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懷古) - 추풍령 높은 고개 마루
송 영 기
시조시인, 글로벌뉴스통신 기자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높은 고개 기적도 숨이차네
내 고향 뒤에 두고 정든사람 뒤에 두고
주름진 그 얼굴에 눈물이 서렷구나
추풍령,추풍령아 변함없이 잘있거라.
1. 이것은 '추풍령' 노래 가사가 아니다.
나는 추풍령 출신이다. 내가 추풍령중학교 1학년 때 상영된 김진규 주연의 '추풍령(秋風領)' 영화는 고향에 관한 것이므로 당시 추풍령중학교 김기석(金基奭) 교장 선생님과 각 반 담임 선생님의 인솔하에 완행열차를 타고 소풍가듯 김천(金泉)에 내려가 김천역 근처 아카데미 극장에서 단체 관람을 한 추억이 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란 영화 역시 그렇게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65년 그 때 발매된 LP 레코드 자켓에는 철길 고역군 역의 김진규 배우가 곡갱이를 어깨에 메고 끝없는 철길을 넘어가는 지친 모습이 멀리 추풍령 산하 풍경과 함께 퍽 인상적이었다. 당시 판매된 레코드판에 취입 녹음된 '추풍령' 노래를 남상규 가수가 부르기 전 먼저 이 대사(臺詞)가 흘러 나온다. 그 때 영화는 촬영시 동시 녹음한게 아니듯, 대사 역시 가수가 아닌 성우 이창환씨가 맑고 구성진 목소리로 읊어 듣기에 퍽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어느 모임에서나 늘 회식때는 추풍령 출신 아이덴티티(Identity)로 이것을 크게 읊고나서 '추풍령'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노래방 기계에서 반주 음악이 분위기를 잡아 주지만, 당시는 음식점에서 회식 할때면,빈 술병에 숫가락 하나를 마이크처럼 꼽고 부르는 즉석 노래였기에 그런 여유와 순박한 맛이 있었다.
2. 내 고향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관리(忠淸北道 永同郡 秋風嶺面 官里)
추풍령(秋風嶺)은 충청북도에서 제일 남쪽 끝인 영동군(永同郡)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단위 소재지이고, 추풍령 고개(해발221m)는 추풍령리 당마루에서 김천시 금릉군 봉산면으로 넘어가는 완만한 경사지로 서울부산으로 통행하는 1번 국도와 경부선 철도,경부고속도로가 겹쳐 있는 교통 요충지이다. 추풍령 고속도로의 휴게소 기념탑 공원에 서면 사방 일대를 잘 조망할수 있다.
충북 남단 아랫쪽에 위치한 오늘날 영동군(永同郡)은 신라초까지 길동군(吉同郡) 이라 했다. 길동(吉同)은 '긴, 길다'의 이두식 표현, 영(永)은 '길' 을 훈차하여 신라 경덕왕(757년)때 길동군이 영동군(永同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현종 9년 상주군(尙州郡)에 속했다. 그러다 조선 태종 13년에 경상도(慶尙道)에서 충청도(忠淸道) 로 관할이 바뀌며, 현감(縣監)이 다스리는 현급(縣級)의 고을이 되었다.
그후 1895년 5월 26일(고종 32년)에 군(郡)으로 승격하여 영동군(永同郡)이 되고, 영동군은 1914년 3월 1일 부령에 따라 황간군,옥천군,경상도 상주군 일부(一部) 지역(黃金面 추풍령)이 영동군에 합병되었다(총 11개면) 이후 영동군은 2004년 4월에 '5월 26일' 을 '영동군민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 행사를 하고 있다.
3. 거듭한 행정구역, 관할, 명칭 변경
영동과 황간,추풍령(황금면)은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폐현(閉縣),합현(合縣),복현(復縣),속현(屬縣) 을 거듭하였다. 황간현은 고려 현종때와 공민왕 때 경상도 경산부 (京山府,慶北 星州)에 소속되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충청도(忠淸道)에 예속되었다.
추풍령은 1759년(英祖 35년)에 행정구역이 황금소면(黃金所面)으로서 경상북도 금산군(金山郡) 소속이었다가, 1906년(高宗, 光武10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경북 금산군(이후金陵郡)의 황금소면(黃金所面)을 황간군(黃澗郡)
에 편입시켰는 데, 1909년(純宗.隆熙3년)의 황간군 행정구역 6개면에 황금소면 19개 동리가 보인다.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황금소면(黃金所面)은 황금면(黃金面)이라 개칭되고, 황간군 에서 다시 영동군(永同郡)에 편입되었다. 그때 황간군 오곡면(梧谷面)의 일부와 경북 상주군 공서면의 일부가 황금면에 병합되니, 황금면에는 9개 법정 동리 36개 자연마을이 있었다.
이후 1991년에 황금면(黃金面)은 추풍령면(秋風嶺面)으로 또다시 개칭된다. 이는 1965년 '추풍령' 영화와 영화 주제가 '추풍령' 노래의 대중적인 인기 상승그리고 경부고속도로 개통에 따른 추풍령 휴게소 개장(1971년)등 으로 추풍령이 황금면 보다 전국적인 지명도가 훨씬 높아 졌기 때문일 것이다.
1904년에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역인 추풍령에 경부선(京釜線) 추풍령역(驛)이 개설되었다. 역(驛)의 시초는 말(馬)을 갈아 타는 추풍역(秋風驛)이 설치된 고려시대 때 부터 였다. 『대동여지도』에 "추풍령(秋風岺)과 추풍역 (秋風驛)"이, 『조선지지자료』 (황간)에 "추풍역(秋風驛)이 황금소면(黃金所面)에 있다" 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그 역(驛)이 추풍령면 관리(官里)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은 관리를 '역마(驛馬)'라고 불렀고, 관리 뒤에 있는 마을은 '뒷마(後里)' 라고 한다. 관리(官里)에는 후리(後里), 원관리(元官里, 驛馬), 학동(鶴洞) 세
자연부락이 있다. 추풍령은 오늘날 경부선 철도와 국도, 경부고속도로 3개 선(線)이 함께 고개마루를 지나가는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충지이다.
4. 지역 명칭 유래
충북 영동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추풍령(추풍령면)은 경상북도 북부 경계지점에 있어 경상도 말을 쓰고 억양이 강한 편이다. 추풍령면 직전 명칭인 황금면(黃金面)의 황(黃)은 황간(黃澗)의 첫글자와 경상도 금산군(金山郡)의
첫글짜 금(金)에서 각각 따 황금(黃金)으로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금산(金山)은 추풍령 고개마루에 있는 백두대간의 금산(錦山,옥녀봉)을 말한다. 지금은 아담했던 금산이 1968년부터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과 고속철도용
자갈 공급용으로 채석장을 운용하면서 금산의 서쪽 반이 채석으로 인하여 행태가 크게 파괴 훼손되어 그만 반쪽 산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황금소면(黃金所面), 황금면(黃金面)의 지명이 추풍령 사부리(沙夫里) 골짜기에 있는 작은 마을 황보(黃寶) 와 금보(金寶)에서 첫 글짜를 차용했다는 설도 있다.
추풍령에서 약 20리 떨어져 인접한 황간(黃澗)은 신라 때 소라현(召羅縣)으로 불리다가, 경덕왕때 황간현(黃澗) 이라 개칭되고 영동군에 속하게 된다. 소라현(昭羅縣)이라는 이름은 현청이 위치한 광평리(廣坪里) 마을 앞을
흐르는 소라천(召羅川)에서 연유되었다.
5. 추풍령 고개 마루
추풍령(秋風嶺)은 조령(鳥嶺), 죽령(竹嶺)과 함께 삼령(三嶺)으로 경상도 사는 이들이 한양으로 올라갈 때 반드시 거치는 고갯마루 중 하나 였다. 추풍령은 역참(驛站)에 역마(驛馬)가 있어 관원(官員)들이 이용하는 길이었지만,
가을 바람이 불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는 불길한 생각에 과거시험 보러 가는 영남 선비들은 추풍령을 통해 한양 가기를 기피하여 평소 장삿꾼들이 주로 이용하는 황악산 옆 괘방령(掛榜嶺)이나 문경 조령 길로 돌아 갔다.
그래서 추풍령은 가을에 풍년이 든다는 '추풍(秋豊)' 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정홍채 노인에게서 학생 시절에 들은 적이 있다.
가믐이 심한 농사철에 추풍령을 지나온 관원에게 임금이 ' 추풍령 고개에 메밀꽃이 어떠하더냐'는 하문(下問)에 답하길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들판이 눈 내린듯 하얗습니다.'고 하면, 그 해는 가뭄이 없고 풍년이 들겠다고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풍령은 ' 메밀꽃 핀 흰 고개 '라는 뜻으로 '백령(白嶺)' 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 이중환의 택리지(擇理志)에 추풍령은 " 령(嶺)이라 하였으나 실상은 령(嶺)이 아니고 평평한 들이다. 산(山)은 많다하여도 그리 크지 않고 또한 그리 평평하지도 않다. 그리고 암석과 봉우리가 모두 윤택하고 맑은 기색을 띄우고 시내사이의 맑음도 사랑할만하며 조악하고 성급한 기상이 없다 "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추풍령상 춘초기(秋風嶺上 春草奇)란 시구절이 말하듯 해마다 돋아나는 ' 추풍령 고개마루에 봄풀도 기이하다' 고 할까.
6. 추풍령의 산과 물길
추풍령은 동서남북 4방향으로 도로가 나 있고 나머지는 산으로 막혔다. 동쪽에 마암산(馬岩山 371 M), 서쪽에 봉대산(654 M), 남쪽에 선개산(仙蓋山 743 M), 북쪽에는 학무산(鶴舞山 682 M) 지장산(773 M)이 있다.
동남방에 금산(金山 385 M)과 관리(官里) 앞에는 안산(案山)격인 작은 동산이 있는 데 이름은 없다. 물길은 북쪽 웅북리 신안리(新安里)에서 흘러 지봉리 학동, 관리, 사부리, 계룡리와 황간 광평리 앞 마을 소라천을 지나 월류봉 초강천(草江川) 과 만나 서쪽으로 가다가 심천에서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 간다.
그리고 추풍령 금산 아랫녁 당마루, 대평리(大坪里)와 경북 금릉군 봉산면 광천에서 내리는 직지사천이 흘러서 경북 김천의 감천(甘川)과 만나 상주에서 내려오는 낙동강(洛東江)과 합류하여 멀리 남해 바다로 간다.
추풍령은 내륙 중부와 남부를 가르고, 물길이 금강과 낙동강으로 나누어 지는 분수령(分水嶺)이며,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분기점이다.
그래서 속리산 아래 화령재(和嶺)와 추풍령은 백두대간 길이지만 크게 높은 산이 없으므로 지리지(地理誌)에서 이 구간을 " 백두산에서 내려오던 기(氣)가 덕유산,지리산까지 뻗어 나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곳 " 이라 했다.
7. 금산 (金山 - 錦山, 玉女峰)
추풍령 저수지 앞 백두대간 길 차령산맥의 경계에 있는 금산(385 m)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자로 "金山" 으로 표기되어 "금산" 으로 불렀는 데, 한글표기를 시작할 때 " 김산 " 이되고, 또한 김천(金泉)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김천이 시(市)로 승격 되기 전의 금릉군(金陵郡)지명도 또한 그런 연유라 한다. 금산(金山)은 ' 옥녀(玉女)가 빗으로 긴 머리를 빗는 형상'이라 일명 옥녀봉(玉女峰)이라 했다. 따라서 비단금(錦) 자(字)를 쓰는 금산(錦山)이기도 하다.
8. 선개산(느름산 - 눌의산)
추풍령 남쪽에 있는 선개산(仙蓋山)은 형국(形局)이 선인독서(仙人讀書)로 ' 탈을 쓴 신선이 도포를 입고 앉아 책을 읽고있는 형상'이라고 하며, 일명 느릅산(느름산)이라고도 한다. 그 연유는 천지개벽 할때 추풍령 일대가 모두 물속에 잠겼으나, 선개산 상봉의 산봉우리 두개(형제봉)만 물속에 잠기지 않아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느릅나무 잎사귀 2개가 물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가 태어난 마을 학동(鶴洞)에 살 때 나의 조부는 여름날 선개산에 비가 올려고 하면 " 영고(필자의 아명)야, 느름산에 비 지나간다."고 말하곤 해서, 산을 보면 할아버지가 생각나고 그 때가 그립다. 하여 멀리 남쪽으로 보이는 느름산의 느릅나무 유(楡)자, 멧산(山)자를 따서 '유산(楡山)' 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그런데 선개산(仙蓋山,느릅산)은 지도에 공식 산이름이 눌의산(訥誼山, 743M)이라 되어 있다. 이 고장에서는 모두들 선개산이라 하기 때문에 눌의산은 생소하다. 추풍령중학교 교가에도 ' 선개산 높은봉에 흰구름 걸려, 배움의 전당에 평화를 주고, 금강에 기린 물은 쉼없이 흘러' 라고 했다. 당시 추풍령초등학교 교가에서도 역시 "선개산 영봉에 흰구름걸려' 라 노래 했다. 그러나 타지에서 오는 등산객들은 지도에 표기된대로 눌의산으로 안다. 그 선개산 기슭에는 은편리(銀片里)라는 마을이 있는 데, 가을 바람에 콩 잎이 흔들리며 옆으로 누으면,
마치 종이 돈을 세아리는 것 같다하여 동네 이름을 은조각(銀片)이라 했다는 것이다. 선개산 (눌의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봉화(烽火)가 올랐던 봉수(烽燧)터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봉수는 경상도 금산군 고성산(高城山) 과 영동현 박달산과 서로 호응하였다.
9. 마암산(운수봉) 과 학무산
추풍령 동쪽에는 갈마음수(渴馬飮水) 즉 ' 목마른 말이 추풍령 저수지(黃金池) 물을 마시는 형상' 으로 말 안장 닮은 마암산(馬岩山)이 있고,이 산 중턱에 작은 사찰 보광사(普光寺)가 있다. 그 기슭에는 추풍령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리고 마암산 정상 봉우리를 운수봉(雲水峰)이라 불렀다.
마암산 말머리 방향 아래에 있는 금마동(錦馬洞)을 예전에는 '말바우'라 했는 데, 나의 조부는 장날 추풍령리 장에 갈때는 꼭 ' 말바우에 간다 '고 말했다. 추풍령 북쪽에 있는 학무산(鶴舞山 678 M)은 학이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가는 형상이고, 그 산 아래에 지봉리(地鳳里)라는 큰마을이 있다. 지봉리 아래 쪽에는 '살구지'라고 일컫는 행동(杏洞) 작은 마을이 있으며, 그 앞 신작로 개울가에는 둥구지(洞口亭)라 부르는 다리가 놓인 마을에 물레 방앗간, 부억에 묻어둔 옹기에서 바가지로 퍼 한사발 막걸리 잔술을 파는 얼굴이 퉁퉁한 할머니 주모가 있는 선술집,국수를 뽑는 국수집 등이 있었다. 여름이면 커다란 밤나무 그늘이 시원하고, 도랑에 흐르는 물소리가 맑았는 데, 때로는 군청 공보실에서 상영하는 홍보 계몽 영화나 대한뉴스도 일찍 저녁을 먹고 할아버지 따라가서 밤에 볼 수 있었다.
학무산 왼쪽 정상에 무선전신 중계소가 1964년경에 세워졌는 데, 필자가 중학생 일때 우리 동네(後里 - 학동에서 이사 간 동네)에 살며 그곳으로 출퇴근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밤중에 근무 교대하러 올라가면 호랑이가 이따금 웅크리고 앉아 있더라. 무서워 다른 근무자를 멀리서 소리쳐 불렀다. 곧 불을 밝혀 나오면 그때사 호랑이가 어슬렁 거리며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간다고 말이다.
그래서 인지 새마을 사업으로 전기불이 들어오기 이전에 학무산 아랫 마을 지봉리에 끝집에 호롱불을 걸어 놓은 불빛을 멀리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릴때 살던 학동(鶴洞) 마을에서 저녁먹고 마실 나와 바라보면 어두운 밤중에 불이 보여 으쓱했었다. 호랑이가 혹간 내려와 동네 개를 물고가는 것을 막고자 함인데, 호랑이는 제몸의 털을 태울까 불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면, 지금은 왜 호랑이가 우리나라에서 멸종 되었다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학무산 너머 백두대간 깊은 산골짜기 어디쯤에는 아직 범이 살아 있을것이라 믿는다.
10. 학동 마을
그 무렵 학동 마을 앞 운수봉 기슭 소나무 숲에는 하얀 학(鶴)들이 수두룩하게 앉아 마치 눈이 소나무 위에 내려 쌓인 듯 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근처에 벽돌공장을 지어 벽돌 굽는 연기로 인하여 그 많던 학들은 서식지를 옮겨 어디론지 다 날아가 버렸다. 마을 앞산에 학이 새끼치며 살아서 동네 이름이 학동(鶴洞)이다.
뿐만 아니라 마을 둑방에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어 비가 오거나 여름날 바람이 불면 잎사귀 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좋았었지만, 성냥 만든다고 베어 없어지니 그런 정경도 사라졌다.밤이면 집뒤 방뚝에서 늑대와 여우가 내려와 앙앙 울었고, 내가 살던 작은 초가집은 동네 끝집(뒷집)이라 우리집 뒤에 있는 시냇방둑위에는 캄캄한 밤이면 진등끝티 산에서 여러 짐승들이 내려와서 모여 울었다. 저녁먹고 어둑하면 밤손님(호랑이)이 내려 온다고 할아버지가 사립문을 일찍닫았고, 초롱불만 사용했으니, 밤에 마당 귀퉁이에 있는 화장실도 무서워 혼자 갈수 없었다.
그 때는 태어나 일찍 죽는 아이도 많았고, 어른들의 평균수명도 60세 전후 였으니, 밤에 모이면 도깨비나 귀신 이야기를 많이 해서, 어둡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밤은 더 무서웠다. 더우기 상여를 보관한 곳을 밤에 지나갈 때는 머리가 쭈볏했다.
여름날 먼산에 도깨비 불(인)이 흐르고 부엉이가 울며 산속에 엄마와 나물 뜯는 데 가면 소쩍새 울고, 컹컹 장끼가 푸더덕 갑자기 날아 오르면 놀라고, 뻐꾹새가 푸른 봄 산에서 뻐꾹 뻐꾹 온 산을 울렸다. 무논 푸른 벼 위에 반딧불이 여기 저기로 깜빡이며 날아 다녔다. 마당 가득 고추 잠자리 날고, 매미나 나비를 잡아 채집하고, 벼익은 가을 들녁에 나가 메뚜기 잡고, 이른봄 맑은 바람부는 푸른 창공에 종달새가 요란히 울며 오르락 내리락 했던 고향 마을이 이제는 다 흔적 없이 변했다.
개구리 소리 요란하고 멍석 깔고 쑥대로 모기불 피운 마당에 누워 밤 하늘을 보면 무수히 가득한 별이 쏟아지고 북두칠성 견우 직녀성 은하수가 하늘 바다를 이루었다. 비가 오거나 운무가 드리워진 논에서 능구렁이가 황소가 울듯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저 소리가 들리 않느냐, 잘 들어봐라 "고 엄마는 내게 말했다.
한번은 학동 초가집 우측 처마 밑 황토 흙벽에 비가 온후 안개가 서린 날 누런 큰 구렁이가 슬슬 기어 올라가다 멈춰 쉬고 있어 내 조부는 나를 불러 " 우리집 업이다" 라면서 헤치거나 놀라지 않게 조용히 멀리 서서 어린 내게 기꺼이 보여주었다.
11. 정겨운 마을 이름(舊 洞名)들
공식적인 한자로 된 고향의 지명/마을 이름이 일상 생활에서는 순 우리말로 아래와 같이 일컬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내 조부와 엄마는 늘 어디 어느 동네를 간다고 할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바우(馬岩 - 추풍령리), 역마(驛馬-官里), 뒷마(後里, 后里),살골(杏洞), 둥구지(洞口亭), 까끼미(角金), 반고개(方峴洞), 사기점골(沙器店), 반진개(半樹里), 패구지(敗舊陳, 沙夫里),진산비(金寶), 황갖비(黃寶), 검바우(儉岩里), 저실(檜谷里),갱핑이/갱피(廣坪里, 너분들), 곰뒤(熊北里), 각골(角谷), 구리기(九洛里), 개고개, 도치래이, 모산(池山), 장똥(雀洞), 느름산(느릅산), 샛들(新坪里), 핏들(勿閑里), 도라이(돌아리), 쑥다리(艾橋里, 애교리), 버드실(柳谷里), 다릿골(橋洞)등이다.
이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다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장황하지만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물론 영동향토사 연구회지나 향토문화연구회지에는 수록되어 있다 하여도 일반적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봐도 의미가 없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것이다. 세상은 변했고 세월은 빠르다. 그 때 아이가 어른이 되어 회고하고 있다.
(* 참고문헌 : 永同의 縣 ·邑誌, 鄕土文化硏究誌 - 永同鄕土史硏究會刊, 梵如의 세상사는 이야기-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