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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한 알의 밀알 되어 많은 열매를 맺으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2:24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한 알의 밀알 되어... (요한복음 12:24) -마경훈목사 (youtube.com)
하나는 적은 수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하나의 가치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한 알의 밀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무한한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에서 얼마나 많은 밀이 열릴까요? 밀 포기를 뽑아서 조사해보았더니 이삭이 2개에서 5개까지 열린다고 합니다. 농작물 재배 관련 서적에 의하면 하나의 이삭에서 40개의 알곡이 열린다고 하니 밀 한 알이 80개에서 200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게 잡아서 100배로 계산하고 해마다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면 몇 년 만 지나도 인류가 먹을 만큼의 양이 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보여주는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사람도 한 사람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지금 온 세상에는 80억이라는 엄청난 인구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의 가능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 60:22입니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여기서 작은 자와 약한 자는 힘없고 무능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천을 이룹니다. 그리고 강국을 이룹니다. 작고 약한 한 사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 아이의 도시락 하나로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 아이의 도시락은 작은 빵 다섯 개와 조금 큰 멸치만한 작은 물고기로 일어난 기적입니다. 주님은 그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오십 혹은 백 명씩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하찮은 오병이어로 5천 명이 먹고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약 2만 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한 사람의 놀라운 가능성과 지극히 적은 것의 엄청난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렘 5:1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유다가 멸망할 당시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이 멸망하는데 하나님이 보시니 예루살렘에 의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약 의인을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용서하시고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까? 망하지 않았습니까?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의인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있었어도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았을 것인데, 예루살렘에서는 한 사람의 가능성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➀구원에 있어서는 한 사람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해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멸망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멸망할 것이지만 그 멸망으로부터 구원해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 멸망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신 것입니다.
➁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스스로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또 멸망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한 알의 밀알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그 한 알의 밀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한 알의 밀알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에 대한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물론 그 조건은 믿음입니다.
연어는 회귀성 물고기입니다. 강이나 하천 등의 밀물에서 태어난 연어는 큰 바다로 가서 3~4년 동안 살다가 알을 낳을 시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정확히 찾아갑니다. 중도에 웬만한 폭포를 만나도 포기하지 않고 뛰어 오릅니다. 그러다보니 주둥이가 깨지고 지느러미를 다치게 되는데도, 연어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침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연어는 알을 낳기 전에 하천 바닥에 가로 세로 1미터, 깊이 30센티미터 정도 크기로 구멍을 팝니다. 그리고 2~3회에 걸쳐 700∼7,000개 정도의 알을 낳은 후 모래나 자갈로 그 자리를 덮어 놓습니다. 연어는 물살을 거슬려 올라가면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고 또 아무것도 먹지 않은데다가 알을 낳기 위해 구덩이를 파면서 단백질의 30% 이상을 소모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그 후 60일이 되면 수백, 수 천 마리의 연어 치어가 나옵니다.
연어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이란 죽음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미 연어의 죽음을 통해 수천 마리의 새끼 연어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며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설교는 한 알의 밀알처럼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나누겠습니다.
1. 예수님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그 밀알이 살아 있는 밀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얻어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나온 생명과 관련된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➀먼저는 예수님에게 참생명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 1:4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요 6:35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씀입니다. 요 6:48에서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양식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떡을 먹기 때문에 영생합니다. 죽어도 사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요 14: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생명에 이르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습니다.
요일 1:1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요일 1:2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생명이십니다. 요일 5:11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습니다.
➁두 번째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요 6:53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먹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를 대신하여 살을 찢으셨고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전가 되는 것입니다. 요 8:12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요 10:10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요 11:25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망의 권세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참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죽어도 삽니다. 요 20:31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자기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분명한 목적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먼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힙 입어 생명을 얻게 하가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요일 5:12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이 원숭이에게서 진화되었다고 말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진화는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원숭이에게서 진화되었다면 원숭이와 사람 사이에 수많은 중간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원숭이는 원숭이대로 존재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 단계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원숭이의 생명은 차원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하고 아무리 수도를 열심히 해도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자기 속에 주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무정란과 같아서 영적인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에 유정란과 같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에게서는 영적인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땅에 떨어지셨습니다.
밀알이 아무리 종자가 좋아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밀알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빌 2:6,7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주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높고 높은 하늘보좌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밀알이 선반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주님이 천국에만 계셔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어서 자신을 낮추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조엘 비케는 “인간의 지식으로 성육신을 이해하려는 것은 작은 모래알에 산을 그리려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성육신의 신비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성육신의 진리를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예비 된 비상수단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갑니다. 가까이에서 같이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그의 손을 거부합니다. “아니 당신도 지금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면서 어떻게 나를 구할 수 있습니까?” 같이 죄에 빠진 인간은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죄악이 가득한 물속에 오셔서 우리를 건지신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 해리 로더란 유명한 코미디언 겸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때 전쟁으로 25살 된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신경 쇠약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철저한 휴식을 권고해 모든 활동을 멈추고 해변으로 휴양을 가서 독서와 묵상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는 휴양 중 몇 명의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꼬마 소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해가 막 질 때 로더와 함께 바닷가를 걷던 소년이 바닷가를 따라 몇몇 집의 창문에 걸린 별이 그려진 깃발을 보고 물었습니다. “저 집들은 왜 깃발이 걸려 있어요?”, “깃발이 걸린 집은 아들을 전쟁터로 보냈다는 뜻이란다.”, “그런데 왜 어떤 깃발에는 은색별이 그려져 있고 어떤 깃발에는 금색별이 그려져 있어요?”, “은색별이 그려진 깃발은 아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뜻이고, 금색별이 그려진 깃발은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뜻이란다.”
대화를 마치고 조금 더 걷자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워졌습니다. 곧 하늘에 첫 번째 별이 떴습니다. 그 별을 보고 소년이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하늘을 보세요. 별이 떴어요. 그런데 금색별이에요. 그러면 저 별은 하나님이 아들을 전쟁터로 보냈는데, 그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뜻인가요?” 소년의 말을 듣고 로더의 가슴에 어떤 깊은 감동이 일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저 금색별은 하나님이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셨다는 뜻이야. 그 전쟁은 역사상 최대 전쟁이었어. 그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셔서 저 별이 금색 이 된 거야.” 그는 그 말을 할 때 깊은 평안이 임하며 신경 쇠약이 갑자기 치유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기꺼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겸손히 낮아지신 주님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한 알이 썩어진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은 땅속에서 썩습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열매를 맺습니다.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겨울 밭에 나가서 파란 싹이 나있는 밀이나 보리 이삭을 뽑아보면 알 수 있답니다. 밀보리의 새싹 밑뿌리에는 밀보리의 씨앗이 그대로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껍데기뿐입니다. 속은 다 썩고 없습니다. 새싹을 내기 위한 자양분으로 모두 소모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처럼 죽으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개도 안 물어가는 자존심도 내려놓지 못해서 인간관계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어느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법원 이혼청구서류에는 이혼 사유가 ‘감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느 휴일, 부부가 감자를 쪄서 먹으려고 하다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인이 찐 감자와 함께 설탕을 가져오자 남편이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소금을 찾았고, 이에 질세라 부인은 “우리 집은 어렸을 때부터 설탕을 찍어 먹었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처가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남편이 말했습니다. “설탕을 찍어 먹으니까 집안이 그렇지” 부인은, “우리 집안이 어때서? 당신 동생 교육이나 잘 시켜” 이렇게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되었답니다. 감자 먹는 데 설탕이나 소금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것이 부부생활을 끝낼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요?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아가 죽지 못한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열매를 맺으려면 껍질은 깨어져야 하고 밀알은 썩어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 4월11일 승객 2,223명을 태우고 영국 사우스햄프턴에서 미국 뉴욕 항으로 출항하던 중 4일 만인 15일 오후 11시40분께 북대서양 뉴펀들랜드에서 빙하와 충돌해 침몰, 당시 선장을 포함한 1,50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사고가 나자,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승객 중 어린이, 여자, 노인 그리고 남자 순으로 탈출시켰습니다. 이성을 잃고 먼저 살려고 발버둥치는 남자들을 설득시키면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700명을 살리고 자기는 죽었습니다.
그의 고향 영국 리치필드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며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한 말을 동상에 새겼습니다. “영국인답게 행동하라” 그 후부터 선장은 사고 난 배에서 제일 늦게 나와야 한다는 것은 100년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 후 선장들은 배가 파선하였을 때, 배와 운명을 같이 해 왔습니다.
102년 동안 배에서 도망친 선장은 딱 두 번이었다고 합니다. 첫 번 사건은 이태리에서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지 꼭 100년 후, 이태리 ‘코스타 콩크르디아’호의 선장 ‘프란체스코 스케티노’ 선장이 배가 파손되어 침몰되는 순간 300명의 승객을 배에 둔 채 도망쳤습니다. 당국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배에서 나왔는가?”, “간신히 탈출하였습니다.”, “도로 배로 가라”, “가라앉는 배로 다시 들어가라는 말인가요?”, “그렇다. 가서 승객을 구하라”, “못 들어갈 형편입니다.” 선장에게 전화를 한 사람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새끼야. 들어가!” 기어코 그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두 번째로 배에서 도망친 선장은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입니다. 뉴욕타임지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공포에 질린 수백 명의 승객을 배에 두고 맨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배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선장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버렸다. 그는 혼자 육지에 무사히 발을 디뎠는지는 몰라도 감옥에 내리게 되었다.” 2시간 30분 동안 배가 떠있었습니다. 만일 선장이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마음을 가졌더라면, 447명 승객도 다 살리고 자기도 살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했습니다. 그 일로 안산 단원 고등학교 2학년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때 이준석 선장이 자신이 죽을 각오를 했다면 아마도 많은 학생들을 살렸을 것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지만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열매가 된 것입니다.
주님이 본문의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주님이 오신 목적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주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실 때는 빌립과 안드레가 헬라에서 온 사람들을 주님에게 소개하려고 할 때입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주님에게 소개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헬라 왕국 가운데 ‘에뎃사’라는 자그마한 왕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에뎃사 왕국에 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왕위를 계승해야 되는 첫 번째 왕자가 살이 썩어 들어가는 나병에 걸렸습니다. 지금도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불가능한 줄 압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도 당연히 왕자를 치료할 길이 없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료하셨다는 소문이 에뎃사 왕국에까지 들렸습니다. 그래서 왕국에서 사람들을 특별히 파송한 겁니다.
그들이 유대에 와서 주님의 사역을 보니 소문만 무성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병든 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였던 나병환자들도 주님께서 치료하시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만나서 에뎃사 왕국으로 모셔가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곁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주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을 만났습니다. 빌립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빌립이 헬라파니까 빌립을 통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빌립이 그 사실을 안드레에게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주님에게 그 사실을 또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빌립과 안드레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능력이라면 에뎃사 왕국의 왕자의 나병은 충분히 고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헬라의 에뎃사 왕국의 후원을 받아서 주님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쉬어지겠구나’
본문은 주님이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주님이 만약 제자들의 생각처럼 에뎃사 왕국의 왕자의 병을 치료해주신다면 복음 전하기가 편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우도 잘 받으실 것이고, 제자들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에뎃사 왕국에 가시지도 않으셨고, 정반대의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암시적으로 ‘내가 가는 길은 그런 길이 아니다. 왕자를 고쳐서 스타가 되고, 편안하게 사역하고,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는 길이 아니다. 나의 길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는 길이다. 내가 죽어야 풍성한 열매가 있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4. 우리도 땅에 떨어져서 죽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까!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존경하는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 신학을 정립하신 분입니다. 별세신학의 포인트는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사시고,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살고, 내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비극은 남을 죽이고 자기를 내세우는데서 출발한다. 우리사회에 만연돼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나를 죽일 때 가능하다” 그것이 ‘별세신학’의 포인트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실 때, 먼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 잠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으면 갈빗대를 꺼내도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아담이 죽으니 하와가 살았습니다. 가정에서 내가 죽으면 가정이 삽니다. 교회에서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삽니다.
여러분! 죽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열매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저도 죽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었다가 부활합니다. ㅎㅎ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밟혀보면 압니다. 죽은 사람은 밟아도 반응이 없습니다. 죽은 척 하는 사람은 밟으면 벌떡 일어납니다.
우리는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죽은 척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간혹 우리를 밟아서 우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때로는 가족이 나를 밟고, 때로는 교우들이 나를 밟아요. 그러면 우리는 살아나서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었습니다. 왜 날마다 죽었을까요? 바울은 어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어제 분명히 죽었는데, 오늘 다시 자기가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토인비 박사는 런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이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라.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라.” 어떻게 하면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토인비 박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인류역사를 연구해보면 시대마다 역사를 빛낸 인물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의 삶에 공통점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그 시대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희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구든 그 시대의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려라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위해서 자기를 죽이며 희생 제물이 되면 가정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죽이고 희생 제물이 되면 교회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 될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병사가 전쟁에 출전을 하면서 이 격전 터에서 어쩌면 아무도 묻어 줄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는 나의 시체가 앙상히 썩어 뼈만 남을 때 거기에서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휘날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움큼의 코스모스 씨를 안고 전쟁에 출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전쟁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는 무명의 병사의 앙상한 시체가 남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갔던 코스모스 씨가 가을이 되어 꽃이 피고 바람에 코스모스 향기가 휘날렸습니다.
영국 런던의 WEC(국제복음선교회) 본부 지하실에 가면 많은 가방들이 선반에 정리된 채 놓여 있다고 합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들이 임기를 마친 뒤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들의 가방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떠났지만 남아있는 가방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의 표적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들이 있던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이 땅에 남겨진 영원한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도 생명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우리가 죽어지므로 생명의 흔적을 남기고 가야 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삶의 현장은 선교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목숨을 걸만한 상황은 없습니다. 누가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희생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어질 때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많은 열매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
한 알의 밀알(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