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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孝在마리아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33주일
잠언 31,10-13.19-20.30-31 1테살로니카 5,1-6 마태오 25,14-30
작지만 비범한 영성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태오 25,21)
한강 변 들판은 하루가 다르게 색이 바래고 성기어만 갑니다. 그러나 작은 풀꽃들은 강한
생명력을 보입니다. 토끼풀과 민들레입니다. 땅바닥에 깔린 토끼풀들은 서로 힘을 보태
더욱 푸르게 작은 숲(군집)을 이룹니다. 민들레는 봄철보다 더욱 낮게 땅바닥에 깔려 꽃을 피우고
순식간에 장대처럼 쑥 키를 키워 그 위에 둥근 모형의 씨 뭉치를 올려놓습니다.
마치 지구를 들어 올린 형국입니다. 작은 풀꽃의 힘찬 모습입니다.
1. 작은 것의 영성
얼마 전, 요셉의원에 미사를 하러 갔습니다. 선우 요셉 선생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노숙인 같은 가난한 이들을 진료하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셨습니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자녀가 많았으니 바로 옹골진 구석이 없는 노숙인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영성은 작년에 시성(諡聖) 되신 샤를르 드 푸코 성인의 작은 이의 영성입니다.
푸코 성인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나자렛의 가장 작은 자로 남길 원하셨습니다.
푸코 성인이 사하라 사막에서 가난한 무슬림들의 형제로 사셨다면, 선생은 도시의 광야에서
노숙인들과 같은 작은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앞선 두 종에 대해 주인이 칭찬하는 말마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습니다.
“작은 일에 성실했기에 많은 일을 맡기고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라는 겁니다.”
작은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됨됨이도 운명도 결정됩니다.
무릇 작은 것에서 큰 것이 나옵니다. 독일 경제학자 E. F 슈마허는 자신의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인간이 보이는 경제를 얘기하며 거대해진 현대사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경제 논리에서 작은 것을 예찬하다니 선견지명이 놀랍습니다.
우리 신앙의 세계에선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사랑의 마음으로
감자를 깎는 것이 웅장한 성전을 짓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린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왕궁이 아니라 마구간에 태어나셨고 구유에 포대기로 싸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세상 모든 이의 구세주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2. 용기 있게 삶을 던져야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
빈익빈 부익부를 옹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얘야! 넉넉해지고 빼앗기는 것이 어디 돈(탈렌트)뿐이겠느냐? 용기가 있느냐?
넌 용기 대신 핑곗거릴 찾았구나. 너는 나의 사랑을 왜곡했다. 믿음으로 삶을 던질 용기가 없다면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만다. 나를 모진 사람으로 여겼다면 그리 대접받을 수밖에 없구나.
작지만 힘을 보태는 토끼풀들을 보아라. 성실하게 꽃을 피우는 민들레는 대롱 끝에 지구별을
달고 있지 않으냐. 난 작은 겨자씨 안에 하늘나라를 숨겨두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이라며 우리야말로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임을
말합니다.(1코린 3, 21-23 참조)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 자신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성실하게 인생길을 펴는 하느님의 종을 소개합니다.
성실은 용기와도 통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의 날이 아닙니다.
교종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스라엘 쪽에 사시는 푸코 신부님의 영성을 따르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님에게서
들은 얘기입니다. 가난한 이슬람 형제를 돕는 것을 4번째 서원이라 할 정도로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작고 소박한 지향이지만 비범합니다. 이 시대, 전염병처럼 번지는 증오와 참혹한 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와 다른 종교, 문화, 민족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편적 형제애’는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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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베드로 신부
연중 제33주일
잠언 31,10-13.19-20.30-31 1테살로니카 5,1-6 마태오 25,14-30
구약성경의 토빗은 자선을 베풀다가, 임금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잔칫상을 뒤로 미루기까지
하면서 길거리에서 죽어간 이를 장례 치러주고 돌아와 쉬다가, 참새의 분비물을 맞아 눈을 잃고
맙니다(토빗 2,1-10 참조).
‘선행을 하는데 벌이 따르다니 이 무슨 운명의 아이러니인가!’ 이민족 사이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용기와 내면의 힘을 토빗은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성경에서 흔히 가르치듯이,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 시련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우리를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 토빗은 자신의 가난을 발견하고는 가난한 다른 이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고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을 직접 느꼈기에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만날 때마다 우리가 얼굴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빤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고 부름받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특히 섬세하게 헤아리지 않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풍족한 생활양식을 택하라는 압박이 커져 가는 반면, 가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당하곤 합니다. 우리는 불쾌하거나 고통을 초래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반면,
신체적 특질을 삶의 우선 목표인 양 찬양합니다.
가상 현실이 실제 삶의 자리를 차지하고 점점 더 쉽게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가난한 이들은 찰나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지만, 우리는 살과 피를 지닌 그들을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성가셔하며 외면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 참조)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저마다에게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위탁하기는 쉽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선을 베풀도록 성금을 내는 것도 관대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많은 사람이 가난한 이들과 배척받는 이들을 돌보는 데에 헌신합니다.
모든 연령대와 각계각층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도우려고 합니다.
그들은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이웃집 사람’, 곧 스스로 묵묵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저 무엇을 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청하고, 관계를 맺으며,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원인을 이해하고 대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필요는 물론 영적인 필요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개개인의 온전한 발전을 위하여 힘씁니다.
반포 60주년을 기념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 성하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의 다음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 육신 전체, 생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양식, 의복, 주거, 숙식 등에 관한 권리가 있으며
의사들의 치료와 그 외 정당한 사회적 봉사 등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인간은 병고, 노동력의 결여, 과부 신분, 노환, 실업 등에 처했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존 방법을 상실하는 경우에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11항)
말씀이 실현되려면, 특히 정치 지도자들과 입법자들의 진지하고 효과적인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모든 것을 ‘위로부터’ 받으려고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변화와 책임의 과정에 참여하고
동행해야 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전쟁의 상황에 휘말린 사람들, 특히 평온한 현재와 품위 있는 미래를 빼앗긴 어린이들을 생각합니다.
또한 투기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많은 가정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극적인 물가 급등을
일으켜 왔습니다. 수입은 빠르게 바닥나고 모든 이의 존엄성을 위태롭게 하는 희생이 강요됩니다.
그렇다면 현재 노동계 안에서 빚어지는 윤리적 혼란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노동자에게 가하는 비인간적 대우, 노동에 대한 부적합한 대가, 고용 불안이라는 참상, 그리고 때로는 안전한 일터보다 즉각적 이익을 선택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과도한 재해 관련 사망자 수 등이
그렇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강조하신 말씀을 떠올립니다.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
아무리 인간이 일할 운명을 타고났고 소명을 받았다 하여도 우선적으로 노동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동하는 인간’, 6항).
그 자체로 심각한 괴로움인 이러한 형태의 가난들은 이제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빈곤의 실태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저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점점 더 두드러지는 가난의 형태를 바라봅니다.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낙오된 패배자’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문화는 얼마나 많은 좌절과
얼마나 많은 자살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토빗기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현실적이고 실질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끼는 데 요구되는 화합을 촉진하려면 우리가 서로를 찾아내고
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그저 재빨리 내미는 도움의 손길 이상입니다.
이는 가난이 훼손한 올바른 상호 인격적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자비와 애덕의 유익을 누리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복음의 현실주의로 특징지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나눔은 단지 남아도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의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도 또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식별이 요구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희망과 열망이 아닌 우리 형제자매의 진정한 필요를 인식하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우리의 인류애, 사랑에 열려 있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우리의 집인 이 세상에서는 모든 이가 애덕의 빛을 경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빛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데레사 성녀의 굳건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이며 신적인 면모에 언제나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주기를 빕니다.
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
2023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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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연중 제33주일
잠언 31,10-13.19-20.30-31 1테살로니카 5,1-6 마태오 25,14-30
하느님 앞에 우리의 탈렌트를 내어놓읍시다.
누구나 탈렌트가 있습니다.
신부의 외모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잘생기면 사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보좌신부 시절에 어떤 본당으로 인사이동을 했더니,
그 본당 청년들과 학생들이 엄청 많았답니다. 그래서 ‘이 본당은 학생들이 참 많은 본당이구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임 보좌신부님이 굉장히 잘생긴 분이셔서
성당에 나오는 학생 수가 많아졌답니다.
비신자 학생들까지 신부님을 보러 성당에 나올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에게 그 신부님의 이야기는 다른 신부님의 이야기보다
더 잘 들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외모 덕을 좀 봤을까요? 아마 예상하시겠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을 때
안드레아가 하는 말이 저에게도 해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었죠. 예수님은 그 보잘것없는 양식을 가지고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마찬가지로 제 외모도 매력적이거나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쓰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냐면 시골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시골틱하다, 불쌍하다’고들 하는데요.
그 느낌이 도시에서는 별로 쓸 데가 없지만, 시골 본당에서는 아주 유용했습니다.
공소를 짓기 위해 모금하러 다니면서 외모가 쓰임이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예전에 신학생 때 여러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불쌍한 신학생’이라는 별명을 교수 신부님이
지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수업에 들어오시면 종종 저를 찾곤 하셨는데,
그 신부님이 동기들에게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기현이한테 잘해. 나중에 기현이가 본당 나가면 신자들이 불쌍하게 생겼다고
선물 많이 해 줄 텐데, 그거 하나라도 나눠 받으려면 미리 잘하라고.
또 만약에 본당에 모금할 일이 생기면 기현이 얼굴만 보여줘 그럼 헌금이 쏟아질 테니.”
일부러 그러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제 외모가 도움을 바라는 느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덕에 -물론 신자들도 함께 노력해서이지만- 공소를 빚 없이 잘 지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것들로 더 큰 일을 하십니다. 내 탈렌트를 묻어두기보다,
무엇이든지 간에 그분 앞에 내어놓고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중국에 있을 때 한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한다. 나이가 많다. 외국어가 어렵다는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에 한 단어, 한 문장씩만 공부했어도 많이 나아졌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저도 1년 동안 말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거의 매일
‘하고 싶은 말’을 작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문하고 선생님께 수정받고, 녹음해 달라고 해서 듣고,
실전에서 써 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할 줄 아는 말이 조금 있습니다.
그리고 1~2년 지나면서 할 수 있는 말이 조금 더 늘었습니다.
물론 듣고 작문하는 수준이 높지도 않고 발음도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의 범위가
해가 지날수록 조금씩 늘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열매가 혼자 다른 지역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방문하고, 현지 성당에서 강론하고 미사 봉헌하는 일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작할 수 있다면
그 너머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 맺는 일들을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입니다
학부 3학년으로 복학하기 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온 이후, 외국어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겼는데, 마침 본당에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신부님이
보좌신부님으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영어 공부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아침식사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7시에 사제관에 갔습니다. 주로 제가 적어 온 영어 일기를 말하고
신부님이 고쳐 주시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어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영작하는 것이나 읽는 연습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그때는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할 때였습니다.
몇 주는 신부님과의 아침 영어 공부가 잘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한두 주 날짜가 지날수록
한두 번 빠지기 시작했고, 한 달이 넘어갔을 때는 한 주간을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겨우겨우 아침에 나갔는데, 그날도 신부님은 밖에 있는 신문을 가지러 나와 계셨습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거나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끈기를 가지고 성실하게 하는 모습이에요.”
신부님의 그 말씀이 아직도 마음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의식 중에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성실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입니다.
인천교구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가톨릭신문 2023년 11월 19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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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孝在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