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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본문 내용
가장 공평한 평등을 위한 지리적 관점의 고찰
From a geographical perspective, how to create a society that
can realize the most equitable equality
- Utopia는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ou topos)이기에
<낯선 철학하기> -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 과제
살기 좋은 유토피아의 세상은 어떤 형태일까. 낙원과도 같은 유토피아가 가능한 것인가. 유토피아라는 어원 자체는 자본주의 초창기에 인간을 착취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은 가난한,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토머스 모어의 소설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유재산이 없어 풍족한 재화를 중앙 광장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쓸 수 있고, 성인 누구나 6시간의 노동(심지어 ‘교수’와 같은 지식인은 그 노동도 연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의)과 8시간의 수면만 준수한다면 나머지는 여가로 보낼 수 있는, 공산주의의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의 정치 체제 아래에서 그야말로 자유가 완벽히 갖춰진 가상의 이상국인 것이다. 모어의 영향을 받고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공산사회의 불가피성을 입증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utopia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를 뜻하는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를 합성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는 '사유재산이 없는 이상적인 공산사회'로 묘사되고 있으나, 현대에 와서는 아예 '이상향'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본뜻을 이용하여,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고 비꼬는 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에서의 모습과 같은 완벽하게 완전한 정의와 평등이 존재할 것인가?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제도 하나를 바꾸는 데에도 많은 논의를 가장한 갈등이 발생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향할 수 있을까?
변화의 동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찾은 동기들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까? 애초에 유토피아는 완벽하게 완전한 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인가? 완벽한 평등이 보장되는 익숙하고도 보편적인 정의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와 재물을 정확히 1/n 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으로 나누는 평등사회를 만들어낸다면, 비로소 평등사회가 실현될까?
아마 그 평등은 몇 초도 되지 않아 깨질 것이다. 빵을 자신이 원하는 양보다 더 가진 자는, 보석을 더 가진 자와 그 빵을 교환할 것이고, 이런 식으로 단 몇 초 동안에도 순식간에 서로가 가진 재물의 양이 바뀌며 불평등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완전평등’하다는 것은, 설령 초인적인 힘으로 만들어내더라도 금방 깨질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가장 정의로운 불평등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정의에 대한 보편적 기준을 밝히고자 한 롤스의 저서 <정의론>의 시작이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본다는 과제를 받고 나서, 평소 당연하게 지나쳤던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력 속에서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정작 익숙하다는 감각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버리며 내가 무엇을 노력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런 혼란 속에서 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모두가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고찰이었던 것 같다. 과연 모두에게 정의로운 사회란 가능할까? 우리는 일상 곳곳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결국 타인의 세계를 오직 ‘자기만의 1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는 한, 그 정의는 언제나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랬다. 또한, 우리의 익숙함이, 자발적인 것이라고 할지언정 그 의도는 모두가 상이할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학자가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하여 의견을 펼쳤다.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가장 최적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쉼 없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계속해서 인기를 얻는 것 역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의에 관한 탐구가 여전히 목마름으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원제 <Justice : What is the Right to do>로서, 정의 자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행해야 하는 올바른 행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찰해보도록 한다는 그 방향성을 인식할 수 있다.
정의는 이렇게 계속 변화한 것이다. 필자의 전공과 연관 지어보면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정의의 본질적인 의미는 ‘상충하는 주장들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 또는 원칙들의 집합’이라고 주장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하비는 개인의 능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혔을 때, 즉 자본의 순환과정 속에서 자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그 확장의 장벽을 만났을 때, 국가가 공적으로 담당하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해 재생산의 돌파구를 여는 그 순환과정과 그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제도의 창시가 정의로운 현대도시사회의 메커니즘이라 본 것이다.비교적 명확한 주장이었다.
정의는 일상과 멀리 떨어진 추상적 관념이 아니지만, 동시에 개인, 사회적 차원마다 모두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에 어려운 것이다. 결국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상호교차적인 관점을 활용하여 정의에 대한 견해를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밝혔음을 알 수 있었다.모두 어느 지점에서 일리가 있고 반박점이 있는 주장들이었다. 분량상 그 주장들을 모두 밝히지는 않고, 지리학의 경우 하비에 집중하여 서술하고자 했다.
아주 머나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학자 트라시마코스가 정의에 대해 정의 내린 주장을 살펴보자.
트라시마코스) 올바름이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다. 통치자는 자기 이익을 목적으로 법을 제정해서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공포하고, 이를 위반하면 올바르지 못한 자로 여겨 처벌한다.
소크라테스의 답 ) 올바름이란 다스림을 받는 자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영혼의 수련으로 무지를 자각하고 올바름이 무엇인지 알면, 다스림을 받는 자의 이익을 돌볼 수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에 국가의 정의 역시 누가 지배자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정의 기준을 나타내는 법률은 지배자(강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피지배자에게는 법률을 위반하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다 해서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지향한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핵심은 지배자에게 이익이 되는 정의가 피지배자에게 부정의로 다가올 수 있기에, 이를 인식하며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라고 해석했다. 누군가가 최선이라 정한 정의에 대한 정의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부정의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 다양한 학자들이 바라본 정의에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계용묵의 소설 <별을 헨다>에서는 주인공이 해방 이후 서울로 귀환한 후에 고향인 북으로 가려고 했으나, 북쪽도 상황이 어렵다는 이웃의 말에 결국 북으로 가기를 포기하며 절망과 허무에 빠지는 적빈의 절망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정의를 찾아 헤매는 사회구조에서 고통받는 것을 넘어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별조차 헤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오늘날의 우리와도, 그리고 정의 지리학에서 찾지 못한 부정의한 사회와 핍진한 것 같았다. 결국, 이전과 다른,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정의가 가장 공평한 것일까에 대한 논의가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며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선정하게 된 것 같다. ‘교육’ 전공이기 때문에 정의를 다루며 ‘교육’과 관련한 정의 또한 설시 하고자 한다. 2학년에 수강한 전공 교육론 전공 기말시험에서, ‘공정한 시험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 수능을 대체할 수 있는 더욱 공정한 시험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제로 글을 작성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수능이라는 형태가 한국에서 가장 최선의 방식이라 대체할 형태를 찾기 어렵다고 답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쉽게 답할 수 없게 되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학생들이 동일하게 만들어낸 점수에 대해 그 노력의 투입 정도를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정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부모의 모든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으며 응원과 함께 양질의 자료로 준비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틈을 헤아려 주는 것이 사회의 정의라 생각했다. 그 준비과정부터 결함이 가득한 시험의 문제 형식 또한, 그 준비과정의 의의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객관식 유형에 기계화되듯 훈련되던 학생들에게 대학에서는 곧바로 사고력을 뽐내는 논술 실력의 신장을 필요로 한다. 그런 식으로 평가된 능력에 대한 공정성을 학생들이 감히, 어떻게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앞서 플라톤의 국가를 인용했기 때문에 한 가지 또 유명한 비유를 들자면, 동굴의 비유(Allegory of the Cave)가 떠오른다.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학습능력을 빨리, 효과적으로 전환하는 기술은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시력을 부여하는 기술은 없’는 교육으로 성장한 성인들에게 ‘정의’에 대한 시야를 확립하여 나은 사회를 구상토록 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동굴의 비유를 표현한 유명한 그림이다. 학창시절의 내가, 문제집 안의 그림자를 실체라 생각하며 공부하는 모습이 꼭 이 동굴 속의 사람들과 같고,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진학한 대학에서는 나에게, 그동안 머물었던 동굴에서 끄집어져 나온 뒤 그 실체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정말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내는 인재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 정의롭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키나 한 것인지에 대한 그 전제 자체에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지리학 역시 결국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신장시키기 위한 학문이라는 점과 연결되어, 지리 사상사에 언급되는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들은 이러한 전제에 대한 확신과 함께 방법을 고안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나도, 결국 존재하는 현재 공간에서 가장 최선의 방식을 찾고자 했다. 그렇기 위해서 현 체제에서 가장 올바른 정의와 그 체제가 무엇인가 생각했을 때 의견이 분분할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결국에는 대중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가장 첫 시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내부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민주주의 체제에 의해 운영되는 개인들이 가장 평등한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개인들이 운영 부속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시작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물론 대중의 이야기만을 듣자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와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정의를 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비현실적인 일일지 안다. 결국, 핵심은 강자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정의가 정의 내려져서는 안 된다는 바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시각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을 병리화한 접근이 아니라,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내재적 한계에 대한 본질적 반응, 나아가 하나의 도전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필요성이다. 포퓰리즘에 관한 초기 연구자 중의 하나인 쉴즈(Edward Shils)는 포퓰리즘의 제 1 특징으로 ‘인민의 뜻을 가장 높게 받들며, 인민과 정부가 직접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았다. 소외되는 민중 속 누군가가, 정의라는 재단에 의해 부정의한 삶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최소 정의에 따라 포퓰리즘은 ‘사회를 인민과 엘리트라는 두 진영의 적대 구도로 파악하며 정치는 인민의 의사를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념’이라고 보았을 때, 포퓰리즘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thin-centered) 이데올로기”다(Mudde and Kaltwasser 2019, 15-16; Mudde 2004). 이러한 이유로 포퓰리즘은 정의를 논하기에 지나치게 감성을 자극하고, 단순 논리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한다고 비판받는다. 사람들의 직감과 본능을 겨냥하기 때문에 ‘선술집 정치’에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단순한 것과 심각한 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감성적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 정당이 있는가(Taggart 2000, 5)?
정치적 수단이 아닌 변혁으로서의 포퓰리즘은 사회지리학에서 다룬 공간적 불평등에 따른 부정의 문제를 다루는데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앞서 언급한 포퓰리즘의 단순화된 이분법적 시각과 그 수단적 폐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예를 들어, 도시 내 특정 지역의 경제적 소외나 환경 문제 등을 포퓰리즘적 관점에서 '엘리트의 무관심'으로 프레임화하며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체제 아래 가려진 회색지대의 영역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지리학적 접근에서도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또한, 시민 사회와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정치가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사회지리학이 주목하는 일상 공간의 정치화 현상과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분단과 냉전을 거치면서 기형화된 정치지형'이 포퓰리즘의 특수한 형태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사회지리학에서 다룬 정의 지리학과 지리 사상사에서 언급된 정치 지리학적 해석은 단순히 이념적 차원이 아닌, 공간적, 지역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포퓰리즘의 이분법적 구도는 도시와 농촌, 이민자와 원주민, 국경, 정치 성향 등의 경제, 문화적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공간적 불평등과 같은 부정의를 연관 지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하는 반면, 포퓰리즘은 기존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은 투기적 금융 자본의 이동이 지리적 불균등을 재생산한다고 보는 등의 경제 지리학적 측면이 사회 변화의 주요 동인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포퓰리즘의 관점에서는 여러 측면을 고려하며 사회 변화 양상을 파악하고자 했다는 점이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마르크스 지리학이 기존의 실증주의적 지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간과 사회 변화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기여하며 자본주의에서의 만성적 과잉생산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은 동의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했을 때 체제를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라 와닿지 못해 새로운 접근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하비가 자신의 저서 <사회정의와 도시>의 결론 부분에서 ‘Marxists가 마르크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도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불행하다’라는 내용 역시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서술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와 경제 위기의 원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그가 언급한 “빈민들은 교통에 지출할 돈이 매우 적기 때문에 집단의 입찰지대 곡선이 눈에 띄게 가파를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중략) 목표는 게토를 제거하는 것이다.”와 같은 세부적인 예시와 그 설명들의 근거가 한국의 정서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토대를 참고하여 우리의 상황과 적합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설명이고, 그래서 새로운 관점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비단 데이비드 하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리 사상사의 주장이 너무도 포괄적이거나 너무 지엽적이라 우리의 현실을 발전시키기에는 한계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을 참고하여 세상을 살펴보는 것은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대표적인학자 데이비드 하비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해보고 싶어 여러 저서를 찾아보게 되었다. 사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사회정의와 도시>라는 책은 제주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없어, 로스쿨 도서관 보존서고에서 빌리는 것부터 어렵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글들이, 내가 읽지 못한 많은 책들을 더 읽고 오랜 시간동안 여러 사람들과의 논의를 거쳐 작성되고 있다면 글의 흐름이 더 뚜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울 따름이다. 본의 아니게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말을 여러 번 인용하게 된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인용하겠다. 트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꾸중한 바가 있다.
"If you really want to know what's just, you'll have to do more than asking questions and playing to the audience and trying to refute whatever answer anyone gives you, safe in the knowledge that it's easier to ask questions than to answer them. Give your answer, and say what you claim is just.“
궁금한 부분에 대한 명확한 제시와 또 그에 맞는 나만의 견해와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이번에도 의문만을 나열하듯 과제를 제출하는 나에게 혼쭐을 내는듯한 말이었다.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정의에 대해 지리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익숙함이 더더욱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과제의 목적과는 부합하나 전달하고자 하는 결론을 살펴보았을 때 효율적일지는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계속 익숙하게 노력해 온 가장 fairness한 equality(justness)를, 지금 세상보다 더 나은 형태로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에서 찾아 헤매보며 그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말자는 것이다. 노력의 과정에서 여러 사상가의 제안과 대안을 샅샅이 살펴보며 오늘날의 학자들이 연구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도 앞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한 뒤 이 과정에 일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참고문헌 및 자료
(참고문헌 : 한글파일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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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을 인용한 경우 주석을 첨부했고, 학자의 의견을 인용할 경우 주석을 달지 않더라도 학자 명을 밝히며 작성하였습니다. 사상에 대한 견해 논술의 특성상 인용 포인트가 겹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출처가 적히지 않은 제 글의 한 부분에서 기존의 타 논문이나 책과 인용 학자의 맥락이나 어휘가 겹친다면 이는 철저히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모든 글은 기존의 제가 교양 정도의 수준으로 알고 있는 내용에 <낯선 철학하기> 강의 내용을 곁들이는 식으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학자의 주장들을 연결 지어 작성한 부분에 있어 허술한 부분이 많은 점이 있을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윤리 전공자도 아니고 학창시절 사회탐구로도 윤리와 사상과 같은 내용을 배운 적이 없어 기본 교양 수준으로 채워진 것 같고, 그래서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고 그를 위해서 그 모든 참고 내용을 빌렸다는 정도로만 생각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책을 읽으며 이 부끄러운 글을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낯선 철학하기 강의 자료 참고

첫댓글 첨부하신 이미지는 평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됩니다. 특히 장애인과 관련된 평등과 정의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현실에서는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게 되지만, 공평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진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평성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각자가 가진 한계를 고려한 평등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인데, 정의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한계를 직감하게 만드는 현실의 장애를 걷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 때 우리나라에서 주목받기도 했던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에 대해 목말라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다 동의하는지는 한 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아직 현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며, 최소한의 평등을 보장하자는 것에서도 자신의 피해를 더 우려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인 내용이 깊이 있고,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