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모르는 엄마는 열일곱에 나를 낳았다고 했다. 열아홉 살이었던 아빠는 작은 식당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나를 맡겨 두고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재혼한 할머니는 친손주도 아닌 아이를 키우는 걸 늘 못마땅해 했다. 나는 작은 방에 숨죽이고 있다가 손님이 가면 식탁을 닦고 그릇을 나르며 할머니 기분이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학교에 입학할 때, 몸을 청결하게 하고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걸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할머니가 어딘가에서 얻어 온 옷을 소매가 새카매질 때까지 입었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땋은 친구들을 보면 부러운 동시에 내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새 옷을 입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옆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시작된 학교 폭력은 중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아이들은 내 앞에서 코를 막고 침을 뱉었고 화장실 칸 안으로 물을 끼얹었다. 내 의자에 오물을 묻혀 놓기까지 했다. 선생님에게 말해 봤지만 가해자는 반성문 하나 달랑 쓰고 비웃음 섞인 사과를 하며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가해자의 부모님은 내가 청결하지 않고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 그런 거라며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렸다. 선생님은 내게 친구들과 잘 지내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처음으로 나를 두고 떠난 엄마 아빠가 그리웠다. 그러다 이런 나도 소중하다고 말해 주는 이를 만났다.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내게 엄마가 있다면 저런 분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내게 커다란 상자를 건넸다. 안에는 여성 위생 용품과 속옷, 샴푸, 린스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몸이 자라 맞는 속옷이 없고 비싸지만 반드시 써야 하는 위생 용품 때문에 고민하는 내 마음을 선생님이 어떻게 안 걸까. 선생님은 나 같은 예쁜 딸을 갖고 싶었다며 나만 괜찮다면 엄마처럼 돌봐주고 싶다고 했다. 처음 들어 보는 말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학교 폭력 상담을 받고, 그런 일을 당한 건 결코 내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식당을 옮기며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전학을 가게 됐다. 이사 전날, 선생님은 백화점에서 새 옷과 신발을 사 줬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과 약속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겠다고. 그건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약속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스스로를 가꾸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으로 친구도 사귀었다. 드디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빠가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나타났다. 몇 년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까지 해 아이를 맡기러 온 거였다. 아빠는 동생을 잘 보살피라는 말만 남기고 또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 할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나더러 아이를 키우든지 고아원에 보내든지 알아서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기가 막히고 황당했다. 하루아침에 다섯 살짜리 아이의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무책임한 아빠와 동생이라며 나타난 아이가 내 삶을 다시 짓밟을 것 같아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할머니의 호통에 주눅 든 채 구석에 숨죽이고 앉아 있는 동생의 공포에 질린 눈이 보였다. 어린 시절의 나 같았다. 동생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소매가 새카만 옷을 입고 악취를 풍기며 낯선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밥도 잘 먹지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 그 눈을 본 순간 모든 분노가 사라졌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부족한 부모를 만났지만, 나만큼은 동생에게 누구보다 큰 사랑을 주는 누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동생을 안자 웅크린 작은 몸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그때부터 동생을 깨끗하게 씻기고 정성으로 보살폈다. 조금씩 안정을 찾은 동생은 세상 누구보다 큰소리로 웃으며 장난을 치는 말썽쟁이 일곱 살이 됐다. 동생의 재롱에 불같던 할머니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 이제 할머니는 과자를 사 와서 말없이 내밀기도 한다. 우리도 조금은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어 가고 있다. 내년이면 동생이 초등학생이 된다. 입학식 날 동생의 손을 잡고 누구보다 당당히 학교에 갈 것이다. 세상이 내게 불행만 준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맑고 사랑스러운 선물을 주기 위해 그리고 그 선물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고난도 함께 줬나 보다. 사랑하는 내 동생, 누나랑 계속 행복하게 살자. 이윤송(가명) | 서울시 강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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