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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과 척준경이 궁궐을 불태우다
일자
1126년 02월 26일 (음) 임술(壬戌), 1126년 03월 21일 (양)
임술. 여명(黎明)에 서화문(西華門)에 이르러 문을 두드려 들어가기를 청하자 지녹연이 줄로 그를 올려주어 왕의 곁에서 모시게 되었다. 척준경이 척준신 무리의 시신을 보고는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 이지보(李之甫)·최식·이후진·김정황(金鼎黃)·조순거(曹舜擧)·윤한·문중경(文仲經) 등과 함께 군졸을 불러 모으고 군기고(軍器庫)에 들어가 갑옷과 투구와 병장기를 취하고 나아가 승평문(昇平門)을 에워쌌다. 이자겸의 아들인 승 의장(義莊)이 현화사(玄化寺)에서 승 300여 인을 거느리고 궁성 밖에 이르렀다. 궁 안에 있는 자는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활과 화살을 쥐고 자성(子城)의 문 위를 나누어 지켰다.
왕이 신봉문에 임어하여 황산(黃傘)을 펼치니, 척준경의 군졸이 멀리 바라보고 늘어서서 절하고 기뻐하며 만세를 외쳤다. 왕이 시켜 묻기를, “너희 무리는 어찌하여 병기를 가지고 이른 것이냐.”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이르기를, “듣기를 적이 궁궐 내에 들어갔다고 하니 사직을 보위하기를 청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짐 또한 탈이 없으니 너희들은 갑옷을 풀고 흩어져 돌아가도 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내탕(內帑)의 은과 비단을 매달아 내려 군졸에게 하사하고 시어사(侍御史) 이중(李仲)과 기거사인(起居舍人) 호종단(胡宗旦)으로 하여금 군사에게 선유(宣諭)하여 갑옷을 벗고 병기를 던지도록 하였다. 척준경이 노하여 칼을 뽑아 이중 등을 쫓아내고 군졸들로 하여금 다시 갑옷을 입고 병기를 잡도록 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니 혹 빗나간 화살이 임금의 앞에 이르기도 하였다. 의장의 무리는 도끼로 신봉문의 기둥을 찍었는데 누각 위에서 승을 쏘아 그 머리를 뚫으니 즉사하였다.
이자겸은 합문지후(閤門祗候) 최학란(崔學鸞)과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소억(邵億)으로 하여금 궁문에 이르도록 하여 상주하여 이르기를, “청컨대 궁궐 내에서 난을 일으키는 자를 내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궁중이 놀라 동요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이 심히 불손하여 왕이 말없이 잠잠하였다.
내시(內侍) 박심조(朴深造)라는 자는 박승중(朴昇中)의 아들인데 궁의 뒷간으로부터 나와 옷이 똥물로 흠뻑 젖은 채로 곧장 이자겸의 사저에 이르러 궁중의 사정을 고하였다.
이자겸이 의관을 주어 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척준경이 소억을 보내 이자겸에게 알렸는데 이르기를, “오늘 해가 저물면 적이 밤을 타고 몰래 나타날까 염려가 되니 그들이 미처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궁문을 불사르고 색출하여 사로잡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이자겸은 이지미로 하여금 평장사 이수 등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이르기를, “궁궐은 서로 나란히 있으니 불길이 번져나가 꺼지지 않을 수 있어 두려우니 심히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척준경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부감(少府監)의 황회목(黃灰木)과 장작감(將作監)의 나무 막대를 모으고 동화문(東華門) 행랑에 쌓아 불을 질렀다.
바람이 불길을 부채질해 활활 타올라 순식간에 내침(內寢)까지 미치게 되니, 궁인은 모두 놀라서 숨었다.
해가 저물자 척준경과 이지보는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병사 100여인을 거느리고 춘덕문(春德門)에 이르렀다.
문을 지키던 내시(內侍) 이숙신(李叔晨)이 문을 열고 그들을 들여보냈다. 척준경이 좌액문(左掖門)으로 들어오자 전 금위별장(禁衛別將) 이작(李作)과 장군(將軍) 송행충(宋幸忠)이 칼을 빼어들고 그를 쫓아오니 척준경은 급히 퇴각하였고 이작은 손으로 문을 닫았다.
척준경이 사람을 보내 여러 문을 지키도록 하고 명령하며 이르기를, “안으로부터 나오는 자가 있거든 즉시 죽여라.”라고 하였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진(金縝)은 숙직실에 있었는데 불이 닥쳐오는 것으로 보고 말하기를, “나는 평생 고지식하고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이자겸·척준경과는 틈이 있었다.
나가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인데 적의 손에서 죽는 것은 자진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종자를 시켜 문을 닫고, 불에 타 죽었다. 밤에 왕이 산호정(山呼亭)으로 걸어가 탄식하며 이르기를 “김인존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
시종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근신 임경청(林景淸) 등 10여 인만 있었다. 왕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 글을 작성하여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였다.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논의가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수가 앉은 자리에서 큰 소리로 말하며 이르기를, “주상께서 비록 조서를 내리셨다고 해도 이공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자겸의 뜻이 드디어 꺾이어 눈물을 흘리며 서신을 돌려주며 이르기를, “신에게는 두 마음이 없으니, 오직 왕께서 이를 헤아려주소서.”라고 하였다. 홍립공(洪立功)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장군 유한경(劉漢卿) 휘하의 중랑장(中郞將)이었다.
이자겸이 유한경을 궁궐에 들여 보내 곧 홍립공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삼고는 그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척준경의 지휘를 따르도록 하였다. 척준경이 홍립공으로 하여금 군졸 60여인과 섶을 매고 도성 남쪽 길에 이르도록 하였다. 홍립공이 군졸에게 비밀리에 이르기를, “나와 너희들은 모두 왕의 신하인데 땔나무를 등에 지고 궁궐을 불사르는 것은 신하의 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지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선교문(宣敎門) 구멍을 통해 들어가 멀리서 바라보며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왕이 놀라 묻기를, “너는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홍립공이 앞에서 스스로 진술하였다. 왕은 심히 기뻐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고 이때부터 숙위하며 떨어지지 않았다.
계해. 여명에 왕은 화염이 거의 닥치자 나가고자 하였다. 때마침 이자겸이 승선(承宣) 김향(金珦)을 보내어 나와서 남궁으로 임어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걸어서 경령전(景靈殿)에 이르러 내시 백사청(白思淸)에게 명하여 조종의 어진[神御]을 받들어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있는 마른 우물 안에 넣어놓도록 하고 곧 서화문을 나가 말을 타고 연덕궁(延德宮)에 이르렀다.
오탁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척준경은 낭장(郞將) 장성(張成)으로 하여금 칼을 빼어들고 돌입하도록 하여 오탁을 잡아 참수하고 또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최탁·권수·고석·유한경·송행충·이작·안보린 및 대장군 윤성(尹成)·한경(韓景), 장군 박영(朴英)·송인(宋仁)·사유정(史惟挺)·오정신(吳挺臣), 낭장 이유(李儒), 내시 최잠(崔箴), 원외랑(員外郞) 박원실(朴元實) 등을 잡아 모두 죽였다. 홍관은 늙고 병들어 잘 다닐 수 없어 마지막으로 서화문 밖으로 나오자 척준경이 시켜 그를 죽였다.
그 나머지 군사로서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내시 봉어(內侍 奉御) 왕관(王觀), 대장군 윤선(尹先), 낭장 정총진(丁寵珍), 별장(別將) 장성호(張成好)는 남궁에서 시종하고 있었는데 이자겸이 그들을 내보낼 것을 재삼 청하자 왕이 부득이 이를 따르며 사람을 시켜 죽이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이지보가 그들을 모두 죽였다.
이자겸은 또 척준경과 함께 의논하기를, 난이 일어난 날에 숙직한 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자고 하였으나 이수가 불가하다고 고집하자 곧 중지하였다. 장군 이록천(李祿千)·김단(金旦)·김언(金彥)은 도망쳐 숨어서 면하였다.
이날 궁궐이 불타버리고 오직 산호정(山呼亭)·상춘정(賞春亭)·상화정(賞花亭)의 세 정자 및 내제석원의 낭무(廊廡) 수십 칸만이 겨우 보존되었다. 백관은 낭패하여 달아나 흩어졌는데 직사관(直史館) 김수자(金守雌)만이 홀로 국사(國史)를 짊어지고 산호정 북쪽에 이르러 땅을 파 이를 숨겨 다행히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을 면하였다.
이지보는 순천관(順天館)에서 지녹연을 결박하고 참혹하게 대하여 거의 죽게 되자 윤한으로 하여금 압송하여 먼 곳으로 유배 보내었는데 충주(忠州)에 이르러 병들어 일어날 수 없었으나 기백은 오히려 끊어지지 않자 윤한이 사지를 절단하여 길 옆에 매장하고 돌아왔다.
김찬은 먼 곳으로 유배 보내고 김찬 및 지녹연의 처자는 모두 적몰하여 외관의 노비로 삼았다.
오탁의 아들 오자승(吳子升)과 고석의 아우 고보준(高甫俊)은 도망쳐 북산(北山)에 숨었기에 박영(朴永)으로 하여금 그들을 추적하게 하였다. 吳卓子子升高碩弟甫俊奔匿北山, 使朴永跡之.
고보준 등은 높은 바위에 올라 박영을 꾸짖으며 이르기를, “이자겸 등은 총애를 훔쳐 권력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백성에게 해악을 퍼뜨리는 것이 승냥이와 호랑이보다 심하였고 장차 종묘와 사직을 뒤엎으려 하였는데 너희들은 모두 간사하게 아첨하여 그를 섬기니 이미 노비[奴隷]만도 못하다. 우리는 의를 일으켜 우리 백성에게 보답하려 하였는데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의로운 자가 어찌 너희 종놈의 손에 의해 죽겠는가.”라고 하였다.
곧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다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 지녹연은 지채문(智蔡文)의 증손으로, 재간이 있다고 칭송되었다.
갑신년(1104)에 여진 토벌에 따라가 자못 공이 있었다. 사람됨은 거칠고 방자하였으며 학술이 없었고,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일컫었으나 꾀가 옹졸하여 반대로 빠져 화를 당하였다.
홍관은 당성군(唐城郡) 사람으로 학문에 힘썼고 글씨를 잘 썼다. 김진은 일찍이 영광(靈光)을 다스리고 청주(淸州)를 다스렸는데 모두 선정으로 명성이 있어 당시의 사람들이 공경하여 모셨다.
일자
1126년 02월 26일 (음) 임술(壬戌), 1126년 03월 21일 (양)
壬戌. 黎明, 至西華門, 扣扉請入, 祿延使縋上之, 因侍王側. 俊京見俊臣輩屍, 恐不免, 與之甫崔湜李侯進金鼎黃曹舜擧尹翰文仲經等召聚軍卒, 入取軍器庫甲牟兵仗, 進圍昇平門.
資謙子僧義莊自玄化寺率僧三百餘人, 至宮城外. 在宮內者無敢出, 但持弓矢, 分守子城門上. 王御神鳳門, 張黃傘, 俊京軍卒望見, 羅拜懽呼萬歲. 王使問, “汝輩何爲操兵而至.” 對曰, “聞有賊入禁中, 請衛社耳.”
王曰, “無之. 朕亦無恙, 汝等可釋甲散去.” 遂縋內帑銀幣, 下賜軍卒, 令侍御史李仲起居舍人胡宗旦宣諭軍士, 解甲投兵. 俊京怒, 拔劍逐仲等, 令軍卒復擐甲執兵, 大呼, 或有流矢及御前. 義莊之徒以斧斫神鳳門柱, 有自樓上射僧, 中其頭卽斃. 資謙使閤門祗候崔學鸞都兵馬錄事邵億至宮門, 上奏曰, “請出禁中作亂者. 不爾, 恐驚動禁中.” 言甚不遜, 王默然.
有內侍朴深造者, 昇中之子也, 自宮溷中出, 衣上矢汁淋漓, 徑至資謙第, 告宮中事狀. 資謙贈衣冠, 勞慰之. 俊京遣邵億謂資謙曰, “今日向晩, 恐賊乘夜竊發, 及其未發, 焚宮門, 索擒, 如何.” 資謙使之美以問平章事李壽等,
答曰, “宮宇相比, 恐延燒不可撲滅, 甚不可也.” 俊京不待報, 取少府監黃灰木將作監木橦, 積東華門廊火之. 風焰扇熾, 須臾, 延及內寢, 宮人皆驚駭藏匿. 及晩, 俊京之甫被甲上馬, 率兵百餘人, 至春德門. 守門內侍李叔晨開門納之.
俊京入左掖門, 前禁衛別將李作將軍宋幸忠拔劍逐之, 俊京奔退, 李作手闔門扉. 俊京差人守諸門, 令曰, “有自內出者, 卽殺之.” 知樞密院事金縝在直廬, 見火逼, 乃曰, “我平生拙直, 不畏强禦, 與李拓有隙. 出必遇害, 與其死於賊手, 不如自盡.” 乃使從者閉戶, 逮火而死. 夜, 王步至山呼亭, 嘆曰, “恨不用金仁存之言.” 侍從皆散, 唯近臣林景淸等十餘人在.
王恐被害, 作書, 請禪位於資謙. 資謙畏兩府之議, 未敢發言. 李壽颺言於坐中曰, “上雖有詔, 李公豈敢如是.” 資謙意遂沮, 涕泣還書曰, “臣無二心, 惟聖鑑諒之.” 有洪立功者, 將軍劉漢卿下中郞將也.
資謙以漢卿入內, 卽以立功爲借將軍, 使率兵聽俊京指揮. 俊京使立功以軍卒六十餘人擔柴, 至都省南路.
立功密語軍卒曰, “我與若等皆王臣也, 而負薪燒宮, 非臣子之義.” 遂釋擔, 從宣敎門竇入, 望見羅拜.
王驚問, “爾爲誰.” 立功前自陳. 王甚悅, 賜酒食, 自是, 宿衛不離.
癸亥. 黎明, 王以火焰將逼, 欲出. 會, 資謙遣承宣金珦請出御南宮. 王步至景靈殿, 命內侍白思淸奉祖宗神御, 納諸內帝釋院眢井中, 乃出西華門, 乘馬至延德宮.
吳卓導前. 俊京使郞將張成拔劍突入, 執卓斬之, 又分遣人執崔卓權秀高碩劉漢卿宋幸忠李作安甫麟及大將軍尹成韓景將軍朴英宋仁史惟挺吳挺臣郞將李儒內侍崔箴員外郞朴元實等, 皆殺之. 洪灌老病, 不能行, 最後, 出至西華門外, 俊京使殺之. 其餘軍士死者, 不可勝計. 內侍奉御王觀大將軍尹先郞將丁寵珍別將張成好侍從在南宮, 資謙請出之再三, 王不得已從之, 使人請勿殺, 之甫皆殺之.
資謙又與俊京議, 亂作日直宿者無貴賤皆殺之, 李壽執不可, 乃止. 將軍李祿千金旦金彥逃匿以免. 是日, 宮禁焚蕩, 唯山呼賞春賞花三亭及內帝釋院廊廡數十間僅存. 百官狼狽奔散, 直史館金守雌獨負國史, 至山呼亭北, 掘地以藏之, 賴免焚滅. 之甫縛栲智祿延於順天館, 慘酷幾死, 使尹翰押流遠地, 行至忠州, 病不能興, 氣尙未絶, 翰斷支體, 埋路傍而還. 流金粲于遠地, 粲及祿延妻子, 竝沒爲外官奴婢.
吳卓子子升高碩弟甫俊奔匿北山, 使朴永跡之. 甫俊等登高巖, 罵永曰, “資謙等竊寵擅權, 流毒生民, 甚於豺虎, 將覆宗社, 汝輩皆姦諂以事之, 曾奴隷之不若. 吾儕擧義以謝吾民而不克者命也. 義士豈死於汝庸奴手乎.” 乃呼天, 卽投巖下而死. 祿延蔡文曾孫, 以材幹稱. 歲甲申, 從討女眞, 頗有功. 爲人荒恣無學術, 自謂有智, 而謀拙, 反陷於禍. 灌唐城郡人, 力學善寫. 縝嘗知靈光牧淸州, 皆有政聲, 爲時輩所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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