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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묵상글 (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 내 마음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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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 마음은?
우리는 거의 모두 남이 내 맘에 들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옹졸한데도 그 옹졸한 맘에 들기를 남에게 바랍니다.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데도 그 맘에 들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거의 모두 내 맘에 들지 않고 그래서 미워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다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에 생기는 것이지
반대로 내가 네 맘에 들려고 하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가능합니까?
그 작은 마음 때문에 모든 것이 맘에 들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안에 미움이나 불만이나 분노가 있다면
그것은 백이면 백 다 바라는 마음 곧 욕심 때문이고,
내 마음이 바다같이 넓지 않고 옹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성심을 바다에 비겨 성찰하고자 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라고 하였지요.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상선입니다.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가 깨닫고 맛보게 된다면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으신 하느님은 물과 같기에
가장 낮은 사람이 그분을 깨닫고 맛보게 되지요.
물은 거슬러 흐르지 않고 아래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낮고 겸손한 사람에게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다야말로 가장 낮고 그래서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흐릅니다.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크고 넓으며
가장 크고 넓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는 겸손이 바다이고 겸손한 마음이 바다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자신을 가장 낮추지만 그러기에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사랑도 가장 많이 수용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하시며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당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시고,
그리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 성심은 겸손하고 온유하여 바다와 같이 넓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그런데도 마음이 부대끼지 않고 안식을 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주님의 마음을 닮으려는 이유는 마음의 안식 때문이 아닙니다.
앞서 봤듯이 바다와 같이 낮고 넓은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을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심에게서 배우려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도 감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난의 사랑 곧 Passio입니다.
수난의 사랑이란 아버지 뜻대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을 바치는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죄로 삼으시는 사랑이며,
그 마음이 어떤 상처를 받아도 그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하시려는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굳이 인간의 것과 비교한다면
어머니의 마음과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언젠가 고백성사를 주는데 한 분이 성사를 보시며
당신은 죽을죄를 지었다며 통곡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무슨 죽을죄를 지으셨냐고 여쭈니 이혼하셨다는 거였고,
그래서 연세가 있으신데 어찌 이혼하셨냐고 또 여쭈니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아들이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이혼한 죄가 당신의 죄라고 생각하시는 거였습니다.
어미의 사랑은 아들의 죄를 당신의 죄로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심을 닮고 이런 어미의 사랑을 닮는다면
죄를 지었다고 그저 형제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고,
형제의 죄로 마음이 상처받았다고 징징대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형제의 죄를 마음 아파하고 그 죗값을 대신 치르려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떤지 돌아봅니다.
상처를 줘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수준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형제를 맹비난하지는 않고 조금 마음 아파하는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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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26)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요,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곧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제들이 예수성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성화를 촉구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루가복음>의 병령구문에 따르면,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루카 10,21) 노래하는 예수님의 ‘마니피캇’(mangificat)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감사와 찬양의 노래요, 뒷 장면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들에게 주는 ‘쉼’(안식)으로 초대입니다.
오늘은 이 <복음>을 예수성심과 관련하여 알아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마태 11,25)를 우주의 주권자시라는 고백하면서, ‘아드님의 마음’을 지니셨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은 무엇보다도 우선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는”(마태 11,25)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찬양과 감사”의 감격적인 고백을 드립니다. 곧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26)라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동의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합니다. 그리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본질적인 동질성 안에서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그래서 아버지께서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듯이, 당신께서도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에게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하시며 구원과 안식으로의 초대합니다. 이는 예수성심이 ‘아버지를 닮은 마음’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이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라기보다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요, 아버지의 ‘종’으로서 아버지의 자녀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며 그들의 아픔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 하시면서 ‘멍에’를 함께 메시는 ‘스승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가 혼자가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멍에’를 함께 메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지는 ‘멍에’에 올려 진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27).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사제들은 바로 그렇게 신자들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이들일 것입니다. 바로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마침내는 당신의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의 짐을 짊어지시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셨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이사 53,5)
바로 이 지고한 사랑의 마음이 ‘예수성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신 심장에 거부와 배신의 창을 꽂았건만 당신은 오히려 생명의 심장을 열어 주셨고, 우리는 당신에게 고통과 죄를 쏟아 부었건만 당신은 우리에게 은총의 피와 생명의 물을 쏟으셨습니다. 그 지극한 사랑으로 당신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우리의 불신과 불순명으로 피 흘리셨고, 저희는 당신 사랑의 심장으로 새 살이 돋았습니다. 저희 안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하고, 은혜로운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오니, 오 사랑하올 예수 성심이여! 당신의 피를 흘리는 능력 외에는, 아무 능력도 없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피를 흘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을 모르게 하소서. 오로지 사랑만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임의 사랑, 임의 성심만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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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오늘 청주교구사제들은 년 피정을 마치게 됩니다. 피정 강사신부님께서 '그리스도의 투영체로서의 사제의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행복한 사제, 기도하는 사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제, 관대한 사제, 비세속적인 사제, 친교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성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특별히 받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고 오히려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신자들의 섬김을 받으며 살아왔고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동료에게는 물론 신자들과의 친교를 이루는 봉사자가 되기를 다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9-30). 온유한 마음은 부드러움입니다. 어떠한 상황, 처지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면 모두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은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 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변두리 사람들,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겸손과 단순함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 세상의 희망입니다.
잘난 사람은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지만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온전히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부모를 따릅니다. 그것이 겸손이기도 합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삶으로 말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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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에 팩스가 한 장 왔습니다. 한국에서 저의 강론을 읽는 분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시각장애인이라서 아내가 남편에게 저의 강론을 읽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는 분이 매일 강론을 보내 주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요즘은 강론을 보내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팩스의 요지는 어떻게 하면 매일 저의 강론을 볼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보내 줄 수 있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홈페이지에 오면 매일 강론을 확인할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지난 5월 LA에서 레지오 강의를 할 때에도 매일 저의 강론을 읽는다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지만 반가운 마음에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금도, 은도 없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십시오.” 그러자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매일 강론을 나누지만 제가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을 만큼 높은 인격과 덕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사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뉴저지 가톨릭 회관에서 특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꽃동네’의 창설자인 오웅진 신부님의 ‘팔순축하미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올해 60회의 생일을 지냈으니 오웅진 신부님은 저보다 20년 먼저 태어났습니다. 신부님은 군에서 복무할 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군부대 인근에 ‘공소’를 세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오웅진 신부님께 비용을 주셨습니다. 아직 사제가 되지도 않았을 때인데 오웅진 신부님은 공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열정과 헌신은 사제가 되기 전에 이미 ‘공소’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1999년 10월 1일에 저는 오웅진 신부님의 땀과 열정으로 세워진 ‘공소’의 본당 신부로 갔습니다.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수녀님을 파견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께서는 기꺼이 두 분의 수녀님을 파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과 함께 저의 사제생활 중에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은 사제들을 축하합니다. 무엇보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느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습니까?”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산상수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슬퍼하는 이, 평화를 베푸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를 베풀어라.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송아지를 잡자.”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우도 집이 있고, 참새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내어 주십시오. 겉옷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내어 주십시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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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사랑의 학교
-“예수 성심의 사랑이 답이다”-
사랑도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이다
오늘은 예수성심성월의 절정인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이어 맞이하는 오늘 대축일에 하느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났으니 바로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물을 길으리라”를 통해 “예수성심 신심이야말로 매우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하는 탁월한 방편이며, 현대사회에 적합한 신심으로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라 불렀습니다. 교부들은 예수성심의 사랑을 “천상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어져 나오는 것’ 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기도가 예수성심의 사랑을 아름답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성심을 통하여, 저희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리며 기뻐하오니, 이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소서.”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수 성심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며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사람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참으로 깨달아야할, 또 평생공부가 하느님 사랑 공부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여정, 사랑의 학교입니다. 믿는 이들의 신원은 평생 주님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들입니다. 사랑이 모두입니다. 새삼 사랑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사랑을 선택하여 훈련하며 살아감으로 사랑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사랑의 학인으로 살 수 있고,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 살 수 있고 주님의 가정인 교회에서 사랑의 형제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성심 대축일을 통하여 또 사랑을 깊이 공부하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신명기의 모세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오늘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성심을 통해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예수성심이야 말로 하느님 사랑의 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형제인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요한 사도가 바로 이런 사랑에 항구할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새롭게 배우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안에 머무르는 사람을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분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도 요한의 사랑의 강론은 늘 읽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체험이 바로 하느님 체험, 예수님 체험입니다. 텅빈허무를 텅빈충만으로 바꾸는 사랑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빛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며 존재이유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없이 살기에 삶이 너무 고달프고 아프고 병도 많고 죄도 많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 모두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통해 살기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예수성심의 사랑을 끊임없이 체험하고 배우고 공부하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우리는 너무 인생을 헛되이 지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많이 많이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한 이들은 바로 이런 사랑을 몰라서입니다.
“사랑합니다!”
아끼지 말고 고백하십시오. 사랑의 지향만 있으면 일단 고백해 놓고 보십시오. 사랑이 뒤따라 옵니다. 마침내 진정 사랑하게 됩니다. 어제 나눴던 고백시를 다시 나눕니다. 형제자매들 고백성사후 사죄경후 강복을 드릴 때 용기를 내어 다음 사랑의 마음으로 안아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감동에 벅차 당신을
안을 때 마다
주님을 안 듯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을
살아 있는 성인을
살아 있는 성경을
살아 있는 소우주를
안듯 당신을 안는다
가슴 벅차 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요즘 며칠간 참 많이 선물로 나눈 시화詩畫입니다. 예수성심성월에, 예수성심대축일에 참 좋은 선물인 사랑법입니다. 사랑으로 안으라 있는 가슴입니다. 자녀든 부부든 친구든 이런 마음으로 안아드리기 바랍니다. 제 좋아하는 시편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시편18,1)-
성녀 소화 데레사,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마지막 임종어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평생 삶의 요약과 같은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어느 형제님이 아내에게 마지막 했다던 임종어는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께 바칠 우리의 마지막 임종어도 이 셋뿐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성심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당신 사랑에로 우리를 초대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이야 말로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와 정주처가 되고, 영원한 쉼터이자 배움터이자 샘터가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짐은 가볍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지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새삼 우리 인생은 평생 예수성심의 사랑을,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워가는 사랑의 여정이요 사랑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나오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늘 당신의 모두가 되고 싶사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동이요 감탄이요 감동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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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면서 동시에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사제 성화를 날은 사제들을 위한 날임과 동시에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선 이날은 사제들이 그들의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는 말입니다. 처음 사제로 서품되던 날 다짐했던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열망과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함에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또한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세상 속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하며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런 사제들은 완벽한 사람이 아닌, 주님 앞에 모두가 철부지임으로 사제들은 분명 기도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날은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기도해주십시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복음에서 주님은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절대로 편한 멍에가 아니었고, 편한 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온유함과 겸손함 때문이었습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절대적인 의탁을 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의탁 말입니다.
사제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서로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최후의 심판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물으실 것이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그대는 얼마나 사랑하면서 살았습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 탓하지 말고
나중에 하겠다고 미루지 말고
오늘 사랑합시다.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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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을 앞으로 뻗어서 자기에게 다가올 위험을 손의 감각으로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계속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평상시에 보던 것처럼 잘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행하셨던 기적을 떠올려 보십시오(요한 9장). 그곳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
선천적 백내장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수술해서 드디어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앞을 완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형태만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공간 능력 파악을 위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대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씩 보이는 수준을 뛰어넘는, 즉 시간을 뛰어넘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힘센 분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더 많이 주실까를 고민하십니다.
문제는 늘 우리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분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려고 했습니다. 엄청난 분인데도 자기가 가진 그 어떤 것보다도 하찮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사랑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힘센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에 큰 희망을 갖고 주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신 것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그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무한하신 그분의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정녕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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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벽돌이다(롱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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