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철호 요한 신부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1마카베오 4,36-37.52-59 루카 19,45-48
오늘 제1독서는 마카베오와 형제들이 독립 전쟁을 치른 뒤 이민족들에게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사건을 기념하여
여드레 동안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 축제’)를 지내는데,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며 빛을 밝히는
성전 봉헌 축제는 신약 성경, 특히 요한 복음에서도 이따금 언급되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사건은 모든 복음서가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으로(마르 11,15-19; 마태 21,12-13; 요한 2,14-16 참조),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성전 자체를 정화하시거나 부수어 없애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고치고자 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무엇이 참으로 올바른 예배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보여 주던
행동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언자들은 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예배 행태를
비판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두 구절,
곧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이사 56,7 참조)와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예레 7,11 참조)는 말씀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졌던 예수님의 예언자적 비판은 그분을 죽음으로 내모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제물 판매로 많은 수입을 얻고 있던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바로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참된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전에서 환전하고 물건을 사서 하느님께 봉헌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 곧 예수님이라는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제물로 봉헌하는 참된 제사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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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1마카베오 4,36-37.52-59 루카 19,45-48
기원전 200년경,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안티오코스는 유다교를 없애려고 갖은 박해를 가했습니다.
희생 제사를 금지하고, 백성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며, 이에 따르지 않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성전마저도 그리스의 신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마카베오라 불리는 유다를 중심으로 항쟁한 끝에 기원전 165년 성전을 되찾고는,
제1독서에서 보듯이 성전 제단을 다시 봉헌하며 제물을 바칩니다.
유다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으려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요.
그런데도 세월과 함께 점점 세속적이고 정치적으로 흐르면서 신앙심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들이 순례자들의 절박한 처지를 악용하여 온갖 폭리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이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도록,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꾸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순례자들의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을 담보로 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들을 착취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전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미는 이유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분위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말씀을 더욱 깨닫도록 도와주려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성전이 순수하게 기도하는 집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 되어 갈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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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훈 토마스 신부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1마카베오 4,36-37.52-59 루카 19,45-48
저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이 말씀과 같아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무엇인가가
되어 주는 사제,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싸우고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다투고 얼굴 붉히며 살아갑니다.
내 실수를 인정하며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기반성보다는 상대의 아집과 욕심 때문이라
판단하고 분노하며 다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마음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쉽게 인정해 버리고 포기하며
외면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툼과 분노가 잘못된 것일까요?
다툼과 분노 그 자체보다는 무엇을 위한 싸움이고 분열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분노하시며,
그들의 탐욕과 잘못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하느님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시며, 그들이 성전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외면당하시기까지,
그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시면서도 그들 또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싸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잘못 때문에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과 다툼, 미움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유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부딪친 이유와 예수님께서 그들과 부딪쳤던 목적과 이유는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다투고 싸웠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싸우고 있는 상대를 위하여 그들과 맞서 싸우셨습니다.
여러분의 ‘분노와 다툼의 이유’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가치를 전해 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