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지혜서 18,14-16; 19,6-9 루카 18,1-8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장례미사를 준비하면서 고인의 관을 닫으려 했습니다. 고인을 위한 미사에 집중하기기 위해서
그렇게 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족 중에 한명이 반대했습니다.
마지막 미사이고, 곧 땅에 묻히니 관을 닫지 말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의 바람을 듣고, 관을 열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도 미사에 참례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미사에 집중하려는 원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족이 원하면
미사에 집중이 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다른 종교의 장례 예절을 잠시 해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 또한 유족이 원한다면 반대할 것도 없다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인과 유족들의 청을 무시하시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모두 털어버리고,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영성을 강의하는 김길수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글의 제목은 ‘성삼문의 죽음과 김대건의 죽음’입니다.
성삼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중에 한 명입니다.
성삼문이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형장에서 그가 지었다는 절명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절명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黃天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둥둥둥 북소리 울려 내 목숨을 재촉한다.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 하누나.
저승길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내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에게 인생의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충절을 드러내는 죽음이었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에 앞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들으라. 이 환란과 고난도 주의 허락 없이는 있지 않으니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서라도 삼가는 마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켜라.”
주교님께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교님, 우리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 일찍이 어린 자식을 이국만리에 보내고, 믿음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의지할 곳 없어 거리를 헤매는 거지가 되었다고 하나이다.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드리고 저는 편안히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나는 간다. 이제 환란도 고통도 박해도 없는 하느님의 기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성삼문과 김대건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허무’고 하나는 ‘새 출발’입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을 위해서 죽지만 그 소신이 준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인 허무입니다. 김대건의 죽음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새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8,1-8)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을 상실하면 화가 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잠시 소유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이웃, 물건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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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지혜서 18,14-16; 19,6-9 루카 18,1-8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전사처럼 땅 가운데로
뛰어내시어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채우신 사실을 전합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이 본성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보호를 받게 된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이집트 군대에게 추격을 받을 때
어떻게 당신 백성을 이끌어 주신 기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지혜 19,7)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풀 뜯는 말들처럼, 어린양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온 민족이 홍해를 건넜고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놀라운 일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청원이며 그분과의 친교의 통로임을 알고 있습니다.
스승이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오만한 판관과 공정한 재판을 청하는 한 과부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을에 자신의 적대자와 시비가 붙었는데,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졸랐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가 그 재판관이 말에서 나타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 18.4-5)
예수님의 말씀의 논리는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우습게 보는
그 재판관도 그 과부가 와서 계속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재판을 열어 판결해 내려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못된 재판관도 계속 청하며 소원을 들어주신데 ‘하물며 인자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야 사람의 청을 오즉 잘 들어주시겠느냐?’라는 뜻을 이끌어 내어
제자들이 알아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의도를 가지고 하시는 주님 말씀을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신앙인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잘 알지만 세상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주님께서 수난 전 날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4)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고 살아가다보면 실망스런 일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리 떼 가운데 양’을 보내시는 심정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악에서 그들을 지키시기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도 스승이신 주님께서 아버지께 간구하신 것처럼 끊임없이 청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일치하며
세상의 여러 어려움에서도 올곧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변함없이 청하라고 당부하시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되며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18,8)라고
우려의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간직하며
주님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성실하게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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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철호 요한 신부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지혜서 18,14-16; 19,6-9 루카 18,1-8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행하신 업적을 노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이 육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줄곧 졸라대며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은 채 미적거리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 제자들에게 낙담하지 말고 계속 간청하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부가 청한 것은 다름 아닌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판결이란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뜻합니다.
재판관이 불의한 자, 곧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였지만,
과부는 그에게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올바른 판단,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이 내리는
판결을 내려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늘 올바른 것을 간청하였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한 것은 아닌지,
나에게 득이 될 것이라 여기지만 결국 나와 공동체에게 해가 될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나는 모두를 위하여 유익이 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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