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자기결정권이란 능력과는 무관한, 말 그대로의 권리”임을 설명 드리면, 장애인 교육 및 복지 현장에 종사하시는 분들이나 발달장애인 부모님들도 눈을 반짝이시면서 고개를 힘차게 끄덕끄덕 하십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풀이 죽은 표정을 지으며 푸념을 하시곤 합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혼자서 결정한 대로,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는 데 어찌하나요? 원칙은 뭔지 이해가 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러한 장애인 부모님의 말씀 속에는 자기결정권에 대한 또 하나의 흔한 오해, 그렇지만 매우 핵심적인 오해가 존재합니다.
‘자기결정권의 보장’이란 모든 상황에서 어떤 주체가 혼자서 결정한 대로, 그리고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의미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만일 자기결정권을 보장한다는 것의 의미라면, 발달장애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느 누구도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는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은 언제나 여러분이 혼자서 결정한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오셨나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연립(聯立)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이존재(Zwischensein)’인 인간은 무언가 판단하고 결정할 때 늘 혼자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논의를 거듭하며, 그 많은 상담소와 컨설턴트들은 또 왜 존재하겠습니까. 또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늘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남과 상의하지도 않고 혼자서 판단하거나 결정함”을 뜻하는 단어가 ‘독단(獨斷)’인데요, 그것이 늘 바람직하다면 왜 우리가 그러한 누군가를 ‘독단적인 인간’이라는 말로 비판을 하겠습니까.
‘자기결정권’의 실현은 소통, 조율이 필요하다
즉, 자기결정권이란 자기결정을 내리고 있는 여러 주체들이 상호의존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소통을 하고 조율을 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입니다. 그렇기에 자기결정권은 그 실현의 최대치가 아니라, 권리가 부정되지 않는(존중 받을 수 있는) 최저기준을 중심으로 보장되는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활권의 보장 역시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이 살면서 누리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보장해줄 수 없기에 ‘최저생활기준’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맥락은 다르지만, 그래서 그러한 인간다운 삶의 최저기준을 잘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자기결정권의 최저기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정한 결정이 내려질 때 그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관련 당사자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존중하고, 반영하는 과정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판단능력이나 소통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러한 과정이 생략되거나 그러한 과정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정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최종적인 결정은 해당 주체가 지녔던 최초의 의견 및 판단과는 다르거나 변화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기결정권이란 타인의 행복과 이익, 그리고 해당 주체의 행복과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며 일정하게 조율되어 실현될 수밖에 없는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딱딱하기는 하지만 이를 간단한 그래프를 통해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위의 그래프에서 A의 영역은 어떤 주체가 지닌 최초의 의견과 판단이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경우, 그러니까 자기의 행복-이익과 타인의 행복-이익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경우입니다. 반면에 C의 영역은 어떤 주체의 의견과 판단이 “자기의 행복-이익도 침해하고 타인의 행복-이익”도 침해하는 경우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는, 어떤 사람이 자살 폭탄테러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경우를 들 수 있겠지요. 그리고 B는 “너는 좋지만 나는 좋지 않은” 경우, 반대로 C는 “나는 좋지만 너는 좋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이 둘은 자기의 행복-이익과 타인의 행복-이익이 어떤 형태로든 서로 상충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의 경우라면 해당 주체의 의견과 판단은 당연히 별다른 소통이나 조율 없이 그대로 최종적인 결정으로 확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B, C, D의 경우에는 주변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러한 의견과 판단을 수정하는 쪽으로 조율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즉 어떻게 A의 영역에 좀 더 근접한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앞서 자신의 아이가 혼자서 결정한 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푸념을 하셨던 발달장애인 부모님과도 얘기를 나누어보면, 그렇게 내버려두기가 어려웠던 것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었습니다.
발달장애가 있는 K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과 같은 원색 계열을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해 겨울에 빨간색 오리털 파카를 새로 사주었더니 겨울 내내 그 옷만 입고 다니더랍니다. 겨울에야 뭐 굳이 말리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그 옷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는데도 외출을 할 때 계속 그 파카를 입으려 했다는 것이지요. 따뜻한 봄날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입으면 어떻겠습니까? 땀도 나고 덥고 아이가 힘들게 뻔했겠지요. 즉 이 경우에는 굳이 타인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해당 주체의 의견과 판단이 자신의 행복-이익에 해가 되는 경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K는 동그랑땡 반찬을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가족이 다 함께 ‘맛집’이라고 알려진 한 식당으로 외식을 하러 갔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서 밑반찬으로 동그랑땡이 나오는 걸 보더니 K가 손으로 그걸 집어먹으려고 하더랍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결정권의 보장이 중요하다고 그냥 그렇게 집어먹도록 내버려 두기는 곤란했겠지요. 해당 주체의 행동이 타인의 행복-이익에 해가 될 수 있는 경우이니까요.
소통, 조율 과정의 생략은 자기결정 기회를 뺏는 것
사람들이 보통 어떤 발달장애인이 결정한 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결정이 위와 같이 어떤 형태로든 해당 주체나 주변의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라면 그 주체가 발달장애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연히 소통과 조율을 통한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즉 그러한 조율과 수정 자체가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어차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소통과 조율의 과정 자체를 생략하거나, 그러한 과정이 힘들다고 해서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배제된다면 그것은 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자기결정권의 무시나 침해가 반복되고 일상화되면 해당 주체는 자기결정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함으로 인해 점점 더 자기결정의 능력도 발휘할 수가 없게 됩니다. 즉, 우리가 자기결정권을 보장한다는 것의 의미를 오해하게 되면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을 본의 아니게 놓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기결정능력까지 감소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글 | 김도현
김도현 (사)노들 이사이자 한국장애학연구회 정책·실천분과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쓴 책으로 『차별에 저항하라』(박종철출판사, 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 『장애학 함께 읽기』(그린비, 2009)가 있으며,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11)을 우리말로 옮겼다.
출처http://www.broso.or.kr/eletter/view.jsp?brdNum=873&readCnt=1&brdMenuSel=EM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