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282) - 진치집보다 초상집에 가라
어제(10월 25일)밤에는 독도에 들렀다가 일본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한국에서 독도를 거쳐 일본을 오가는 패키지가 시행되어 양국의 젊은이들이 독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틈에 끼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의아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침 신문을 보니 어제(25일)가 '독도의 날'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 그런 날을 만들었는지 몰랐는데 희한한 생각이 든다. 그 사연은 이렇다.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울릉군의 관할 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있는 섬), 석도(石島·지금의 독도)로 한다"고 명시한 '칙령 제41호'를 제정했다. 이 칙령은 근대 국제법 체계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밝힌 최초의 문서다. 2000년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가 10월 25일을 '독도의 날'이라고 한 뒤 2008년 경북 울릉군이 조례를 통해 같은 날을 독도의 날로 지정했고, 2010년 한국교총 등이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독도의 날을 선포했다. 그러나 중앙정부 차원의 기념일이 되지는 않았다. 일부 시민단체에서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는 청원을 국회에 넣었으나 실현되지 않고 있다. 지엽적인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대국적인 선린우호를 증진하는데 진력하면 좋으련만.
며칠 전에 큰형님이 8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후손이 2백 명 넘는 가문의 어른인 형님은 두 달 전부터 급격하게 심신이 쇠약해져서 염려가 되었는데 지난 일요일에 뇌출혈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신지 나흘 만에 별세하신 것이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의식이 없이 산소호흡으로 지탱하는 상황, 며칠 못 가실 것을 예감하고 1996년에 외국여행하면서 형님께 쓴 편지를 다시 정리하여 집안카페에 올리는 등 마지막 가시는 길의 가족적인 마무리를 서둘렀다.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도서 7장 2절)고 교훈하거니와 미수(米壽)에 이르기까지 한 가문의 종손이자 10남매의 맏이로, 40여년을 올곧은 교육자로, 50여년을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아온 범부(凡夫)의 삶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천착해본다. 먼저 신문에서 살핀 죽음관련 칼럼을 살펴보자.
사후세계도 스펙 따라 길이 나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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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지인과 저녁 식사를 했다.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그가 꿈 이야기를 꺼냈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후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가 오래전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팔베개를 베고 두 분 다 편안히 웃고 계시더라는 것이었다.
죽음 이후 세계를 꿈이 아니라 실제로 다녀왔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임사체험(NDE, near-death experience)이다. 임사체험은 19세기 말부터 과학적인 연구가 시작된 분야로, 오늘날도 의학계를 중심으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체험담을 담은 책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다. 요즈음 내가 흥미 있게 읽은 책은 『죽음, 그 후』와 『나는 천국을 보았다』이다. 전자는 임사체험을 주장하는 전 세계 1300여 명을 설문조사해 통계학적으로 정리한 결과를, 후자는 신경외과 의사 본인이 체험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사후세계는 진짜 있다는 것, 무섭지 않고 아주 행복한 세계라는 것, 현세든 내세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미국 미시간대 연구팀이 쥐의 심장을 강제로 정지시키고 뇌를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유체이탈 등 임사체험 경험은 뇌가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돼 생기는 착각”이라고 주장하는 등 반론도 거세다.
사후세계 여부가 과학적으로 낱낱이 밝혀질 경우 적지 않은 혼란도 뒤따를 것이다. 누구나 행복하다면 자살이 급증할 것이고, 천국과 지옥으로 갈린다면 좋은 데로 가기 위한 이승에서의 스펙 경쟁이 치열해질 터이다. 그 스펙이라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남 해코지 않고 착하게 사는 일이다.'(중앙일보 10. 22 분수대에서)
심신이 쇠약한 증세를 나타낸 지 두 달, 병원에 급환으로 입원하신지 5일 째에 임종하시기까지 형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준비된 최후를 귀감으로 보여주는 전범(典範)이 되었다. 가문의 카페에 올린 형님의 장례행사 전말을 요약하여 덧붙인다.
* 은혜롭고 경건하게 치른 큰형님의 고별의식
지난 23일에 소천하신 큰형님의 장례행사를 25일 오후 고향의 선영에 유골을 안장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은혜롭고 경건한 가운데 무사히 마쳤다. 정중하게 위문하신 문상객들에게 감사의 뜻을, 고별의식을 차분하면서도 정중하게 치른 가족들에게 치하를 보낸다. 고별의식의 전말을 기록함으로 후일의 자료로 삼는다.
19일 오후 5시경 저녁식사를 앞두고 화장실에서 쓰러지신 형님은 뇌출혈의 증세를 보여 즉시 병원에 입원하실 때까지 온전한 의식을 지니셨고 한국병원에서 긴급천공시술을 하였으나 소생하기 어렵겠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상황을 파악한 큰형수는 불필요한 연명치료로 환자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뜻을 천명하였고 자식들은 이를 따라 의료진에게 산소호흡과 수액공급 등 기본적인 처치 외의 부가적 처방을 하지 않기 바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긴급 상황을 전해들은 가족들이 속속 병원을 찾아 형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평안히 가시기를 기도하였고 임종 직전에 들른 형수님과 장조카, 큰누님, 셋째누님 내외의 면회를 마지막으로 큰형님은 23일 낮 12시 50분경에 우리 곁을 평온하게 떠나셨다. 형님이 운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고속버스를 타고 청주로 향하였다. 청주의료원 장례식장 2층 빈소에 도착하니 오후 6시, 벌써 여러 개의 조화들이 복도에 놓여 있고 깨끗한 국화꽃으로 단장한 영전에 마지막 교직에 계실 때 모습을 담은 온화한 영정사진이 찾아오는 문상객들을 향하여 미소 짓는다. 가문의 수많은 가족들이 속속 도착하여 자리를 지키고 친인척은 물론 원근각처에서 문상객들이 줄을 잇는다.
1. 육신의 마지막을 대면한 입관의식
입관은 24일 오후 3시, 장례지도사교육을 하는 전문가의 주관아래 한 시간여 정중하고 엄숙하게 몸을 씻겨드리고 수의를 입혀드린 후 관으로 모셨다. 가족들이 하나하나 형님의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며 마지막 인사말을 드린다. 형수께서 다정한 목소리로 '여보, 편안히 가세요. 부활하여 꼭 다시 만나요.'라고 인사하는 모습에서 평생을 해로한 반려의 잔잔한 사랑과 동행의 따뜻한 우정이 감동으로 느껴지고 아들딸과 손자손녀, 형제자매들의 애절한 말들이 가슴을 적신다.
입관 예배 때 전한 메시지.
'입관의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여깁니다. 하나는 험한 이 세상 힘들게 살아온 육신을 정성껏 단장하여 마지막 떠나는 길 차림을 정중하게 준비함이요, 다른 하나는 고인의 유족, 친인척들이 육신의 마지막 모습을 대면하는 이별의식이라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들은 88년의 험난한 세월을 담담하게 마감하고 하늘 문에 들어서는 형님을 깊은 존경과 사랑으로 전송하며 형님께서 평소에 염원하신대로 하늘에 쌓은 보화를 찾아가는 승리의 길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문집에 실린 형님의 어록 중 하나, '큰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가슴 벅차다. 기념패와 행운의 열쇠 받은 것 감사하다. 그러나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모두들 그런 마음으로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자.'(2007년 5월, 금강산에서 북의 둘째형님 가족을 만난 후 양평 가족모임에서)
이를 교훈한 성경말씀을 살펴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장 19~21절)
2. 높은 곳을 향하여 출발하는 발인의식
발인은 25일 아침 7시, 전날보다 기온이 내려가 찬 기운이 감도는 영안실에서 가족들이 입회한 가운데 영정을 앞세우고 캐딜락에 정중하게 모셨다. 그때의 메시지.
'형님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나 높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1996년 1월, 외국여행 중에 형님께 쓴 편지에 '존 옥센함' 의 시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길과 길들과 또 길이
높은 뜻을 품은 영혼은 높은 길을 밟고
천한 영혼은 낮은 길을 더듬어 내려간다.
모는 사람에게 열려 있다.
높은 길과 낮은 길이
그리고 각 사람은 결정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이제 높은 곳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소서. 영원한 평화의 나라에 이르소서.
3.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으로 향하다
아침 7시 조금 지나 청주의료원 장례식장을 출발하여 청주 동북쪽의 교외에 있는 목련원 화장장으로 향하였다. 목련원에 도착하자 곧 나무관이 화덕으로 옮겨지고 가족들의 인사를 뒤로한 체 화덕의 문이 닫힌다. 안내판에는 7시 51분에 화장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형님의 육신이 한줌의 재가 되어 유골함에 담겨서 승용차에 모셔져서 고향 길에 오른다.
오전 9시 40분경에 말년에 사시던 고창읍에 도착하니 12시 15분, 집에서 가까운 왕국회관에서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였다. 장례식장 바로 100m쯤 되는 곳에 형님이 17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가 보인다. 정든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못되어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오시다니. 교우들과 고창에 사는 친인척들이 따뜻하게 맞아준다.
12시 30분에 교우들이 주관하는 장례식이 간명하면서도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장례연설을 맡은 회중의 간부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장 8절)는 구절을 비롯하여 성경의 여러 곳을 인용하여 죄와 죽음, 삶과 부활의 깊은 의미를 군더더기 없이 체계적으로 설파하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는다. 좋은 성품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한다는 맺음말이 입관예배 때의 메시지와 연결되고. 장례식은 살아온 평생을 짚어보고 부활의 소망을 되새기는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4. 고향의 아늑한 품에 안긴 하관의식
오후 1시 반, 고향마을에 도착하였다. 고향 집 앞의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들고 마을 뒤편에 마련된 유택에서 하관의식을 가졌다. 이때 전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큰형님께서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품에 안기셨습니다. 두 달 전에 형님을 모시고 고향 집과 이곳 묘소에 들렀습니다. 형님은 그 길이 마지막인 듯 우리 집의 전기, 수도, 보일러의 사용요령을 일러주며 집과 산소를 잘 관리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6년 전에 형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평소의 소원이었던 할아버지 효행비와 조상들 묘비석을 꼭 세우겠다고 다짐하였는데 2년 후인 1985년에 후손들의 뜻을 모아 그 일을 다 이루었다. 고향 마을의 집과 집 뒤 선산, 공음선영을 잘 관리하려고 마음먹고 노력하니 8ㅇ이 넘도록 오래 살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겨 감사하다. 여생을 계속 가문의 전통과 긍지를 이어가는 밑거름이 되도록 힘쓰겠다.'
그해 금강산에서 북쪽의 둘째형님 가족을 상봉하므로 항상 마음에 걸린 숙제를 또 하나 해결하였고 3년 전에 우리 가문의 큰 행사인 '회상의 피란길' 걷기와 작년에 일본인들이 고향 집에 들르고 공음 선영의 성묘행사에 참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또 지난 6월 아버지의 30주기에 간행한 '화목하고 우애하라'는 가족문집을 받아보는 등 가문의 큰 어른이요 밑거름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시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믿음에 정진하셨습니다. 이를 기려 묘비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온화한 인품과 강직한 기상으로 미수에 이르기까지 올곧게 이어오신 삶, 하느님의 따뜻한 부르심을 받아 고향의 아늑한 품에 안기시다.'
사랑하는 형님,
만세반석 열린 곳에서 영원한 평강을 누리소서. 세상의 모든 시름 잊으시고 훨훨 날아 하늘 문에 이르소서. 가문의 역사가 되셨으니 가족들의 밝은 빛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