9절, 23절)고 하시면서 왜 군중과 제자들을 차별하시는 것일까? 제자들이 두 귀 말고도 다른 ’들을 귀’를 달고라도 있는 것일까? 군중과 제자들을 따로 차별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에 속한다. 즉 예수님 마음이다. 그러나 군중에게도 여전히 ’들을 귀’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반면 제자들에게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들을 귀’를 단계적으로 시험받아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따라서 누구에나 하느님나라의 복음은 열려 있고, 복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복음은 처음에는 씨앗과 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씨앗이시듯이 제자들도 씨앗이 되어야함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스스로 씨앗이 되는 자만이 하느님나라의 성장신비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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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줌>
마르코 4,26-34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한줌>
한줌 믿음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목숨 바칠
굳건한 믿음
담고 있으니까요
한줌 희망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꺼지지 않을
불타는 희망
담고 있으니까요
한줌 사랑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아낌없이 내어줄
뜨거운 사랑
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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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 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그제서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 = 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겨자씨의 비유’는‘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끝은 성대하리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농부가 가을에 수확을 위해 봄에 씨를 뿌리고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듯이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꿀 때 비로소 건설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요한3,27) 그리고 보상을 바랄 수 없습니다.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11,35-36) 우리의 모든 활동에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처럼 작은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고 봉사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질서이고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유광수) 우리도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느님 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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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갑곶성지에 있을 때,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미사에 참석한 아이에 대한 기억이 남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다른 아이와 달리 이 아이는 똑바로 앉아서 제 강론을 너무나 열심히 경청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아이를 보니 저 역시 신이 나서 강론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른들은 전혀 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크게 웃으며 제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줬습니다. 미사 후에 아이에게 “신부님 강론 잘 들어줘서 고마워.”라면서 막대사탕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생전 처음으로 사탕을 받아 본 아이처럼 좋아하며, “아싸~”를 외칩니다. 이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탕 하나 더 주게 되더군요.
어린아이는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탄사를 자주 외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웬만한 일에는 감탄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뇌의 기능 탓이라고 하더군요. 뇌의 대뇌피질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만 활성화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매 순간이 새로운 정보이니 대뇌피질이 활성화되어 감탄사를 외치지만, 어른은 새로운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감탄사가 없는 것입니다. 뇌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탄하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감탄 없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감탄이 없는 삶은 너무 힘듭니다. 뇌가 활성화되지 못해서 삭막한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세상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사랑 실천, 봉사활동, 그 밖에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을 감탄사 넣어가며 열심히 실천하면 신나는 삶이 됩니다. 감탄하는 삶이 훨씬 재미있고 기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얻는 것도 더 많아집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들면서, 농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또 어떻게 자라는지 몰라도 수확할 때까지 저절로 자라는 씨앗처럼,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당연한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곁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충분히 감탄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탄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함에 주님께 불평불만을 계속해서 늘어놓고 있습니다.
나의 감탄사를 찾는 데 집중했으면 합니다. 이 감탄사를 들으신 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당신의 크신 섭리를 깨달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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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떤 사람>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다음 구절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그런데 너무 지나친 해석이 아닌지 모르지만 이 말씀이 제게는 주님의 고심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를 알아들을 수 있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하시는.
사실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인 우리가 저세상, 곧 하느님 나라를 알아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그 설명을 설사 잘 알아들었다 해도 우리의 관심은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열심히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신 주님께서 돌아가실 무렵에는 하느님 나라를 아들의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는데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초대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아무튼, 주님은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애쓰시는데 오늘은 하느님 나라를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와 같다고도 하시고, 우리가 뿌리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저절로 자라 열매 맺는 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그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곧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씨를 뿌렸는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인 줄 모르기 십상이고,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더더욱 모르기 십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 실천이, 우리는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 씨앗일 수 있고, 그 작은 사랑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큰 사랑이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씨앗을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씨앗 박사가 아니라면 씨앗만 보고 어떤 씨앗인지 모르고, 그 씨앗에서 어떠한 열매와 꽃이 열릴지 우리는 모릅니다.
씨앗이란 이토록 작고 알 수 없지만, 여러 가능성이고 무한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더 여러 가능성이고 무한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하느님께서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씨앗이 본래 참 신기한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더 신비롭습니다.
저는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밥상>을 하고,
또 콩나물국밥을 하면서 이런 신기함이랄까 신비함의 체험을 많이 합니다.
콩나물을 키우는 것도 참 신기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고 시작한 사업이 점차 이런저런 사업으로 발전하여, 지난해에는 이주민과 취약 계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이 26명에게 매월 10만 원씩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이 되고, 또 국밥집에선 쌀이 떨어지면 누가 때맞춰 쌀을 보내줍니다.
어제도 이제 쌀이 떨어지고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쌀 20kg을 보내오셨습니다. 며칠 전 제가 그런 기적 체험 얘기하는 것을 듣고, 당신도 동참하는 차원에서 보내신 것인데 그것이 때를 잘 맞춘 거였지요.
이 어떤 분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고, 모르고 하는 우리 행위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될 가능성도 있음을 성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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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신비가>
-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 -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 37,5-6)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신비가가 됩시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비상한, 특별한 신비가가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신비가입니다. 이래야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어떻게? 시종일관, 한결같이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을 훈련하여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면 언젠가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면 내일도, 또 죽어서도 못삽니다.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사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입니다. 저절로 “아, 놀랍다, 새롭다, 좋다” 탄성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시인이, 사랑의 시인이, 사랑의 신비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신비가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일상의 하찮은 사실에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찮은 일상의 비유로는 겨자씨의 비유도 대동소이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숨겨진 것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요란하거나 시끄러움 없이, 말없이 침묵중에 묵묵히 일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일에 잘 협력해 드리는 일입니다. 침묵중에 겸손히 바라보고 지켜보고 경청하는 관상가로 사는 것입니다.
불필요하게 건드리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이건 비단 일상의 자세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리석게도 유혹에 빠져 긁어 부스럼 만든다든가 녹을 지우려 그릇을 깬다든가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니 말그대로 지혜롭고 겸손한 삶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나서지 말고 필요하다 생각될 때 조용히 뒤따라가며 가꾸고 돌보며 협력해 드리는 일입니다.
사랑의 침묵, 사랑의 경청입니다. 침묵과 경청에 이어 존경과 사랑입니다. 프란치스고 현재의 교황님께서 고 베네딕도 전임 교황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는지, 감동적인 인터뷰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이런 존경과 사랑의 자세가 하느님 나라의 삶에 필수입니다.
-교황은 베네딕도 16세를 “신사(a gentleman)”로 표현하셨으며,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I lost a father)”고 말씀하셨다. 내게 있어 그분은 ‘하나의 보장’(a security)’이었다. 내가 의문에 직면했을 때, 나는 지체없이 차를 불러 그분 계신 수도원에 가서 여쭤보곤 했다.-
얼마나 솔직하고 겸손한 자세인지요! 전임 교황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두분간의 영적우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이런 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존경과 사랑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의식적, 필수적 영성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이런 전임 교황님과의 아름다웠던 영적우정의 추억은 하느님 나라를 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어 두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가르치는 바 인내와 믿음입니다. 한없는 기다림의 인내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기다림의 인내와 믿음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봄꽃들 폈다하여 먹음직스러운 배열매가 아니라 가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막연한 인내가 아니라 참으로 이런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신망애 없이는 한없는 기다림의 인내는 불가능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지체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바로 인내와 믿음을 강조하는 히브리서 저자는 이어지는 11장에서 믿음에 대해 길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인내와 믿음의 경우 제가 드리고 싶은 답은 단 하나, “하루하루살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정주의 삶을 살다보니 요셉수도원에 정주한지 만35년입니다.
밖에서 볼 때 수도원은 평화로운 천국같지만 안에서 보면 하루하루가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마침내 선종의 선물같은 죽음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하루하루 사시기에 다음같은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은총의 시간이자 새로운 기회다. 그러니 매일 기쁘게 살아야 한다. 기쁨을 결缺하고 있을 때, 복음은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기쁜소식, 복음은 그의 본성상 ‘기쁨의 선포’(a proclamation of joy)’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 비유의 궁극의 가르침입니다.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의 자세로 시종일관,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하며 주님께 협조하는 것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나한테 달린 듯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기도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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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마르4,26)
<하느님 나라의 신비!>
오늘 복음(마르4,26-34)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 미약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큰 결과를 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천국)'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나라로써,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들어가기를 바라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 뜻과 인간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나라이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죽음 저 너머의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영원한)에 들어가는 것이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희망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구약성경 모세 오경을 필사하면서 깊이 마음에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과 사건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가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씀하셨고, 오늘 독서(히브 10,32-39)도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10,36)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끝까지 인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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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DuD0Wafd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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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마르 4, 27)
하느님의 나라는
겸손의 나라입니다.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자라나고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이치와
순리 안에서
반성과
부끄러움을
만납니다.
삶의 관점과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듯
사람과
하느님의
나라 또한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라나고
있는 그대로
있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자연이 변해 가는
아름다움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고
사는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어우러지고
이어지는
씨앗과 열매의
기쁜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성장과
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순리입니다.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삶의 전환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자녀들의
겸손한 삶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맑은
사랑임을 믿고
의지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한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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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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