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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묘에 대해
북경에 공묘를 다녀 온 적이 있다. 다분히 연암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다. 왕징에서 택시로 30분 남짓 되어 도착한 공묘는 국자감 거리에 위치해 있다. 공묘에 들어서기 전, 큰 가로수들로 터널을 이룬 국자감 거리가 참 맘에 들었다. 국자감 거리에서는 4개의 패루를 볼 수 있으며, 패루 옆에는 '하마비(下馬碑), (관원들이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써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공묘의 정문은 '선사문(先師門)'이며 문을 지나 들어오면 좌우에는 진사제명비가 쭉 늘어져 있는데, 이는 원, 명, 청대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198개, 51624명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연암의 진부하지 않은 사실적 묘사가 나는 끌린다. 열하일기의 내용을 보자.
< "지금 청나라의 과거 제도를 모두 명나라의 옛 제도를 그대로 따라, 진사의 이름을 쓴 비석이 아주 촘촘하게 들어서서 마치 총총하게 파를 심은 밭과 같아 다 기록할 수도 없다. ... 태학의 비석을 세우는 관례를 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 많은 이무기를 새긴 비석 머리와 거북이 비석 잔등을 어디에다 세우려는지 모르겠다." >
그런 진사제명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옆면에 빨간색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진사제명비 곳곳에 칼자국같이 깊게 패인 흠집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칼로 베어놓은 자국이라고 한다. 문화의 황폐화를 말한다. 무자비한 홍위병들. 중국은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세계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다. 중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다소 늦은 1987년에 첫 등재를 시작했다. 그 무렵 장성과 자금성, 베이징 원인 유적지, 돈황의 막고 석굴과 진시황의 병마용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산동성의 태산이 자연문화 복합유산으로 등재가 됐다. 이후 중국은 2014년까지 모두 47개의 세계유산을 가지게 된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끊이지 않았던 외침과 지속되는 내전과 전쟁으로 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고 유실되고 유출되고 노략됐다. 1949년 신중국이 출범하면서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소중한 문화재들을 보존하려는 정책을 만들어 관심을 가졌었으나 또 다시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은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과 파괴를 가져 왔다.
(내가 지은 책)
넓은 대륙의 땅에서 오랜 역사를 거치며 살았던 사람들이 만들어 왔고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마땅할 유산들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또는 중국인들 자신들이 진행한 파괴와 약탈의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소멸 돼 간 것이다. 그 후 개혁개방과 함께 이어진 세계유산 등재 등의 노력으로 뒤늦게나마 중국의 문물들은 제대로 보존되기 시작했고, 복원되거나 다시 발굴되고 개방되어 세계인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실 그들의 옛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시 짓다 시피한 것이 대부분이라 실망할 때가 많다. 복구했다는 년도가 1980년도를 넘어선 것들이 참 많다. 우리는 전쟁을 치러 그렇다 하지만 수천년을 견뎌 잘 존립하고 겨우 명맥을 유지한 귀한 유물들을 왜 쳐부수는가 말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소실된 문화재가 모르긴 해도 금액으로 쳐 조단위를 넘어서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워낙 장구한 시간의 터전이었기에 언제 또 경천동지할 엄청난 문화재가 넓은 대륙의 땅 어디에서 솟아날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전통성을 위한 정통성은 한 결합체로 작용할 때 문화는 융성하지 않나 싶다.
비록 우리 것은 아니지만 연암이 보고 쓴 글을 대하고 대하니 감회가 새롭고 흐뭇하기도 하다. 연암이 말한대로인지 확인도 하고 재연출하듯 다시 따져보고 하다보면 내가 연암이 되고 그가 내 앞에서 설명하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수백년이 지났지만 그와는 여전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아니 천년이 넘은 유물과도 교감이 싹 터 어느 새 유물과 나 그리고 연암은 퍽 친한 사이가 되어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연암이 그러했듯 나도 대성문을 들어서기 전 공자상을 보고 공자상 옆에 '공자가호비'를 본다. 공자가 자신의 이름 외에 '대성지성문선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기념으로 세운 비라고 했다. 대성전 바로 앞에는 황궁에서 볼 수 있는 용과 구름 조각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공자를 황제와 같은 인물로 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대성문 좌우 안쪽에는 '석고'가 각각 다섯 개씩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주나라 선왕이 기산 남쪽에서 사냥을 하고 돌을 깎아 그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이 '석고'에 대해 연암은 열하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옛날 유적 중 석고만큼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사연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나이 열여덟에 처음으로 한유와 소식이 석고가라는 한시를 읽고 그 문사를 특이하게 여겼으나 다만 실제 석고의 전 문장을 볼 수 없음을 한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내 손으로 직접 그 석고를 어루만지고 입으로는 석고음훈비까지 읽게 되었으니 이 어찌 외국인으로서 더없는 행운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석고를 만나는 순간 흐뭇했었다. 연암이 행운이라 느낀 '석고'와 '석고음훈비'를 보는 순간 나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대성전으로 가기 전 넓은 마당에는 공묘만큼이나 오래된 고목들을 많이 볼 수 있고, 다른 관광지에 비해 한가롭고 여유로운 느낌이 들었었다. 요즘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하기야 연암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곳을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금성의 문현각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공묘의 이런 여유로운 분위기가 공부하기에 딱 좋은 내밀한 느낌도 마저 들었었다. 그런데 남경의 대성전은 어떠한가. 아닌 말로 난리 법석이다. 이래서 공부가 될까. 공자 사당 앞에는 우리나라의 홍살문 같은 그들 방식의 돌 패방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다. 그 문루에 새겨진 전서(篆書) 체 글자.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나중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영성문(欞星門)이란 글자다. 즉 ‘영성’은 선비를 관장하는 신령스러운 별, 공자의 별칭인 셈인 것이다. 그 글자라 하니 또 어디선가 본 듯하다. 공자를 의미하는 곳에는 꼭 달라붙는 게 영성문이란 말이고 대성전이다. 대만에서도 이는 똑 같다.
잘 알다시피 취푸(曲阜)는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 취푸는 중국의 여느 농촌과 다름없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중국 황제들이라면 특히 유능했던 청나라 황제들은 어김없이 그곳에 들렀고 남겨 둔 글도 제법 많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반드시 가보아야 할 필수코스가 있다. 이른바 삼공(三孔)이라 불리는 공묘(孔廟, 콩먀오), 공부(孔府, 콩푸), 공림(孔林, 콩림)이 바로 그것이다. 공자의 위패가 모셔진 공묘. 앞서 말했지만 공자가 죽고 1년 뒤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 유교를 나라의 근간으로 한 각 황조들이 거쳐 가면서 그 규모는 갈수록 커져갔다. 1961년 중국정부에 의해 국가중점보호문화재로 지정된 공묘는 199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공묘는 베이징(北京)의 자금성(紫禁城, 쯔진청), 청더(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莊, 삐슈산좡)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고건축 중의 하나로 꼽힌다. 개인의 사당이 황제가 거하는 자금성에 비견될 정도이니 중국에서 공자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만하지 않은가.
중국에서 황색은 곧 황제를 뜻하는 색깔이다. 때문에 황색은 아무나 혹은 아무데나 함부로 쓸 수 있는 색이 아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 자금성을 제외한 단 한 곳, 바로 공묘의 지붕에는 황색 자기로 된 기와가 얹혀있다. 이것만도 아니다. 공묘의 정전(正殿)인 대성전(大成殿) 지붕은 황궁에만 사용했다는 ‘겹침 지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때문인지 높은 곳에서 공묘를 굽어보면, 마치 자금성의 일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공묘 입구에서 영성문 같은 여섯 개의 문을 통과하면 공묘의 정전인 대성전에 이른다. 대성전을 받치고 있는 전면 열 개의 돌기둥에는 흡사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역대로 열두 명의 황제가 이곳에 들러 공자에게 제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이 돌기둥을 붉은 천으로 가려놓았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본래 용이란 황색과 마찬가지로 황제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인 데다가 그 석주(石柱)의 조각이 중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했기 때문이란다. 아무리 황제들이 공자를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한다 할지라도, 자금성에도 없는 화려한 돌기둥을 보고 혹여 마음이나 상하지 않을까 하는 신하들의 우려와 배려라고 했다.
대성전 기둥과 옹정제가 쓴 ‘生民彌儒’ 편액 ‘백성이 있은 이래 공자 만한 이가 없다’는 뜻으로, 공자의 위상이란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만하다. 강희제가 쓴 ‘만세사표’, 광서제가 쓴 ‘사문재자’. ‘만세의 모범’이요, ‘세상이 모든 지식과 문화가 여기 있다’고 하여 스승으로서의 공자를 추앙하고 있다.공부(孔府)는 공자의 직계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했던 집이다. 본래 ‘부(府)’란 고관 벼슬아치들의 관저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의 공자에 대한 존경은 그의 후손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역대 왕조들은 공자의 후손을 연성공(衍聖公)으로 봉하고 각별히 대우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자신이 늦은 나이에 얻은 금지옥엽 막내딸을 공자의 72대손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공자 집안과 사돈을 맺기도 했다.
역대 황제들이 공자의 제를 지내기 위해 취푸를 찾으면서 제사를 주관하고 황제 일행을 대접하던 공자 가문의 음식문화도 함께 발전했다. 송(宋)나라 때 처음 시작된 공자 집안의 음식인 이른바 ‘공부채(公府菜, 콩푸차이)’는 천여 년 동안 공자의 후손들에 의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과거 취푸를 찾는 이들은 비단 황제만은 아니었다. 중국 각지에서 공자를 기리는 추모객들로 넘쳐났다. 이에 이들을 대접해야 하는 공부 역시 항상 붐볐고 자연스레 공부의 요리도 나날이 그 깊이를 더해갔다. 공부채의 발전이 정점에 달했던 건륭제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음식의 종류가 무려 196가지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201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신청하기까지 했으니, 취푸를 찾는 이들이 한번쯤은 직간접적으로 공부채를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부에는 더 이상 공자의 후손이 살지 않는다. 물론 시끌벅적한 화려한 연회도 없다. 역대 왕조를 거치며 유지되었던 연성공이라는 세습작위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공자의 77대 마지막 직계 후손인 공덕성(孔德成, 콩더청)은 공부의 대대적 정비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만든 장본인이다. 하지만 1949년 국민당 정부와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간 이후, 영영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영성문(棂星门)을 지나, 부자묘의 실질적 입구인 대성문(大成门)에 들어섰다. 과연 지붕에 금색을 입혔을까.
불빛에 금빛으로 느껴졌지만 2단의 지붕이지만 금빛으로 채색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들어서자마자 바로 눈에 띄는 게 단어 두 자. 대성문의 양쪽 벽면에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仁)과 예(禮)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사당의 핵심인 대성전(大成殿) 앞에 대형 공자상이 서 있고, 그 앞에 8명의 애제자가 양쪽으로 나뉘어 도열해 있다. 솔직히 나는 한 사람 말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을 나올 때 머릿속에 뚜렷이 남는 게 있었다. 예(禮)란 단어 하나. 예를 갖추자. 이는 너무 형식적이지만 인간이란 존재의 틀로서 아주 유용했다. 잘 알다시피 유학에서,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성품. 곧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을 이른다는 의미로서 仁義禮智. 그리고 辭讓之心.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중의 하나로, 겸손히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을 이른다는 의미. 인의예지(仁義禮知) 가운데 예에서 우러나온다고 했다. 바로 그 예를 갖추는 것이다. 일찌기 공자는 말했다. 인의가 살아 있으면 세상으로 나아가 정치를 하고, 인의가 없으면 조용히 물러나 선비의 도리를 지키라. 내 나이 이제는 바로 그 의미를 숙연히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어찌 해야 이 나이 값을 제대로 하는 것일까. 내년이면 퇴직인데 이후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지만 어찌 살아야 할지 막연하기도 하다. 나에게는 큰 숙제가 아닐 수없다. 분명 나가고 물러남의 때를 아는 자는 흥하고 사욕에 사로잡혀 나가고 물러나는 때를 모르는 자는 망한다는 말은 맞는 진리다.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 이 글은 맹자(孟子) 이루상편(離婁上篇)에 나오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