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평안들 하셨습니까?
주일을 보내고 오늘 녹음하는 이날은 화요일입니다.
오늘은 5월 14일 제 사제 서품 받은 지 41년 되는 해입니다.
주일날 느티나무 식구들이 많이 오셔서 같이 미사하고 식사하는 즐거운 자리를 가졌습니다.
지난주 마지막 금요일 어린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물리쳤던 성령의 돌 5개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기억나시죠?
이 혼란의 시대에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얘기해 주셨죠.
울타리 안에서 휜 돌 5개를 붙들고 살아라. 휜 돌 5개를 붙들면 어떠한 어둠의 세력도 너와 너의 가족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첫 번째는 단식, 두 번째는 로사리오 기도, 묵주 기도, 세 번째는 고해 성사, 네 번째는 영성체, 다섯 번째는 말씀.
다윗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 뭐라고 그랬는지 아시죠?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다.’
칼과 창은 무기를 나타냅니다.
현대의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니라 미사일, 대포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죠.
예전 칼에 비하겠습니까, 창에 비하겠습니까?
아무튼 과거의 무기든 현대의 무기든 간에, 폭력, 칼, 창을 통해서 또 현대 무기를 통한 어떤 힘의 논리 이런 것을 가지고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원자탄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한들 미사일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이 우리 영혼의 구령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무튼 다윗은 승리한 후 첫 번째 한 말이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다.’
다윗은 이처럼 시초에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사울 왕을 섬기는 신하가 됐죠.
사울 왕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군대의 대장으로 삼았고요.
그리고 사울 왕의 아들인 왕자 요나단과도 아주 진실한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또 다윗은 수금을 아주 잘 탔고 사울 왕은 다윗의 수금 타는 소리를 아주 몹시 사랑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울 왕은 딸을 주어서 다윗의 아내로 삼기까지 하였죠.
그렇지만 다윗을 보는 사울의 눈동자가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시기 질투에 사로잡히죠.
왜냐하면 골리앗을 넘어뜨린 후 싸움 때마다 용맹을 떨치고 명성이 날로 높아졌기 때문이죠.
사울 왕은 앞에서는 칭찬하지만, 사실은 질투 증오하고 나중에는 죽이려고 계략을 꾸밉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높아지자, 그 위기를 가까스로 면하고 사울왕을 피해서 유랑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서에 사울 왕이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려고 뒤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 왕은 ‘낮잠을 자려고’ 이렇게 되어 있지만, 뒤를 보기 위해서 들어갔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굴 안에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사울 왕이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다윗 일행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호의 기회를 얻은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 왕을 죽이라고 다윗에게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왕의 겉 옷자락만 살짝 베게 합니다.
그리고 옷자락이 베어진 것도 모른 채 사울이 굴에서 나가자 어떡합니까?
다윗은 뒤에서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이렇게 외쳐 부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사울을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이라 부르는 다윗의 심기는 아주 애처로워 보입니다.
더구나 사울 왕이 돌아다보자, 다윗은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베어낸 옷자락을 보이면서 살의도,
두 마음도 없었던 것을 분명하게 표명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울 왕도 다윗의 충성에 눈물 흘리지요.
그리고 그 후에 파란곡절이 많지만, 이것은 사무엘기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사무엘기는 아주 읽기 쉬운 책이기 때문에 부디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여기까지는 다윗도 매우 훌륭한 인간이지만 이윽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죄는 신약성경의 첫 장 족보에 명시되어 있기에, 그 죄는 아마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족보에 뭐라고 나오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 1장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엄마는 사실은 우리야의 아내였죠. 밧세바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물론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얻은 첫 번째 아들이 아니죠.
네 번째 아들일 겁니다.
아무튼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얘기가 마태오 복음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다는 얘기는 참 수치스러운 거죠.
자기의 정실도 아니고 부하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얘기가 족보에 등장하는 겁니다.
글쎄요. 여러분들 집안에 족보가 있죠.
여러분 집안 족보에 보면 소위 첩의 자손들도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예전에는 조금 세도가 있으면 첩이 다 있었죠.
그래서 그 첩에서 낳은 자식들의 이름도 족보에는 올라가긴 갑니다.
그렇지만 표시는 분명히 됩니다.
다윗은 부하 우리야에게서 정말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요.
어느 날 해 질 무렵 낮잠에서 깨어난 다윗왕은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발을 멈췄습니다.
왜냐?
저 밑에 내려다보니까 아름다운 여인이 정말 백옥 같은 알몸을 내놓고 씻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을 본 겁니다.
저 여인이 누굴까 다윗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곧바로 그 여인을 알아보니 자기의 부하,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야의 아내라 보고합니다.
다윗은 사실은 그냥 거기까지 하고 끝을 냈어야 합니다.
제가 피정 때 얘기했죠.
뭔가 성적 유혹이 강하게 올 때 첫 번째 무기는 뭐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 무기는 의사표시를 정확히 해야 한다는 거죠.
어중간해선 안 된다는 거죠.
‘싫습니다.’
나를 유혹하지 말라 하고 정확하게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안 통할 때는 좀 멀어져야 한다.
촛불 가까이 가면 갈수록 손가락이 델 확률이 커지죠.
촛불에 가까이 손가락을 대면서 화상 안 입을 재간은 없는 겁니다.
음란 잡지를 보면서 또 음란한 그림을 보면서, 정결한 마음으로 음란 잡지를 읽을 수 있을까?
또 포르노를 보면서 나는 정결한 마음으로 포르노를 본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일단은 나를 유혹하는 자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도망도 쳐야 합니다.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그렇게 주인 마나님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요셉처럼 옷을 빼앗겨 버리고 순결의 옷을 지켜야죠.
다윗은 알몸으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며 분명 음란한 생각이 들고 성욕이 일어났을 겁니다.
거기까지는 본능이라 해도, 성욕 자체는 의학적으로 볼 때 죄는 아닐 겁니다.
성욕이 없으면 자식을 못 만들죠.
그렇지만 다윗은 그 성욕이 이제 음란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내가 이거 잘못 봤구나’ 하고 눈을 씻고 기도해야죠.
‘제가 잠깐이라도 음란한 생각 했었습니다.’라고 해야 했는데, 다윗은 아무 주저 없이 자기 부하에게 저 여자가 누군지 확인해 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우리 아이 아내 밧세바라 그럽니다.
요즘 세상에는 워낙에 불륜들이 많죠.
그러다 보니 남의 아내나 남의 남편과 자는 것이 아주 희귀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것은 엄연한 죄죠.
절대로 무죄가 될 수가 없는 그런 죄입니다. 중죄입니다.
다윗 왕도 다윗 왕이지만, 이 밧세바라는 여자도 또한 한마디로 웃기는 여자입니다.
여러분들, 그 상황을 좀 한 번 좀 상상해 보세요.
왕궁 옥상에서 보고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거리였으니 몇백 미터 떨어진 거리가 아니었던 겁니다.
바로 아주 가까운 거리였던 거죠.
옥상에서도 환히 보일 수 있는 그런 거리에 밧세바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밧세바도 다윗의 모습이 분명히 고개만 들면 보였을 것이다 이겁니다.
그리고 그 옥상은 어느 사람의 옥상이 아니라 왕의 옥상인 것을 밧세바는 왜 모르겠습니까?
분명히 왕이 왔다 갔다가 하는 것을 평소에 봤을 겁니다.
다윗은 그날 처음으로 옥상으로 올라갔던 게 아니죠.
그렇다면 밧세바는 다윗이 매일 그 시간 옥상에 오르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짐작해도 확실합니다.
남편 우리야는 전쟁터에 나갔겠다. 잠시 부재중이겠다. 남편과 잠자리한 지도 한참 됐겠다.
또 아마 밧세바도 음란한 마음이 들었겠죠.
그래서 일부러 그 시간에 다윗이 보이는 장소에서 목욕했을 것이다.
이것이 제 짐작인데 여러분들 추리는 어떻습니까?
일리가 있죠?
아무튼 밧세바는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보이는 곳에서 몸을 씻고 있었습니다.
글쎄, ‘있었습니다’라고 확정을 지으면 조금 그러네요.
‘그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목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 정도로 그냥 퀘스천 마크만 제가 찍겠습니다.
성경에는 ‘밧세바는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고’라고 기록이 되어 있죠.
아마 이것은 생리 끝이었을 겁니다.
제가 아무튼 생각을 좀 많이 나가는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일단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는
절대 몸을 씻을 수가 없습니다.
밧세바는 다윗과 자고 곧 임신하였다고 나오죠.
남편이 전쟁터에 있는데 임신을 한 겁니다.
다윗은 당황이 됐죠.
왜냐하면 모세 십계명에는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숨기고 있는 그 죄가 드러난다면 비록 왕이라 해도 이건 보통 큰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간음했다고 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망신스러운 거죠.
모범을 보여야 할 왕이 십계명을 어겼으니까.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즉시 싸움터에 있는 우리야를 소환합니다.
그리고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어라.’ 이렇게 그의 노고를 위로하는 듯 가장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야는 진실한 남자였고 상남자였죠.
우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계약 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초막에 머무르고, 제 상관 요압 장군님과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의 신하들이
땅바닥에서 야영하고 있는데, 제가 어찌 제 집에 내려가 먹고 마시며 제 아내와 함께 잘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 왕궁 문에서 부하들과 함께 잠을 잡니다.
다음 날도 또 그렇고 아내 밧세바에게는 전혀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상이 계획대로 되질 않았죠.
우리야가 와서 밧세바와 잠자리를 해서 아이가 생기면 그것은 우리야의 아이가 되는 것이고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
내 간음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 했던 첫 번째 작전이 성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흘째 아침에 우리야를 부릅니다.
그리고 상관인 요압 앞으로 편지를 보내죠.
그 내용이 뭡니까? 무시무시합니다.
‘우리야를 아주 맹렬한 싸움터에 앞세워서 너희는 뒤로 물러나고 우리야를 죽게 만들어라.’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간음죄를 덮으려고 하다가 이제는 살인죄까지 지으려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야는 그 편지를 요압에게 전하지요.
그리고 다윗이 원하는 대로 우리야를 아주 무참하게 전사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취합니다.
다윗에게는 이미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아서 아내로 만든 음탕한 왕이 된 겁니다.
이때 이 다윗의 죄를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는 선지자가 나타나는데, 그 선지자의 이름이 나단이었죠.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는 이제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
♣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