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지혜서 7,22ㄴ-8,1 루카 17,20-25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의 대목은 지혜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 읽다 보면 지혜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헤어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이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거룩, 청절, 자유, 평온, 섬세, 통찰, 광채... 지혜를 가리키려 골라낸
단어들이 얼마나 영롱하고 찬란한지, 가히 '지혜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듯하지요.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지혜 7,26)
우리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지혜이십니다.
구약에서 성경 저자들이 의인화한 지혜가 바로 육신을 취해 세상에 내려 오신 예수님이시지요.
지혜이신 예수님께서는 빛이신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광채이시고,
언제나 일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일하시며, 선하신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십니다.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지혜서 7,27-28)
지혜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지혜를 만나 마음에 품은 이는 하느님의 벗이 되어
그분과 마음을 나누며, 그분의 목소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의 앞길이 꽃길만은 아닌 게 분명한데도, 지혜 문학 저자들은 내내
지혜를 얻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무사, 무탈, 쾌락, 풍요의 세상 가치와 지혜는 방향을 달리하니까요.
그래서 지혜서 저자는 지혜를 소유하는 일의 고귀함을 전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신다고 다소 도전적으로 말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지 않고,
사랑받는 조건을 아주 명백하고 정확하게 한정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
복음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촉발된 하느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바리사이들이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동안 보여 준 그들의
태도로 보아 질문의 의도가 그리 단순하고 순수하게 들리지는 않지요.
하느님 나라를 물리적인 실체로 여긴다면 이미 세상 한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놓치기
쉽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비록 거창하거나
요란하지 않아도 세상을 진리와 선으로 지탱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5)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사람의 아들은 세상에서 고난과 배척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과 교회가 고난받고 배척받는 이, 소외되고 죽어가는 이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겸허히 옷깃을 여미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의 질서와 발걸음을 함께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볼 수 있는 힘이 곧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와 함께 사는 이를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복음 환호송)
포도나무와 가지의 표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지혜와 우리의 관계도 다르지 않지요.
지혜를 찾아 얻고 지혜에 머무르는 이는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된 바로 그 지혜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로 세상이, 교회가 양분을 얻어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전히 미완성의 불완전한 세상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청하며, 그 지혜를 꼭 붙잡고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지혜를 찾아 매일매일 말씀의 샘물가로 모여드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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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훈 토마스 신부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지혜서 7,22ㄴ-8,1 루카 17,20-25
불교에서 선승들이 주고받는 문답을 ‘선문답’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깨친 스승에게 제자가 질문을
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 대화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두 사람 각자의 혼잣말 같기도 합니다.
질문을 통하여 진리를 깨치지 못한 이를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선문답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시기를 여쭈어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기가 아니라 그 “모습”에 대하여 답을 하십니다.
“여기”, “저기”, “우리 가운데”라고 공간을 이야기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하여 설명하시며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 안에서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면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데, 과연 어디에 있는가?’
혼자서는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들을 되뇌어 봅니다.
그리고 고민해 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는 누구를 말하고 있을까요?
나는 어떤 사람들을 ‘우리’라고 말하고 있나요?
너무 쉽게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하느님, 우리 성당, 우리 공동체, 우리 가족, 우리 부모님, 우리 친구 …….
‘나’를 포함한 ‘우리’이기는 하지만, ‘나’라는 말을 대신하여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요? 어째서 일까요?
어쩌면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때가 아닐까요! 나만을 생각하던 그 삶의 공간이 ‘우리’를 먼저 생각하여
행동하는 공간으로 바뀔 때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닐까요!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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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지혜서 7,22ㄴ-8,1 루카 17,20-25
어디에 계시지 않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와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어디를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하느님을 찾아 헤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만나는데 어디를 고집하거나 집착치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곳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가 모셔져있고 더 나아가 현시가 되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되고 성지 같은 곳을 가는 것도 하느님 만남에 도움이 되지요.
그러나 사람마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곳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만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남에 있어서 그 사람만의 고유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저의 경우 보통은 같은 성당이라도 창을 통해 하늘이나 나무를 볼 수 있는 창가자리가
그냥 어둠침침한 성당 자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아무 것도 안 보이고 감실의 등만 보이는 어두컴컴한 경당의 구석진 자리가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와 관련하여 신적인 보편성과 인간의 독특성을
다 인정해야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진정 보편적이십니다.
천주교에만 계시지 않고 성당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힌두교 신전에도 계시고 법당과
이슬람 성전에도 계십니다. 우리나라 남한에도 계시고 북한에도 계시고 중국에도 계십니다.
성당에도 계시고 시장이나 술집에도 계시고, 조용한 곳에도 계시고 시끄러운 곳에도 계시며,
심지어 무신론자들의 집회나 살인 현장에도 계십니다.
시장에도 계시지만 돈벌이에 눈이 멀면 하느님을 못보고,
시끄러운 곳에도 계시지만 소음에 신경이 곤두 선 사람은 못보고,
무신론자들의 집회와 살인 현장에도 계시지만 그들이 못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경우 특별한 곳을 찾아갈 필요도 있지만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만
특별한 곳을 찾아야지 일상적으로는 내가 지금 있는 그곳, 곧 <지금, 여기>에서 만나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야 하는데 무엇보다 우리들 가운데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우선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는 만나지 못하고 사람을 피해 골방이나 성당에서,
또는 사람들을 피해 자연 가운데서나 하느님을 만나려 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냐 한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 같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영적 지도자와의 만남에서만 하느님을 만난다면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 가운데 계시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이 계신다는 얘기이군요.
그러니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사람과 사랑 밖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들지도 말고 헤매지도 말 것입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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