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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를 흔히 '중원(中原)' 이라고 부른다. 한반도 정중앙, 그러니까 '나라의 중심'이라는 얘기다. 한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중원은 삼국시대부터 서로가 탐내던 뜨거운 땅이었다.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의 패권을 쥐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바꿔가며 이 땅을 차지했다. 먼저 백제가 이 땅의 주인이었다가 5세기 말 고구려에 넘겨줬고, 삼국통일로 신라의 영역이 됐다. 충주는 백제 영토로 450여년, 고구려 영역으로 150여년, 신라의 땅으로 550여년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덕왕 16년에 충주를 중원으로 삼고 통일신라 영토의 한 가운데임을 선포하기도 했다.
충주 일대에 여태 고대국가의 성터의 자취가 여럿 남아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의 중심으로 향하는 여정. 충주로 떠나는 여행이 바로 그렇다. 성은 경계의 공간이자 격전의 현장이다. 성벽길을 걸으며 옛 사람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 충주로 간다.
충주호와 첩첩한 산줄기가 이어지는 충주산성에서의 조망. 충주산성은 성곽을 따라 내내 훌륭한 조망이 펼쳐진다.
중원을 경계하는 곳, 충주산성
충주산성은 해발 636m의 충주 남산 정상을 거대한 구렁이처럼 감고 있다. 삼한시대 마고선녀가 7일 만에 축성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충주산성은 백제 개로왕 때 쌓은 성이라는 게 정설이다. 삼국이 쟁패하던 충주 땅 중심에 세워진 성곽이니만큼 충주산성과 얽힌 역사 얘기가 끝이 없다. 백제 개로왕이 이 성을 버팀돌 삼아 도읍을 이쪽으로 옮기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고려 말 몽골군이 성을 공략하자 하늘의 도움으로 비바람에 물러갔다는 전설도 있다.
복원된 성곽 위로 길이 이어지고, 성곽 아래로는 임도가 지나간다.
산성이 갖춰야 할 첫째 조건이라면 조망이다. 사방의 시야가 툭 트이는 자리라야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고 효과적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곽은 그 자체로 빼어난 조망대다. 충주산성을 여행목적지로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곽에 오르면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경관을 만날 수 있다. 산의 9부 능선을 감고 도는 성곽 위에서는 금수산과 월악산, 그리고 그 너머의 소백산까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 이른 아침이라면 산 그림자의 골짜기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수묵화 같은 경관을 만날 수 있다.
충주산성 동쪽의 산골짜기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 충주산성의 호젓한 풍경 충주산성에서 바라본 첩첩산중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충주산성의 조망
충주산성은 남산을 오르는 등산로를 타고 오르다가 접근할 수 있다. 등산을 겸하는 여정이라면 모를까, 산성만 찾아가겠다면 깔딱 고개를 힘겹게 걸어 넘어서야 하는 등산로를 택할 이유는 없다. 충주시 종민동의 마즈막재에서 출발해 직동의 석남사 쪽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임도를 걷다보면 산성 동문의 턱밑까지 당도할 수 있다.
동문일대는 충주산성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니 이 길을 택하는 게 금상첨화다. 여기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성곽을 돌면 충주도심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지점을 지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첩첩한 산과 푸른 호수, 그리고 도시의 경관까지 모두 다 눈에 담을 수 있다. 성곽을 다 돌아본다고 해도 3시간쯤이면 넉넉하고 산성의 동문 일대만 둘러본다면 2시간 안쪽에도 다녀올 수 있다. 속도만 내지 않는다면 숨 한 번 차지 않는 유순한 길이라 가족들과 함께 가도 좋겠다.
임도에서 성곽으로 올라서는 곳. 나무계단을 딛고 오르면 성곽위로 올라서게 된다.
장미산성, 차를 타고 성에 오르다
장미산성. 차를 타고 단숨에 오를 수 있는 성이다.
장미(薔薇). 산성의 이름이 꽃 이름과 한자까지 똑같다. 장미산(340m)에 쌓은 산성이라 그럴까 싶지만 정작 산의 이름은 '긴 장(長)'에 '꼬리 미(尾)'자를 쓴다. 그렇다면 왜 산성에는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두 가지 설이 있다. 보련과 장미라는 남매가 성 쌓기 내기를 했는데, 남동생인 장미가 이기게 돼 그 이름을 땄다는 게 하나고, 다른 하나는 성을 의미하는 '잣'과 산을 뜻하는 '뫼'가 합쳐진 '잣뫼'로 불리다가 장미가 됐다는 얘기다.
아무튼 중압탑면 장천리의 장미산성은 충주에서 가장 손쉽게 가볼 수 있는 산성이다. 차로 단숨에 성벽 위까지 올라갈 수 있으니 말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가 맞닿은 국경에 축조된 요새였던 장미산성이 이제는 누구든 단번에 오를 수 있게 된 셈이다.
장미산성의 성벽 [왼쪽/오른쪽]매끈하게 다듬어진 복원된 장미산성의 성벽 / 장미산성에 오르면 충주를 적시고 원주로 흘러가는 남한강을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장미산성에서 내려다본 남한강의 왼쪽 수변을 따라 도보코스로 이름난 비내길이 지나간다. 장미산성 성곽과 이어지는 자리에 들어선 소박한 절집
차를 타고 오르면 장미산성의 동쪽으로 길게 뻗은 성벽과 만나게 된다. 이쪽의 성벽은 근래 말끔하게 새로 복원했다. 복원 작업으로 가지런히 쌓아올린 성벽은 성안의 사찰인 봉학사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가지런하고 매끈한 성벽에 서면 강원 원주 쪽으로 흘러가는 남한강의 물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한강 상류 쪽은 숲과 산자락이 막아선다.
장미산성에서 감탄하게 되는 건 험준한 바위산이 아님에도 지세를 이용해 가파른 경사면에 절묘하게 쌓아놓았다는 것이다. 장미산은 부드러운데도, 그 어느 험준한 산에 쌓은 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난공불락의 모습이다. 삼국이 중원을 점령했을 때마다 요새가 됐던 성이다. 성 뒤편의 오솔길에다 솔숲에는 누군가 세운 돌탑이 하나 있다. 제법 공이 든 모습이었다. 남한강을 굽어보면서 돌탑은 세운 이는 무엇을 기원했을까.
장미산성 안쪽의 숲길에 누군가 세워놓은 돌탑
산성에 올라 영남대로를 굽어보다, 대림산성
대림산성을 따라가는 숲길
충주의 살미면 향산리에는 대림산성이 있다. 대림산(489m)은 새재(조령)와 하늘재(계립령)를 거쳐 충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솟은 산에 쌓은 산성이다. 과거에는 영남대로로 불렀던 길, 지금으로 치자면 3번국도 중원대로를 끼고 있는 산에 세운 산성이니 얼마나 요충지였을까. 거기다가 영남대로와 나란히 흐르는 달천의 물길은 그 자체로 천연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가 됐다.
다른 산성과 달리 대림산성에서는 산성의 자취를 뚜렷하게 느낄 수 없다. 대림산성은 대부분의 구간을 흙으로 쌓은 토성이기 때문이다. 돌로 쌓은 곳도 있지만 그것도 허물어진 자취만 남아있을 뿐이다.
대림산성의 성안 마을인 창골마을. 나무 아래로 집들이 숨어있다.
대림산성을 찾아간다는 것이 곧 대림산 등산을 하는 것과 그닥 다를 바 없는 것이, 흙으로 돋워서 세운 성곽의 자취가 곧 등산로의 오솔길이 돼버린 탓이다. 대림산성은 일대의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성벽 길이만 5km에 육박한다. 산성에서 가장 낮은 서문지(100m)와 가장 높은 봉수대지(487m)와의 비고차이가 350m가 넘으니 성곽 길을 걷는 건 본격 등산을 방불케 한다.
대림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대림산성의 성안 마을인 살미면 향산리 창골 마을에서 시작한다. 산성 길을 걷는 내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성벽 안쪽 아래로 내려다 보이던 창골마을이었다. 산성이 지나가는 대림산 능선의 안쪽의 비탈면에 마을이 꼭꼭 숨어있는데, 마을은 어쩐지 비밀스러우면서도 아늑하고 또 평화로워 보였다.
[왼쪽/오른쪽]대림산성을 따라가는 길에서 만난 사모바위와 종주바위 / 대림산성의 사모바위와 종주바위
대림산 정상에 오르면 충주시내와 월악산, 주흘산 일대의 조망이 시원하다. 충주산성이 있는 남산과 석남사도 제법 가까이 보인다. 산성을 딛고 거기까지 가는 길에는 그러나 별다른 조망이 없다. 무성한 나무들이 시야를 막는 탓이다.
산성을 따라 걷다가 만나는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대림산성 남문이 있었던 자리 부근에 있는 종주바위와 사모바위다. '종주'는 이곳 대림산성에서 1차 려몽전쟁 때 고려군을 지휘하다가 도망친 부사 우종주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모는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에 쓰던 모자를 이르는 말인데 바위의 형상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아닌 게 아니라 바위 모습이 전통결혼식 때 신랑이 쓰는 사모의 모습과 비슷하다.
왕의온천, 수안보
수안보온천 입구 표지석. 수안보는 여러 임금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라 해서 '왕의 온천'임을 강조한다.
충주의 산성을 두루 들러봤다면 다음 차례는 온천이다. 산성 걷기로 굳은 근육을 나긋나긋하게 풀어주는 건 온천욕만한 게 없다. 충주에는 수안보 온천이 있다. 이른바 '왕의 온천'을 자처하는 곳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피부병을 치료하려 찾았다고도 하고, 숙종이 휴양을 위해 방문했다고 해서 이렇게 불린다. 어디 왕 뿐일까. 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역대 대통령들도 빠짐없이 다녀갔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식수 복원비 [왼쪽/오른쪽]수안보온천 역사관 / 수안보온천 족욕시설, 안락정
온천에는 기념비가 도처에 있다. 온천수의 특징을 기록한 기념비도 있고, 수안보 온천이 가사 속에 등장하는 노래비를 새긴 비석도 있다. 쇠락해져가는 온천을 살리기 위한 노력들이다. 물탕공원에 무료 족욕시설인 안락정을 설치해 해놓은 것이나 다양한 역사기록을 전시한 수안보온천 역사관을 연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왼쪽/오른쪽]수안보 온천랜드 외벽에 치장된 1916년 수안보온천의 대중원탕의 사진.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이다. / 최초의 수안보 대중원탕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온천교 표지
수안보 온천은 낡았다. 부인할 수 없다. 새로 단장한 것들도 있지만 옛날 호텔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런 오래된 풍경이 환기하는 것들이 있다. 새로 지은 최신식 건물들이 도무지 따라올 수 없는...
수안보온천랜드 외벽에는 일제강점기이던 1916년에 찍은 원탕의 외부 사진이 나붙어있다.
여기가 바로 100년 전에 수안보 최초의 대중원탕이 세워진 자리다. 온천랜드 앞에는 대중원탕 앞에 있었다는 온천교(溫泉橋)의 석조 표지석을 세워두었다.
시설로만 보자면 수안보의 온천은 잘 꾸민 동네목욕탕보다 못하다. 그러나 수안보에는 첩첩이 겹쳐진 시간이 있고, 53도로 솟은 좋은 온천수가 있다. 새로 단장한 깔끔한 호텔도 좋겠지만, 누르스름한 민속장판이 깔린 온돌방을 찾아드는 것은 어떨까. 펑펑 함박눈이 내리는 한겨울이라면 더 좋으리라.
글, 사진 : 박경일(문화일보 여행기자)
※ 위 정보는 2016년 11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모셔온 자료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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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달과 해님 안녕하세요
화요일 밤 반갑게 댓글로 인사 나눕니다
달과 해님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중원의 땅 충주의 산성들 이미지
감사의 마음으로 기쁘게 공유하며
응원의 마음으로 강추합니다
편안한 화요일 밤 되시구
언제나 건강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추카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드실텐데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시고 편안하게 보내는 밤이 되시고 꿀몽 하세요
비련의 역사가
외유내강을 하라고
지침을 주지만
나라 안은 늘 혼란 스럽군요
새는 바가지
흉해서 버리고 싶지만
역사가 못 버리게 하네요
오랫만에 좋은 공부하고
멋진 유적 답사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 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게 되네요
즐거움이 가득한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글에 머물다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건강관리 잘 하시시고 오훗길 행복한 시간 되세요
동트는새벽님
즐거움이 가득한 나날이 되시고 기쁨이 가득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 고향이 청주인데
어릴 때 할머니 댁이 충주에 있었던 고로
한번 가 본 기억은 있는데
자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리라곤
미처 생강 못 했습니다~~
정말 멋진 풍경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움이 가득한 나날이 되시길 바라며 좋은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