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십자가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길
창세 2,18-25; 마르 7,24-30 / 연중 제5주간 목요일; 2025.2.13.
남편 윤석열이 대통령 직무에서 탄핵되어 구치소에 갇혔는데도 면회를 가지 않는 김건희 여사의 처신이 시중의 화제입니다. 보통 남편이 수감되면 아내는 매일 면회를 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필요한 물건이라든지 읽을 책을 넣어 주어야 하고 또는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김 여사가 어느 기자와 장시간 통화한 내용이 시중에 공개된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김 여사는 남편을 전혀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과 윤석열이 공동으로 정권을 운영하려는 듯한 태도까지 보였습니다. 공사(公私)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이 같은 태도는 실제로 지난 3년 간 여러 차례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불법 계엄으로 정권을 장기적으로 장악하고 나서는 통일 대통령으로 나서려고 했다는 말까지 들립니다. 그런데도 윤석열은 아내의 정치 개입을 삼가하라고 충고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니라고 궁색한 답변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김건희가 과도하게 무속에 심취하여 정치적 결정에 관여했다는 여러 정황입니다. 지난 설 명절이 지나면 국운이 바뀌어 내란 정국 위기도 타개되리라는 무속인들의 말을 믿고 전국의 5대 명산에서 거액을 들여 동시에 커다란 굿판을 벌였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대통령 부부의 비뚤어진 부부관계가 온 국민 가정의 모범이 되기는 커녕 빈축을 사고 있는 이런 모양새가 현 시기 국정 마비 사태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가 소개하는 내용은 혼인에 관한 계시로서, 첫째 창조의 축복으로서 주어진 남자와 여자의 성은 생명을 위한 것이며, 둘째 이를 위해 남성과 여성은 성평등을 전제로 하는 짝이어야 하고, 셋째 부부에게는 창조사업의 협력자로서 자녀를 출산하고 기르며 가르쳐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넷째, 이를 위해서도 부부는 인격적으로는 물론 영적으로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계시 진리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축복하시면서 혼인으로 생겨난 부부와 가정이야말로 당신이 모으려는 메시아 백성 안에서 당신 현존의 탁월한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 즉, 이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는데, 여기서 물은 남녀 간에 서로 끌리는 자연의 섭리를 상징하고 포도주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내시는 사랑의 섭리를 상징합니다(요한 2,1-12). 이 섭리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일이 기적이듯이, 남녀 간의 본성적인 끌림이 희생적인 사랑으로 변화되는 일은 더한 기적입니다. 자연 현상에서는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기적이라 부르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의 혼인을 성사로 거행합니다. 혼인 성사의 은총과 축복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하여 이루어집니다. 혼인에서 이루어지는 이 섭리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심오한 신비에 빗대었습니다(에페 5,21-23). 당연히, 마귀는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비가 부부와 가정에서 일어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마귀의 유혹과 간섭을 받아 영적으로 더러워지고 어려워진 가정의 현실을 우리는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가신 지역은 티로인데, 이곳은 갈릴래아 북쪽의 해안 지방 마을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물든 이방인 지역이었으니, 마귀는 활개치고 다녔을 것입니다. 숱한 사람들과 가정들이 더러운 영에 들렸을 것은 보나마나 뻔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마귀에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찾아 뵙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분 앞에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또 얼마나 진정성 있게 드러내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의 위기를 겪고 있는 부부들은 물론 가정을 성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부부들이 예수님께 대해 갖추어야 할 태도입니다. 마귀에 들린 당사자는 딸이라지만, 이는 부모의 태도가 초래한 영적 결과입니다. 어려서부터 딸에게 성령의 보호막을 갖추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초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자녀들의 사회적 일탈 행동이나 비뚤어진 인격이 자신들이 모범을 보이지 못한 탓임을 모르는 한심한 부모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자녀들을 보면, 부모가 어떤 부부 생활을 해 왔는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에서도 복음을 선포하러 가시기는 했지만, 직접 복음을 듣지도 못했을 그 여인의 믿음을 떠보셨고 그 여인의 믿음이 예상보다 굳은 것을 확인하시고는 감탄하시며 그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이 이방인 선교 방식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밀고 당기는 작전을 펴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도 이방인 선교를 위한 이 일화를 시범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의 복음이 바야흐로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과 교회가 이방인 선교에 나설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 선교가 성공하려면 믿음을 앞세우되 마귀를 쫓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으로 혼인의 존엄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부부를 이끄시는데, 서로 동등하게 도와야 할 반려자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마귀가 있습니다. 혼인성사로 맺어진 부부에게 있어서는, 남편이라면 세상에 여자는 자기 아내 한 사람만 창조되었다고 생각하고 아내라면 세상에 남자는 자기 남편 한 사람만 창조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9,1-9). 그러니까 자기 배우자를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 혹은 여자로 보지 못하게 유혹하는 마귀도 설치고 있는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혼인성사로 맺어진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있어서는 육신의 결합을 통해서 영혼의 결합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가로막고 방해하는 마귀도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독서인 창세기 2장의 본문을 꼼꼼히 들여다 보면, 남자에게서 여자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여자가 태어났고 여자가 태어남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남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출현하기 전에는 그저 ‘사람’으로만 불리다가 여자 덕분에 ‘남자’로 불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창세 2,22 참조). 그런데도 가부장적 문화에 물들어서 남성 우월적 관점으로 이 본문을 보면, 남자에게서 여자가 태어났으므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서의 맥락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의 계시도 편의적으로 알아 듣는 종교 근본주의적 관점입니다. 실제로, 신분으로 백성을 차별했고 여성도 남성보다 낮추어 보던 조선시대에는 이 마귀가 설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신앙 선조들은 만민평등과 남녀동등을 가르치는 천주교를 진리로 받들었고, 백 년 박해에 저항한 결과 오늘날에는 이 가치들이 헌법에 보장되고 사회적 통념으로도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네 가정 현실에서는 여전히 미흡한 형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이에 관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선교적 과제가 절박합니다. 성평등을 가정 현실에서 실천하고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정 선교라는 말입니다. 부모가 평등하고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보고 자란 자녀들이라야 자라서 자신들도 가정을 꾸리게 될 때 자연스럽게 부모가 보여준 부부 사랑과 인격적으로 성평등한 관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성령으로 동정 출산하시어 성모가 되신 마리아께서 요셉과의 가정생활에서 평생 동정으로 사신 모범을 그리스도인 부부들은 귀감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자렛 성가정뿐만 아니라 어느 가정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지 않는 결합은 없으며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지 않는 가정도 없습니다. 소중하고 귀한 가정을 거룩하게 가꾸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정 성화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룩될 혼인의 성사적 은총이요 실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