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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평화의 열매
로마서 8:1-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7주일이다. 매 주일 반복하여 읽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귀에 익었으면, 이젠 가슴에 담아 두길 바란다. 삶에서 맺어야 할 열매이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 이상 돌아가면서 읽은 <소설 하디>는 그 열매의 모습을 보여준다. 독후감을 쓴 젊은이가 내린 결론도 회개와 그 열매였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로버트 하디’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일어난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 중 주가 되는 내용은 ‘회개’이다. 어느 날 하디는 성령의 부름을 얻고 자신의 선교사 생활을 반성하고 회개한다. 그 후 하디의 진솔한 설교는 신도들에게 울림을 줘, 하디가 가는 곳에는 늘 회개의 물결이 퍼진다. 그리고 이 물결은 점차 파도로 바뀌어 어느새 한반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하루하루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로 가득하게 된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에 대해 감사드린다. 참여한 사람도 수고하였고, 마음으로 애쓴 사람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위한 노력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 열매 9가지는 브랜드가 ‘생명과 평화의 열매’임을 로마서 8장은 밝히고 있다.
1)
로마서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을 많이 만들어 낸 책이다. 로마서 안에는 그리스도교 진리가 가진 역동성으로 가득하다. 즉 인간을 변화시키고, 역사의 물꼬를 바꾸는 영적인 에너지가 충만한 까닭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슬로건이나, 감리교회의 영적 각성 메시지는 다 로마서에서 나왔다.
그중 핵심 단어는 ‘의’이다. 공동번역은 이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서 유대인은 선행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인간의 ‘의’ 또는 ‘의롭게 여김’을 받는 것은 율법과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음’으로 가능함을 밝히고 있다. 바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신앙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얻은 은총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갖게 하며, 더 나아가 고난 중에서도 기쁨을 얻게 한다.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다(1-2).
마침내 대사면(大赦免)령이 내려졌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죄인들에게 사면의 길을 열어 주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죄 많은 인생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완벽한 방법을 마련해 주셨다.
이를 신학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부른다. 죄인에게 죄 없음을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복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조치이다. 정죄 받은 죄인에게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선언은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길이 열렸다는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은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그것을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심으로써 이루셨다. 육신의 약함으로 율법이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대신 사랑을 통해 마련해주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다.
2)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두 종류의 사람의 삶은 선택의 문제이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냐, 생명이냐’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에서 육신은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사람의 본성을 뜻한다. 타락한 인간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에게 적대감을 품고, 하나님의 법을 부정하는 생활을 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따라서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 죽음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죽음이다.
모든 사람에게 육체적인 죽음은 불가피한 일로 어떤 책임의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인 죽음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 뒤따르는 죽음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은 한 마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과 결합하는 삶, 이것이 영적인 삶에 깊이를 가져온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성령의 열매 9가지의 브랜드를 ‘생명과 평화의 열매’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뭇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 있다. 고유하고 특별하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인 것이다. 놀랍게도 그 은총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한 선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을 약속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중국인 복음전도자 워치만 니(倪柝聲)는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신앙의 주제로 삼은 사람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중국의 신학자로 세계적 영향을 끼쳤다. 그는 18세 때 회심하였는데, 대학 진학의 기회를 포기하고 오로지 성경 연구와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하였다. <영에 속한 사람>은 겨우 25세의 젊은 나이에 저술한 책이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깊은 학문으로 깨우치는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영적 진리를 깨달으면 겨우 25세에도 진리의 교사가 된다. 그는 오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1930년대에 ‘작은 무리회’ 라는 교회를 세웠고, 그의 사역은 급속히 퍼져 갔다.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작은 가정교회로 시작된 ‘작은 무리회’는 외국 선교 기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이었으며, 많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데 쓰임을 받았다.
심지어 그의 능력을 높이 산 공산주의자들은 그에게 국가의 종교적인 일을 맡기려고 했지만, 워치만 니는 그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쓰임 받기를 거부했다. 그의 신학을 왜곡하여 이단의 논리로 사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그만큼 영의 문제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워치만 니가 훌륭한 것은 그의 영향력 때문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으로 겸손히 살았다. 워치만 니는 그의 깊은 영성과 탁월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중국 사회에서 고유한 교회 운동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성령의 강림은 세계인의 절대 상식을 바꾸어 놓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성령강림을 계기로 겨우 120명의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으나. 그 결과 그들은 세상을 바꾸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하디처럼, 워치만 니 처럼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오직 예수님이 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믿음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 때문에 가능하다.
영에 속한 사람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산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늘 민감하게 분별하려고 한다.
3)
하디 선교사는 1890년에 한국에 와서, 우리 민족의 곁에서 살았다. 하디는 1875년생이니 만 25세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45년 동안 우리나라 복음 역사의 산증인으로 살았다.
초기 선교사들은 앳띤 사람들이었다. 복음의 열정 때문에 신학교를 마치고, 혹은 의대를 졸업하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고 목숨을 걸었다. 그가 전한 복음이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번에 색동교회는 <소설 하디> 공모전에 모두 23명이 참여하였다. 여선교회 10명, 남선교회 10명, 청년 1명, 청소년 2명이다. 젊은이들의 원고를 읽어 보았다.
어떤 친구는 1906년의 시점에서 일기 형식으로 글을 썼다. 자신이 그 시대의 한 소녀가 되어, 그 소녀의 입장에서 말한다.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인가? 그러면서 21세기에 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가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 같아 놀랍다. 신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것이고 한 종교를 믿음으로서 서로 간의 유대가 깊어지게 되는 것 같다. 나는 특별한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집 안 사람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며 남자도 아닌 그냥 작은 여자애일 뿐인데 이 교회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집 안에서는 나도 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있다. 이런 새로운 것들 때문에 내가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또 어떤 친구는 젊은이다운 문제의식으로 글을 썼다. 어린 나이지만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논한다.
“나는 선교사님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악하고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타국에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떠나가시는데,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남의 밥상을 빼앗으면서까지 인생을 누릴 것 다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자기 자신을 챙기기도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급급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소신껏 삶을 가꾸어가는 사람이 있다. 하디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교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광야로 나아간다. 마음속에 많은 불안과 의문을 눌러두고.”
또 어떤 친구는 나는 그다지 독실한 사람은 아님을 고백하며, 그러한 나의 시점으로 이 책을 바라보려 한다고 전제하고 글을 썼다. 이렇게 묻는다.
“아무리 나라가 빼앗겨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지내는 이들. 그리고 이러한 파도를 일으킨 하디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어떠한 울림을 줬을까?”
그리고 자신의 고백적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웟치만 니와 로버트 하디는 모두 20대 중반에 불꽃같은 삶을 선택한 그리스도인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젊은이들의 생각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이 놀랍다.
역사적으로 복음을 따르고, 영적 삶을 찾은 사람들은 힘의 논리, 부의 논리로 종교를 찾은 것이 아니다. 세상의 방식과 다른 영적인 삶, 물질적 논리가 아닌 비움과 내려놓음이란 다른 차원의 삶에 목말라하여 선택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러한 죄성과 죄의 법을 이길 방도는 무엇인가? ‘죄의 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법’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속에 여전히 남아 위력을 발휘하는 ‘죄의 법’,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법은 ‘성령의 법’ 밖에 없다.
성령을 따라 살면 ‘죄의 법’을 이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의 일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때문에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된다. ‘생명과 평화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영적 건강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과 직결된다. 우리는 매 순간 성령의 교제와 은총을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 세상 가운데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성령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으로 일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깊고, 지혜롭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원하는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인답게 회복하라. 늘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라. 성령의 도우심을 빌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사모하며, 그 은총 안에 머물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성령의 선물을 다른 사람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 세상과 역사 가운데 힘써 드러내라.
물질주의, 물성(物性)과 욕망으로 가득한 세속 사회에 살면서도, 그런 영적이고, 거룩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런 삶을 선택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 모두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생명과 평화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