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에,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려 하자, 백이(伯夷)가 말을 잡아끌며 간하였고, 무왕이 결국 은(殷)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세우자 백이는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논한다.
백이가 무왕에게 간했다는 사실은 경서에서 보이지 않으니, 이는 제(齊)나라 동쪽 변방 사람의 근거 없는 말이었던 것을 사마천(司馬遷)이 취해다가 사료로 삼은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 책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충분히 논의할 만한 점이 있다.
백이는 이른바 천하의 원로 현인(賢人)으로, 서백(西伯.문왕)이 예우(禮遇)해서 그를 봉양했었다. 그런데 이때를 당해 무왕의 측근들이 그를 병기로 해치려고 했으니, 아, 선왕(先王)이 예우해서 봉양했던 신하이자 천하의 이른바 원로 현인을 면전에서 측근들이 바로 병기로 해치려 하는데도, 무왕은 ‘내가 해치는 것이 아니라 병기가 해친다.’고 여겼으니, 그때 태공(太公)이 아니었다면 과연 백이가 죽음을 면했겠는가?
이전에 이윤(伊尹)은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신을 구렁에 밀어 넣은 것처럼 여겼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 천하에 왕 노릇할 수 있다 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왕의 뜻이기도 했으니, 무왕은 천하에 외치기를,
“상(商)나라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할 터였다. 그러면서도 주(周)나라가 일어날 적에 원로 현인이 제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음은 신민(臣民)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는 또 천하에 외치기를,
“상나라가 노성(老成)한 이의 말을 버리고 듣지 않는다.”
라고 할 터였다. 그러면서도 주나라가 일어날 적에 원로 현인이 그의 불의(不義)를 간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음은 간함을 듣지 않은 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또 그는 천하에 외치기를, “상나라가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
라고 할 터였다. 그러면서도 주나라가 일어날 적에 원로 현인이 제명에 죽지 못했으니, 주나라가 천하를 차지함은 무고한 사람을 죽인 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 세 가지는 바로 무왕 자신이 남을 정벌하게 된 까닭인데, 우둔하게시리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무왕은 갇혀 있는 기자(箕子)를 풀어 주고, 비간(比干)의 분묘를 봉해 주고, 상용(商容)이 살던 마을에 경례(敬禮)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백이에게만은 유념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예우해서 봉양하기를 문왕이 하듯 해야 했고, 그가 떠나간다면 신하로 보지 않기를 기자에게 하듯 해야 했고, 의롭게 여기고 표창하기를 상용에게 하듯 해야 했고, 그가 죽으면 분묘를 봉해 주기를 비간에게 하듯 하는 것이 옳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탕과 백이와 무왕은 도를 같이하니, 천하 후세를 우려한 것이었다. 탕이 걸을 내쫓자 천하가 얼굴을 펴 좋아하고 아무도 괴이하게는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탕은 우려하여 말하기를,
“나는 후세에 나를 가지고 구실을 삼을까 두렵다.”
라고 했다. 무왕이 탕의 방식을 따라 행하자 천하가 또 얼굴을 펴 좋아하고 괴이하게는 여기지 않으니, 그 후세를 위한 우려가 참으로 커서였다. 그러니 백이가 무왕을 그르다고 한 것은 그 거사(擧事) 자체를 그르게 여긴 것이 아니고, 그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며, 무왕이 백이를 봉하지 않았던 것은 그를 잊어서가 아니고, 그 의리를 드러내려 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후세 천하를 위해 우려함은 마찬가지였다.
아, 그를 예우해서 봉양함도 후세에 의리를 밝히질 못할 것이고, 그를 표장함도 후세에 의리를 밝히질 못할 것이고, 그를 신하로 보지 않음도 후세에 의리를 밝히질 못할 것이고, 봉해 줌도 백이를 후하게 대우하는 일이 못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