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심연처럼 깊은 눈빛으로 장막을 밝히니
요: 요염한 자태 속에 검빛이 번뜩이고
연: 연무처럼 흩날리는 춤결에 세상이 숨을 죽인다
과: 과연 인간의 솜씨인가 신선의 경지인가
백: 백옥 같은 손끝에서 비파 줄이 울리고
능: 능히 천지의 기운을 움직여
파: 파도처럼 번지는 음률에 가을이 내려앉는다
[九雲夢] 43. 심요연과 백능파(白凌波)가 오다
이 때 두 미인이 유벽거(油碧車)를 몰아 장막 밖에 이르매, 문 지키는 자가 묻기를,
“월궁으로부터 오시느뇨?”
마부가 대답하되,
“이 차에 타신 두 낭자는 곧 승상의 소실이신데, 마침 일이 있어 처음에 오지 못하였노라.”
문지기 군사가 들어가 아뢰니, 승상이 말하기를,
“필시 춘운이 구경코자 옴이니 너무 경망하도다.”
곧 사람을 시켜 불러들이게 하니 두 낭자가 마차에서 내리는데 앞에는 심요연이요, 뒤에는 진중에서 꿈 속에 만났던 동정용녀(同庭龍女) 백능파(白凌波)라 두 사람이 승상의 자리 앞에 나아가 절하고 뵈니, 승상이 월왕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월전하(越殿下)이시니 너희들은 예로서 뵙도록 하라.”
이에 두 미인 예로써 뵈오매, 승상이 자리를 주어 경홍과 섬월도 같이 앉게 하고, 월왕께 이르되,
“ 저 두 여인은 토번을 칠 적에 얻은 바이나, 근래 다사하여 미쳐 데려오지 못하였는데, 필시 소유가 대왕과 더불어 놀이함을 듣고 구경코자 저들이 따라오다가 이에 이른 듯 하외다.”
월왕이 다시 두 미인을 보니 그 용모가 경홍 섬월과 더불어 형제 같으면서 그 태도는 한결 빼어나니 마음에 이상히 여기고, 월왕궁 미녀들도 또한 부끄러워서 얼굴이 잿빛 같은지라, 왕이 다시 묻되,
“낭자의 성함은 무엇이며 어디서 살았느뇨?”
먼저 심녀가 대답하되,
“소첩은 심요연이라 하오며, 서량(西凉) 사람이옵니다.”
이어서 백녀가 대답하되,
“소첩은 백능파라 하오며, 일찍이 소상강(瀟湘江) 사이에 거쳐 하옵다가 불행히 변을 만나 부득히 서방으로 피하였삽고, 이제 양상공을 쫒아 왔나이다.”
월왕이 다시 묻기를.
“두 낭자는 인간 사람이 아니라, 신기하려니와 능히 풍류를 아느뇨?”
심요원이 대답하되,
“소첩은 변방(邊方) 사람으로, 풍류를 듣지 못하였는데 장차 무슨 재주로써 대왕전하를 즐겁게 하올 수 있겠나이까? 다만 어렸을 적부터 검무를 배웠으나 허나 군중(軍中)속에서의장난이요, 귀인이 보실 바 아닐까 하나이다.”
월왕이 크게 기뻐하며 승상에게 말하되,
“현종조(顯宗朝)의 공손대랑(公孫大嫏)의 검무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다가, 그후로 그 술법이 세상에 전하여지지 못하매 내가 한번 보지 못함을 한스러이 여겼는데, 이제 이 낭자가 검무를 한다 하니 매우 유쾌하나이다.”
월왕이 승상과 더불어 각기 허리에 찬 칼을 끌어 내어주니, 요연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띠를 풀어 놓고는 몸을 날려 춤을 추매, 상하로 번득이고 좌우로 뛰노는 밝은 단장과 흰 칼날이 한 빛이 되어, 이윽고 춤추는 소리 더욱 급하여 칼이 더욱 빨라지더니 눈서리 날리는 기색이 홀연 장막 속에 가득하며, 심요연의 몸이 아주 보이지 아니하더니 별안간 한가닥 무지개가 하늘로 뻗치며 바람이 배반(盃盤)사이로 스치니, 좌중이 다 뼈가 절이며 머리털이 으쓱하더라. 이에 춤을 파하고 칼을 던지며 재배하고 물러가니, 왕은 오랜 후에야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고 요연을 보고 말을 하였다.
“인간의 검무가 어찌 이토록 신묘한 지경에 이를 수 있으리오? 내 들으매 신선 가운데 검술이 능한 자 많다 하던데, 낭자가 바로 그 사람 아니뇨?”
요연이 대답하되,
“서방 풍속에 병기(兵器)를 희롱함을 좋아하는고로 어렸을 적에 배운 바이오나, 어찌 신선의 기이한 술법을 따를 수 있사오리까?”
월왕이 일러 두기를,
“내가 궁으로 돌아가면 마땅히 희첩(姬妾) 중에서 춤 잘 추는 자를 가려 뽑을 터인즉 바라건대 낭자는 가르치는 수고를 아끼지 말도록 하라.”
요연이 절하며 분부를 받으니, 왕이 다시 백능파에게 물어보며 말했다.
“낭자는 무슨 재주를 가졌느뇨?”
능파가 대답하기를,
“첩의 집이 소상강 위인데 바로 황능묘(黃陵墓:순임금의 이비묘)의 아황(娥皇:순임금의 왕비)과 여영(女英:순임금의 왕비)이 노니는 곳이라, 밤이 고요하여 바람이 맑고 달이 밝은즉 비파소리가 구름 사이로 흐르는고로 첩이 어려서부터 그 아름다운 음률을 모방하여 몸소 비파를 타며 슷로 즐겼을 따름이온즉, 귀인의 귀를 더럽힐가 송구하나이다.”
월왕이 이에 대꾸하기를,
“비록 옛사람의 글로 말미암아 아황과 어영이 비파를 낼 줄은 아나 그 곡조가 세상 사람에게 전함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낭자가 그 곡조를 알고 있음이 사실이면 어찌 시속의 풍악에 견줄 바 있겠느뇨?”
백능파가 소매에서 비파를 꺼내어 한 곡조를 타니, 그 소리가 맑고 또렷하여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뜻하매 물리산골짜기에 떨어지고 기러기가 추운 하늘가에서 우는 것 같더라. 이어 모든 사람들이 어느덧 마음이 처량하여지며 눈물을 흘리는데 이윽고 초목이 저절로 움직이며 가을인 듯 마른 잎새가 분분히 떨어지므로 월왕이 이상히 여기며 물어보되,
“인간의 음률이 천지조화(天地造化)를 부릴 수 있다는 말을 내 믿지 아니하였는데, 낭자는 어찌 봄을 가을을 되게 하며 또한 나뭇잎이 저절로 떨어지게 하느뇨? 범인(凡人)도 능히 그 곡조를 배울 수 있겠느뇨?”
이 때 만연옥이 월왕께 이뢰기를,
“첩이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평일에 익힌 바 풍악으로 백련곡(白蓮曲)을 시험삼아 아뢰겠나이다.” 하고는, 진나라의 비파(琵琶)를 안고 자리 앞에 나아가 줄을 고르는데[ 능히 스물 다섯 가지의 소리를 내며, 손 놀리는 법이 또한 아담하고 높아서 가히 들음직하니, 양승상을 비롯하여 섬월과 경홍이 극찬하며 월왕 또한 매우 기꺼워하더라.
출처: 구운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