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특별기획전 도록- 광복 50주년 기념(‘95. 5. 2)
《발간사》
올해는 광복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특히 선열들의 독립운동 관계 연구와 전시를 주요 업무로 하고 있는 독립기념관의 관장으로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직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애국 선열들과 오늘의 감회를 같이하고 싶은 심정 간절합니다.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중경 임시정부청사 복원, 독립운동사 사전 편찬, 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 개최, 특별기획전시회 등 선열들의 업적을 올바로 규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본「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특별기획전」도 이러한 광복 50주년 사업의 일환입니다.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민족 통일을 위한 미래 지표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바른 인식 없이 미래를 조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인식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과업입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잔혹한 식민지 통치였던 사실은 이제 많은 분들이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가 잔혹했다는 논거는 바로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통치에 있어 군사적․정치적 탄압, 경제적 약탈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同化)'하여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消滅)하려고 획책하였습니다. 일제의 한국 식민지 통치가 세계 역사상 유래를 볼 수 없는 잔혹한 통치라고 비판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이러한 일제 식민통치의 잔혹성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리기 위해「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특별기획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 전시회는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전시회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나아가 민족 발전을 위한 올바른 좌표를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1995 . 5
독립기념관 관장 최창규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차지한 후 식민지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을 지구상에서 소멸시키기 위하여 치밀하게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다.
세계 제국주의의 약소민족 침략사에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파괴하고, '동화(同化)'라는 명분아래 한국과 한국인의 존재를 역사무대에서 완전히 소멸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은 다양한 형태로 추진되었으나 대체로 식민주의 교육정책, 역사왜곡(식민주의 사학), 신도(神道)를 비롯한 일본 종교의 침투, 한국어 말살․성명말살(창씨개명), 황민화(皇民化) 노예정책, 문화재 파괴와 약탈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은 초기에는 주로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되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 수탈에 더 비중이 두어졌다. 따라서 민족말살정책의 심도는 더욱 강화되어,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사용하게 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도록 강요하는 등 극단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져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1.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은 이미1906년 통감부 설치시기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일제는 침략의도를 감추면서 '일본은 문명국이고 한국은 미개국'이라는 차별성을 앞세워 한국을 문명화시킨다는 명분아래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식민지정책 중 교육정책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는데 요지는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충량'한 노예로 양성할 것, 일본어를 시급히 교육하여 일본인으로 '동화(同化)'시킬 것, 단순한 기능인을 양성하는 실업교육에 중점을 둘 것 등이었다.
일제는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사립학교를 탄압하면서 그들이 세운 관․공립학교를 중심으로 강압적인 식민지 노예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사들은 칼을 차고 제복을 입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교단에 섰다.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은 '일시동인(一視同仁)',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기만적 이론을 앞세워 한국인의 우민화(愚民化)․노예화․친일화를 획책한 것이었다.
2. 한국역사의 왜곡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은 그들의 한국 침략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고, 한국인의 열등감을 조성하여 독립정신을 근저에서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식민주의 사학은 대체로 타율성론(他律性論)․정체성론(停滯性論)․일선동조론(日鮮同組論)의 세 가지 논리로 정리된다. 타율성론은 한국사회는 고대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출발하였으며 그후의 역사도 계속 식민지적 상황으로 전개되었다는 허황된 논리이다. 정체성론은 한국역사에서는 발전적 역사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1900년대 한국 상황은 일본의 10세기 역사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논리이다. 일선동조론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본래 같은 민족이란 논리로서,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희석시키기 위한 이론이다.
이와 같은 허황된 식민주의 사학 이론들은 역사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비문학적 내용이지만, 한국인에게는 민족 열등감을, 일본인에게는 근거없는 우월감을 조성하였다.
3. 성명말살(창씨개명), 한국어 말살
일제는 1936년 11월 제령(制令) 제19호로써 ‘조선민사령’을 개정하고 1940년 8월 10일까지 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이 성명을 변경하지 않을 경우 사회활동을 할 수 없도록 갖가지 제약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등록 기한 내에 약 322만호(80%)의 한국인이 일본식 성명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철저한 탄압정책에 항거하여 일부 한국인은 자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 대신 일본어를 상용(常用)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1943년 일제는 일본어 보급정책을 더욱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국민학교 부설 일어강습소 개설, 각종 강습회 개최, <국어교본>(일어)의 배포, 잡지에 의한 강습, 1일 1어(語)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4. 일본종교의 침투
일제는 1919년 7월 일본의 천조대신( 天照大信)', 명치천황(明治天皇)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조선신사를 건립하고, 1935년 '조선신궁'이라고 개칭하여 한국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는 그들의 국수 종교인 신도(神道)를 앞세워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1933년 신사(神社)중심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정신운동이 강화되었는데 이후 신사는 급격히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1,141개의 신사가 건립되었다. 1938년에 이르러 일제의 신사보급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조선신궁 외 지방의 각 신사에 애국반 단위로 한인을 동원하여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황국신민서사 제창, 근로봉사 등의 월례 행사를 강요했다. 기독교 등 종교단체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거부한 인사를 투옥하고, 거부하는 학교와 교회는 폐쇄하였다.
일제는 신도 외에도 일본 불교․일본 기독교․천리교를 앞세워 종교적 침략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삼았다.
5. 일제의 황민화 정책
일제는 1910년이래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제는 더욱 가혹하게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구호를 내세워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노예로 만들고자 하였다.
황민화 정책 가운데 '황민화 교육'은 중점사업이었다. 황민화 교육은 일본어 상용(常用), 사상통제 강화, 전쟁에의 동원, 황국신민의 단련 등의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교육 정책은 '황민화정책 월중 행사계획'에 따라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신사참배, 동방요배, 군사교육,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암송, 정오묵도 등을 강요하였다. 이에 불응하는 학교는 폐교되었을 정도로 황민화정책은 폭압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식민지 지배의 일반적 상황 위에 전시체제의 특수상황이 중첩되어 추진된 식민지 약정(惡政)이었으므로 한국인에게는 이중의 큰 고통이 되었다.
6. 문화재 파괴와 약탈
일제는 1910년 한국을 병탄하고 조선총독부 내무부 산하에 '고적조사반'을 설치하고 서울․개성․평양․부여․공주․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산성․고적을 파괴하고 출토문화재들을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가 우리의 전통 문화재를 파괴하고 약탈했던 목적은 우리민족의 찬란했던 문화와 민족사를 은폐하려는데 있었다. 결국 일제의 문화재 파괴와 약탈은 한국사의 왜곡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일제가 약탈해간 문화재는 도자기․불화․회화․서적․불상․석조물 등 모든 종류에 걸쳐 있었다. 일제가 파손한 문화재는 주로 한일관계사에서 일본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제는 1943년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삼아 20개 비석을 파손 철거하였던 것이다.
현재 일본 내에서 한국 문화재를 다소 소장하고 있는 기관으로는 고려미술관․대판 시립 동양도자기미술관․대창집고관․근진미술관․동경 국립박물관․경도 국립박물관․경도대학 도서관․동양문고․궁내 청서릉부(宮內 廳書陵部)․산구현립(山口縣立) 여자대학 등이 대표적이다.
출처:우리역사 바로알기 시민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