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돌목을 바라보며 손 진 담
지난 토요일 해남 우수영에서 보배 섬 녹진으로 가는 바다 길목의 현수교는 그야말로 장엄했다. 다리아래 울돌목(명랑해협)은 소리 높여 우리 문화 탐방 팀을 반겨주었다. 해남 화원반도와 진도 군내면 사이에 협착부가 형성되었고, 밀물 때에는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이 해협을 통과하다보니 조류의 속도가 초속 5m이상으로 매우 빠르다.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나오는 소리가 하도 엄청나 ‘바다가 운다’는 울돌목이 되었다.
울돌목 일대의 양안에는 거대한 암반들이 노출되어 있다. 비바람에 씻기고 푸른 파도(벽파)에 깎여 풀 한 포기조차 남아있지 못하고 속살이 들어난 곳이다. 녹진 근처의 벽파진을 찾아 암반을 들여다보니 형형색색의 화산 쇄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화산재 응회암 노두를 깎아 돌계단을 만들고 평평한 암반위에는 정자(碧波亭)를 세우고, 최상부에 돌출된 거석으로 엄청난 거북형상을 빚어냈다. 거북등에는 웅장한 이 충무공 전첩비를 세워 진도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있었다.
벽파진 전첩비 앞에서 북쪽바다를 바라보니 세찬 조류가 집어삼킬 듯 흘러가고 푸른 파도가 넘실거린다. 바다라기보다는 급류가 흐르는 강물 같아 벽파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명랑해협 건너에는 해남 황산면 옥매산과 옥동나루터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진도대교가 건설되기 전에는 물류가 이곳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서기 1270년(고려원종 11년) 대몽항쟁 삼별초 부대도 이곳을 거쳐 인근의 용장성에 터전을 잡았고, 수많은 귀양객도 이곳을 지나갔으리라. 1597년 정유재란 시에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대첩 전승지도 이 곳이다.
40년 전 진도 지질조사 차 해남 나루터에서 페리를 타고 이곳 벽파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진도 입성 신고 차 먼저 충무공 전첩비를 찾았고, 노산 이은상이 글을 짓고 소전 손재형이 글씨를 쓴 거대한 비석(높이 3.8m)을 바라보았다. 1959년 가난한 시절에 진도 주민들이 한푼 두푼 성금을 모아 전첩비를 세웠다니 놀랄 일이었다. 조사 일행 중 M연구원은 서예가 소전선생의 외손자라고 해서 모두들 부러워했다. 그의 인맥 덕분에 진도 체류 중 다방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서예가 장전 선생과도 친교를 맺었고, 농협 배의 도움으로 조도와 관매도를 조사할 수도 있었으며, 가정집에서 담근 토속주(홍주)도 맛볼 수 있었다. 그해 겨울 연구소 연말 회식에서 벌어진 전국 토속주 알콜 함량 경연대회에서 전라도 진도홍주(珍島紅酒)가 강원도 태백사주(太白蛇酒)를 누르고 최종 우승한 것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현재 진도대교가 위치한 군내면 녹진과 해남우수영도 조사 당시 인연이 많았던 곳이다. 대교를 건설하기 전 해안 조사에는 소형선이 필요했고 우수영-녹진 간 도선을 자주 이용하다보니 선주 K씨와 친하게 되었으며, 동갑내기라서 말까지 트는 벗이 되었다. 휘영청 달밤에 울돌목에 배를 띄운 체 술 한 잔하면서 ‘생사를 같이하던 전우 야!’를 소리 내어 부르며 우의를 다짐하기도 했다. 1984년 10월 18일 진도대교가 개통되자 도선은 필요 없게 되었으나 녹진 땅값이 치솟아 친구 K는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미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없었다. 명랑해협을 바라보면 그의 흐느낌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다리 건너 해남에도 친교를 맺은 분들이 여럿 있었다. 진도 녹진 바닷가와 해남 우항리 해변에는 검은 세일층이 흰 응회암층과 교호하면서 멋진 장관을 보인다. 검은 셰일층에 기름이 묻어나오다 보니 석유 지질학자에게는 좋은 연구거리가 되어 왔다. 국내에서는 유일한 육상의 기름 층이다. 혹자들은 석유 한 방울도 안 나는 한반도라지만 이곳에는 여러 방울이 관찰되며 왁스(wax)같은 반고체상(半固體狀) 유질물(油質物)이 암석 틈 사이에 관찰되어왔다. 기름 층을 연구하다가 운좋게도 호남에서는 처음으로 대형 공룡발자국 화석도 발견하고, 해남신문 박상일 편집국장을 위시한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어엿한 공룡박물관이 황산면 우항리에 세워져있으니 보람찬 지난 일이었다.
시간이 한정되어있어 오늘의 백미 벽파정을 둘러보며 현판 시문을 감상하였다. 고려 때부터 이조시대에 걸쳐 문인 시인들과 향토 서예가의 합작품이 여러 편 걸려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년 간 귀양살이하면서도 진도의 자연을 끔찍이도 사랑한 노수신(조선 중기 문신. 학자 1515-1590)의 시 한편이었다.
曉月空將一影行(효월공장이열행) 새벽달에 허전히 그림자와 함께 가니
黃花赤葉應含情(황화적엽응합정) 국화꽃 단풍잎이 정을 담뿍 머금었네
雲沙目斷無人間(운사목단무인간) 구름 멀리 아마득히 물어볼 사람 없어
依遍津樓八九楹(의편진루팔구영) 벽파정 기둥 돌며 여다 홉 번 기대었소
-소재(蘇齊) 노수신(盧守愼)이 읊고 청농 문관효가 쓰다.-
칠언절구 한편을 읊조리며 ‘신비의 바닷길’로 이동하는 버스에 승차하였다. 다시 한 번 울돌목으로부터 굉음이 울려 퍼졌다. 1박 2일 잘 놀다 가시라고. 사연 많은 진도를 잊지 말라고.
2019. 4. 20. 진도를 다녀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