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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 장군의 한국전쟁이 "남침"이라는 논거에 대한 반론: II
아래 글 저자(정대화)의 허락 없이 글자를 수정했음을 밝힙니다. 내용에 수정을 가한 것은 전혀 아니고 "트루만→트루먼" 이런 식으로 많이 사용하는 글자로 바꾼 것이 몇 개 있습니다.
6.25 전쟁은 남침인가? 아니면 북침인가? 이 문제는 신항식 교수도 영상을 만들어서 올린 적이 있습니다. 유튜브 본 영상 영상 설명란에는 영상내용의 출처가 있습니다.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관련 영상은 8개입니다.
[세비라] 한국전쟁 8(끝). 민족보다 체제 우선의 국가 전통을 만든 이승만...자주인라디오
위의 영상에서 신항식 교수도 말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이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으로 인해서 남북 모두 초토화 되었다는 것이고, 당시 남북 한민족의 약 4분의 일 정도가 죽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로 미국은 2차대전 당시 쓰고 남은 재고무기를 모두 소진시켰고, 나토가 확고해졌다는 것입니다.
6.25는 남을 위한 전쟁도 북을 위한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의 대리전을 치른 것이 6.25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미국이란 미국 군산복합업체 곧 네오콘을 말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이 막바지에 있는데 지금의 우크라이나 모습은 저 먼 과거 우리들이 치렀던 6.25 전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론 목적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6.25나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이나 모두 네오콘에 의한, 네오콘을 위한 네오콘의 대리전인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위하여? 이딴 말은 네오콘을 위한 대리전을 합리화하는 말잔치일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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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화 6월 27일 ·
한설 장군의 한국전쟁이 "남침"이라는 논거에대한 반론: II
“반격” 주장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소련자료는 “남침”이라고 말하면서도 “반격”이라고 말하고 김일성역시 일관되게 “반격”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미국측에서도 절대로 “반격”이여야 한다는 것을 이승만에게 역설하고 강조한 적이 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은 조선의 결정인데 당시 사태가 충분히 되돌리기 어려운 극단으로 치달음으로 말미암아, 이승만에 의한 다음 공격은 격퇴되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였고, 평화통일에 관한 모든 가능성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이승만 도당의 다음 공격은 이제 추적되어 격퇴 되어야하고 남쪽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때문이였다“라고 말하고 있다.(John Merrill,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Unanswered Questions in Chul Baum Kim & James Matray, eds., Korea and the Cold War(Calif., Regina Books, 1993), pp. 98-99.
이제는 이러한 남침결정을 불가피하게 한 남쪽으로 부터의 도발이나 침공 계획들에 대해 그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한다(아래의 대부분의 정보는 황, 전계서의 “전쟁전후의 주요 타임라인,” 473-482에서 인용한 것임):
1) 1949년 4월 10일: 이날 이승만은 주미특사 조병옥에게 보낸 서신에서 “무력침공 준비가 완료되었으며, 단지 총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2) 1949년 5월 4일: 38선 이북의 개성 송악산 292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남측의 공격으로 연대규모의(5.4 전투)가 발생한다.
3) 1949년 5월 5일: 춘천소재 6여단 8연대소속 2개대대가 집단으로 자진 월북한다. 이를 보복하고자 38선 이북의 포천군 사직리를 공격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남측은 황해도 백천과 옹진에서 무력공세를 편다.
4) 1949년 6월: 옹진전투를 계속하며 전투사령부까지 설치한 남측은 옹진반도 북측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38선 이북의 은파산을 점령한다.
5) 1949년 8월: 이승만은 대만으로 쫒겨난 장개석과 진해에서 비밀회담을 갖는다. 두 사람의 공동목표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6) 1949년 9월: 스티코프를 방문한 김일성의 비서 문일은 한국군이 곧 38선 북쪽의 옹진반도를 점령하고 인근 시멘트공장을 폭격할 것이라는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럴 경우 남쪽의 침입을 격퇴한 뒤 개성인근의 옹진반도쪽 지역(38선 이남)까지 공격할 것이라고 말한다.
7) 1949년 9월 30일: 이승만은 올리버 고문에게 보낸 서신에서 “전면전을 일어킬 최적기”라는 서신을 보낸다(황, 476)
8) 1949년 10월 10일: 이승만의 편지에 대해 올리버는 “각하가 지적하신 대북공격을 이해하며...우리측이 침략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고 무언가 발생했을 때는 이를 소련측에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그들이 골탕먹을 날이 머지 않았다고 확신한다”라는 답신을 보낸다.
9) 1949년 11월 30일: 일본 동경을 방문한 신성모 국방장관은 “남한은 전쟁준비가 완료되어 명령만 기다린다”고 맥아더에게 보고하였다(황, 476)
10) 1950년 1월 1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우리군대는 북한을 공격할 준비를 끝내고 워싱튼의 명령만 기다린다”고 약 1개월전에 한 같은 말을 강조한다(황, 전계서, 476)
11) 1950년 1월 12일: 이날 “애치슨 라인 Acheson Line”이라는 것이 발표가 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방위선으로 알류산 반도에서 일본과 오키나와를 지나 필리핀으로 연결되는 선으로 이선에서 한국과 대만은 제외되었다. 하루끼는 Cumings교수에 의하면 “애치슨Acheson이 이 선으로 공산권이 남한을 침략하기를 기대했으나 북한은 이것을 청신호로 해석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하루끼, 49, 주 17, 및 Cumings, 전계서, 433-5). 따라서 이 이후 미국은 정책을 바꾸고 덜레스로 하여금 더 공세적인 전략을 세우고, 옹진으로 들어가게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며, 적이 먼저 행동을 하게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는 사고가 미국지도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12) 1950년 2월 9일: 국방장관 신성모는 “우리는 북한을 수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으며 미국의 명령만 기다린다”고 같은 말을 3번째 강조한다(황, 477)
13) 1950년 2월 중순: 이승만은 일본동경에서 맥아더와 만나 수차레 비밀회담을 한다(황, 483)
14) 1950년 6월 19일: 38선을 시찰한 후 대한민국 국회에 나타난 덜레스는 유명한 연설에서 “한국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동경에서 그를 기다리든 죤슨 국방장관, 브레들리 합참의장, 맥아더 장군등과 합류한다.
덜레스의 “한국은 혼자가 아니다”(Stone, 17, 27)라는 발언은 6개월 전에 한국과 대만을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의 발언과 상치된다. 이 발언이 먹혀들지 않자, 약 5개월 후 미국정부는 덜레스를 한국에 보내어 에치슨 정책의 변경을 시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6.25 발발 1주일 전 “서울에 온 덜레스는 이렇게 북한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Dulles] ”advocated an attack on the north.“ 덜레스가 좋아한 미국기자 William Mathews도 그때 덜레스와 같이 있었는데 그에 의하면 이승만이 말하기를 ”미국이 도와준다면, 설사 전면전이 일어나더라도 그가 북한을 공격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Mathews noted that Rhee said he would attack even if it brought a general war....if he can do it with our help, he will do it.”(Cumings, 2010, pp. 6-7). 아래를 보면 덜레스와 이승만이 말한대로 북한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고 있다. 놀랍다.
15) 1950년 6월 23일 : 옹진반도에 주둔하던 제17연대 연대장 백인엽 중령은 기습적인 공격을 개시해 38선 북측 15km 지점인 개성인근까지 진격하여 전투를 개시했다. Cumings는 전쟁이 옹진에서 미국시간으로 6월 24-25일간에 일어났다고 쓰고 있다(Cumings, 2010, p. 5)
16) 1950년 6월 24일: 남한에 거주하던 미국 민간인들은 인천항에 정박중이던 노르웨이 선박을 이용해 비밀리에 철수한다. 같은날 6월 24일: 오후 미 군사고문단 고위직 및 한국군 사령관을 포함한 군 지휘부는 미군이 주최한 댄스파티에 참석하여 6월 25일 까지 술에 만취한다.
17) 1950년 6월 25일: 일본 동경에서도 당일아침 맥아더 일행은 유명한 관광지 닛꼬로 꽃 구경을 떠난다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미국시간으로 같은 날 애치슨은 자기 농장에서, 트루만은 미조리의 자기집에서 각자 휴가를 보낸다. 기막힌 연출이 아닌가???
18) 1950년 6월 25일: 01시 17연대의 대규모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렸던 인민군은 전투태세를 갖춘 후 옹진반도에 대한 “반격”을 시작으로 전 전선에 대한 “반격”을 개시한다.
19) 1950년 6월 25일: 06시 남측 관영 중앙방송은 6월 25일 새볔을 기해 북측의 기습남침이 있었으나 영룡한 국군이 이럴 무찌르고 평양을 향해 진격하고 있으며 곧 북한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보도한다. 이어 오전 11시 방송에서는 “김종원 대령이 이끄는 맹호부대가 옹진반도를 점령하고 수천명의 인민군을 생포했다”고 보도한다. 이 보도들을 이 후에 부인한다.
20) 1950년 6월 25일: 오전 북한 관영방송은 “당일새벽 국방군이 38선의 모든 전선에서 북쪽으로 1-2km 를 침공해 왔으나, 공화국 경비대는 인민군과 협조하여 이를 물리치고 38선 이남으로 5-10km 전진하여 계속 전투하고 있다고 보도한다(위 모두는 황, 전계서, 477-479에서). (남한의 ”북침“에 대한 황성환 페친의 책이 중요한 것이, 그는 여기에 덧붙여:(”남-북의 전면전도 미국에 의해 유발됐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단서다“라고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491쪽)
21) 1950년 6월 27일: 소련 외무부 부외상 그로미코는 ”소련정부가 확인한 사실에 의하면 현재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남한당국에 의하여 북한의 접경지점을 도발함으로써 발생하였다. 따라서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은 남한당국과 그 배후에 있는 자들이 져야한다“고 말했다(안청시, 전계서, 57쪽)
이렇게 옹진-->해주공격에 대한 자료와 북한의 반격에 대한 자료는 많다.
그 중에 하나만 더 보자면, 소련역시 개전직후 남한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했다고 UN에 보고했다. 그 증거는 개전직후 포로로 붙잡힌 한국군의 진술이였다. 제 17연대(맹호부대) 본부소속 한서환 중위등은 “6월 24일(토요일) 장교들의 외출이 금지되고, 6월 25일 새벽에 북조선을 공격하라는 육군본부의 극비명령이 하달되었다”고 진술하였다(황, 507)
그 외에도 당시 맥아더의 자서전을 집필하려고 그와 한자리에 있던 미국의 역사가겸 작가인 죤 갠서도, 6월 25일 오전 맥아더에게 보고된 “북침”이라는 용어가 반나절만에 “남침”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황, 상동)
이렇게 미국이나 한국의 조작이나 개입에 대한 정보도 넘친다. 나의 가설은 미국은 이미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했다고 본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Acheson Line이고 그것으로 목적달성이 되지 않자 옹진도발을 미국은 실행하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보자.
I.F. Stone 역시 “한국에서 일어난 침공은 전연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the attack in korea was not a surprise at all. (그의 책, 1쪽) 라고 말했으며, 그 더운 여름날 기자들이 워싱턴의 국방부에 몰려들었을 때, 한 국방부 직원이 말하기를 ”미국은 공격이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는 이 침략이 놀랄 일이 아니라는 증거로 미국시민들을 남한으로부터 철수시키기 위하여 수송선을 준비했다고 말했다(Stone책, 1-2쪽). 미 국방부 뿐만이 아니라 미 국무부도 북한이 침략할 것을 미리상정하여 UN에 제출할 결의문 초안까지 미리 준비해 두었다(Stone책, 53쪽)는 것이다.
다시 되풀이 하건데, 특히 Stone은 장개석과 가까운 중국인들이(특히 그의 처남) 한국전쟁의 정보를 알고 1950년 6월에 시카고의 곡물시장에서 엄청난 투기를 하여 당시돈 3,000만 달러를 벌었다는 것이다. 대두콩은 만주에서 수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한국전에 대한 정보를 미리알고 투기를 하여 대두통 값이 부셀당 50%까지 올라가도록 하여 큰 이익을 보았다는 것이다(Stone, xviii). “우리가 가정하는 것은 장개석의 친구들이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정보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Stone, xviii, 주 2)
Stone에 의하면 “모든사정과 배경을 고려했을 때, 우리의 결론은 이승만이 북한이 38선을 넘어 반격을 하리라는 희망하에 그가 고의적인 도발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리하여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Monthly Review, 1951년 8월호, 114-5쪽, Stone의 책 xvii에 인용)
따라서 필자 역시 1950년 6월 25일에 이승만이 미국과 합작하여 옹진을 공격하고 해주로 진입한 것으로 믿는다.
중요한 것은 미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이였든 John Merrill박사와 Cumings교수와 주장들과 유사하게, 그동안 우리에게 금서로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저자 Wilfred G. Burchett도 그의 책 The Struggle for Korea’s National Rights, (Pyongyang, 1974)의 11쪽에서 ”한국전쟁은 1950년 6월이 아니라(내전의 성격으로) 이미 1949년 8월과 9월 사이에 시작되었다. 이승만이 1949년 여름 내내 38선의 주요 지점에서 계속 공격을 하였는데 이것은 북한을 전면 공격한 후 치고 빠질 거점(옹진-필자)을 확보하기위해서 였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Cumings교수 역시 “옹진은 특히 지형상 반도로서 북한이 침략하기에는 오히려 불리한 곳이나, 도발자들이 치고 빠지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말하고 있다”(아래 책, 572쪽). Cumings교수는 한반도 전쟁에 있어서 남한보다는 미국의 도발 가능성(제 3자나, 602쪽, 오렬에 의한, 603쪽)을 강하게 암시한다(598-603). 그는 미국의 1940년대 말 그리스에서의 도발과 베트남 통킹만에서의 도발(하노이 북폭의 빌미로 삼은), 쿠바에서의 수많은 도발시도, 니카라과에서와 콘트라 사건등의 도발을 들고 있다.
C교수에 의하면, 북한은 1950년 6월초(훈련이 말에 끝나게 되어 있었음) 옹진부근에서 하계훈련에 들어가 있었다(596, 615). 그런데 그러던 그들이 6월 25일에 왜 별 장비도 없이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는가? C교수는 어떤 오열(미국의 특수부대라고 그는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 할 수 없다고했다)에 의해서 아무도 모르게 북한군이 ”반격“하도록 하는 남쪽으로 부터의 도발이 있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들의 갑작스런 방향전환과 타이밍(6.25)이 바로 핵심적인 질문이다. (북한이 전쟁시기를 결정했을 것이라면, 남한의 논에 물이 대여진 6월 보다는 추수가 끝난 가을이나 땅이 얼어붙은 겨울이 북한의 탱크의 침공에는 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이것은 필자 정대화의 견해)
그는 계속해서 전쟁은 옹진에서 발발하였으며 이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고 주장한다(571, 582쪽). 특히 C교수는 남한이나 이승만이 도발한 가능성의 이유로서 이승만이 5-10선거 이후 국내 정치상 대단한 어려움에 처해 몰락직전에 있었으며, 대만의 장개석 역시 1950년 6월에 반 장개석 구떼따(쿠데타)가 계획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599-601쪽)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모택동의 1950년 7월 15일 대만침공 정보가 있었는데 이 정보가 1950년 6월 중순에 미 국무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600-1, 604쪽)
즉, 결과적으로 한국전 발발이 이승만과 장개석을 구했다는 것이다(600). 궁지에 몰린 이승만과 장개석이 “정치적 야망이 있었던“ 맥아더와 함께 전쟁을 도발할 수 도 있었다는 음모설을 C교수는 I.F. Stone과 같이 제시한다.
즉, C교수와 I.F. Stone등은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설, 특히 ”이승만-장개석-맥아더의 음모설,“ 1950년 7월 15일의 모택동의 대만 침공설에 자극받은 미국의 6.25 한국전쟁개입 흔적과 개입설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택동의 1950년 7월 15일 대만 침공설을 사전에 안 미국이 20일 전인 1950년 6월 25일 선수를 치고 한국전 개시 2일만에 미 7함대로 대만해협을 봉쇄하였다는 주장이다.
옹진공격과 해주침공에 대해 중요한 것은 미국인도 아니고 소련인도 아닌 중립적인 인도인 Karunakar Gupta가 영국 런던 대학에서 발간하는 저명한 계간지에서 ”한국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라는 논문이다(The China Quaterly, 1972년 10/12월호 No. 52와 1973년 4/6월호 No. 54)
굽타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이전 한국군이 ”옹진지역으로부터 해주를 먼저 침공하여 전쟁을 도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정보가 미 군사고문들의 확인과 대한민국 공보처의 발표 및 평양방송과 6월 25일자 영국의 BBC, 맨체스터 가디언, 데일리 헤럴드,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일본의 아사히신문 등에 인용되어 서방기자들이 6월 25일 남한의 해주 침공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공보처는 이를 6월 26일에 발표했다고 위 논문에서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공보처는 곧 이를 부인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지고 말았다. 이후 이에 따른 북침주장과 반론이 계속되었고 대한민국과 미국은 이를 부인하며 남침을 고집하였다는 것은 우리들이 이미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다.
재밌는 것은 김종필까지도 해주진격이 사실이라고 말했다는 보도들이 있었으나 이것은 해프닝으로 끝난 것으로 알았는데, 페친중에 정진빈님께서 6.25당시 육본상황실에 근무했던 김종필도 2010년 6월 신동아 (삭제본)에서 백인엽17연대의 6.23 해주공격을 언급했다고 확인을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린다. 아래 김종필과 기자의 대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북침사실“은 1950년 6월 27일자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자유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1950년 6월 26일자 아사히 신문과 런던 데일리 헤랄드 도 같은 사실을 보도하였다.
https://cheramia.tistory.com/15692146
진실을 말했던 김종필의 북침론●625 특집부제::남한군의 북침이 진실이다!!
또한 미 군사고문들의 증언에 의한 것인데 한국군 대대단위까지 미 군사고문단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그들의 야전장교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존해 왔는데, 제 17연대의 군사고문들은 백인엽에 의한 6월 25일에 반격이 아닌 사전계획된 한국군의 해주공격을 모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백선엽의 전쟁당시 미국 부관이였던 Glenn Paige교수는 과거에 필자가 전술한 그의 책 Korea Decision: June 24-30, 1950 (한국전쟁 개입결정) 130쪽에서....“미 군사고문들은 황해도 도청소재지 해주가 백선엽준장의 국군 제 1사단에 의해 점령된 것을 확인했다“고 언급했다는 사실이다(나는 ”한설장군 예찬”글에서 Paige교수가 백선엽에 대해 남긴 글이 없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 후 Paige교수의 책을 다시 읽어보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중 2년간 (1950—1952)을 참전하며 백선엽의 미국부관이였던 상기한 페이지 교수는 백선엽과 같이 다부동전투에서 청천강까지 올라가 다시 후퇴하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한가지 일화는 페이지 교수가 다부동 전투에 참여했을 때 아홉 살먹은 소년에게서 배웠다는 “넓고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한채, 고기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어린 딸”의 노래를 불러 그를 인터뷰한 안청시 교수의 부인 “손봉숙 여사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고 한다. 안청시 편, <비살생정치학과 지구평화운동: 글렌 D. 페이지 교수의 학문세계>집문당, 12, 39쪽(이 책에는 필자의 글도 들어있음)
그러나 필자가 위의 글에서 Cumings교수의 1990년도 발간책을 언급했는데 그는 그의 최근의 저서 The Korean War(한국전쟁), the Modern Library, New York, 2011, 10쪽에서는 그의 예전의 주장에서 후퇴하여 “17연대의 군인들이 해주를 1950년 6월 25일에 점령했다거나 심지어 옹진에서의 전투를 시작했다는 설은 아직까지는 결정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면 현존하는 증거가 양쪽의 주장을 다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이라고 하는 “아리송한”말로 후퇴하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북한의 주장대로 남쪽이 전면전을 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최악으로 1949년에 많이 일어났듯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에 의한 작은 공격들이 있었다. 어떻게 되었든 북쪽은 그것들을 전면전(반격?-필자)으로 대처했다(10쪽)고 그의 ”양쪽으로부터 전면전은 없었다“는 과거의 주장들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1949년의 남쪽으로부터의 도발은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다.
황성환 페친은 북침을 주장하는 그의 책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의 특징을 “간계와 폭력(Craftiness and Violence)”이라고 주장하고 필자는 나의 글들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의 특징을 “기만과 조작(Deception and Manipulations)”이라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옹진반도 진격이나 해주침공등도 국방부와 한국의 방송에서 발표했으나, 미국이나 이승만이 “북침”의 책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닌가 믿고 있다. C교수는 애치슨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사람이라고 혹평한 사람이 최근 와서 과거와는 당착되는 애매한 말들을 하고 있으나 그가 전체적으로는 미국의 1949년 도발이나 개입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그의 3,000여 쪽의 저서들이 증거들이다. 위에 그러한 증거들이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옹진전투와 해주점령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진행형이라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다. 옹진--->해주 진격문제는 한국전쟁의 핵심요소로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든가 하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은 앞으로도 더 연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제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사료되어 이쯤해서 긴글을 일단 마무리 하기로 한다.
IV. 한국전쟁의 정보를 미국이 사전에 알고 준비했다(NSC-68, SL-17, R-3계획들)는 문제 당시 오히려 팽창주의적인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며, 당시 봉쇄정책을 펴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예방전쟁”과 자국의 군수산업 촉진이 긴요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다.
1. 영구 전쟁국가 미국과 NSC-68과 한국전쟁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관철시키려면 압도적 군사력이 필요했다. 미국은 2차 대전 발발 직후부터 전후 목표를 구상했으며 미국으로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이를 위한 청사진으로 국무부 정책기획단장 폴 니츠를 의장으로 한 연구 그룹은 1950년 4월 7일 NSC-68를 작성해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다.
이 문서는 소련이 세계 정복이라는 “광신적” 믿음(사실이 아니다!)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소련과의 갈등은 불가피하게 됐으며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봉쇄 정책은 공허한 허풍이 될 뿐"이라고 밝혔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핵실험을 비밀리에 단행했다. 약 한달후인 1949년 10월 1일, 장개석은 대만으로 쫏겨나고 마오쩌둥(毛澤東)이 텐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러한 사태발전은 미국에 큰 충격이었다. 문제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 “일본의 안보와 행로”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정책 엘리트는 중국보다는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훨씬 더 높게 봤다. 일본이 소련에 넘어간다면 공산권의 세력은 엄청나게 강화될 터였다. 극동에서 “일본요새”를 지켜야했다. NSC-68 입안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보고서가 종이조각을 넘어 실질적인 정책으로 집행되려면 소련이 개입한 눈앞의 전쟁이 필요했다. 그리고 NSC-68이 완성된 1950년 4월 7일로부터 석달이 채 되지않은 시점인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처음엔 내전의 성격을 띠었던 전쟁은 곧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NSC-68의 입안자들이 기획한대로 세상이 굴러간 것이다.
2. SL-17계획:
따라서, 미국이 한국전쟁을 공산주의에 대한 예방전쟁으로 간주하고 김일성의 남침에 대비하여 비상계획, 즉 ”신속히 부산까지 후퇴한 후 인천상륙으로 반격작전을 한다는 SL-17 계획을 미 국방부와 중앙정보국등에서 세웠다“고 C교수는 주장하고 있다(Cumings, 1990, 887쪽 주 121과, 1990년의 한겨레 신문의 C교수와의 면담내용참조)
2000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 역사학자 스탠리 웨인트롭은 그의 저서 ‘맥아더의 전쟁: 코리아와 미국 영웅의 파멸(MacArthur's War: Korea and the Undoing of an American Hero)’에서 미국 국방부가 6.25전쟁 직전에 NSC-68에 의거하여 SL-17이라는 제목의 작전계획을 마련해 두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1950년 6월 19일에 작성된 작전계획 SL-17은 만약 북한이 남침하는 경우 ”유엔군 형태로 참전“해 신속히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전선 구축과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는 것으로 계획돼 있었다.
SL-17 작전계획의 주요 일정은 1950년 9월 30일까지 인천을 점령하고, 10월 15일까지 서울을 탈환한 후, 1951년 1월 31일까지 남포와 원산에 동시상륙하여 평양을 점령한 다음, 1951년 6월까지 38도선 이북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SL-17 문건 작성자인 도널드 커티스는 “50년 6월26일 미국의 극동군 총사령부는 갑자기 SL-17 복사본 50부를 요구했고, 맥아더는 여기에서 인천 상륙 작전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라고 주장했다. 1950년 6월 19일, 미국 국방부는 이 작전계획을 승인하였다.
3. R-3계획
또한 미국의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R-3라는 비밀문건이 있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재미학자 방선주 교수에 의하면, “전쟁을 유발하기 위한 것으로 작성되었다”는 것이며, 이 계획은 트루먼의 지시에 따라 맥아더가 작성하였으며 트루먼과 애치슨, 국무부 극동국장 버드워즈, 웨드마이어 중장, 해군 작전국장 핀벨트제독이 참석한 자리에서 확정되었다(황성환, 485-6; 방선주(?) 남녘편집부<미제침략사>남녘, 1989)는 것이다. 하루끼는 Cumings교수에 의하면 “Acheson이 Acheson Line 발표 후 공산권이 남한을 침략하기를 기대했으나 북한은 이것을 청신호로 해석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하루끼, 49, 주 17, 및 Cumings, 전계서, 433-5)
V. 미국의 책임론: 누가 이 전쟁에서 더 많은 이익을 챙겼느냐 하는 문제
전쟁은 누가 더 이익을 보느냐가 관건이며 이익을 더 많이 보는 국가가 유발하기(Trigger) 마련이다. 한국전쟁으로 말하자면, 음모는 미국이 하였고 이익도 미국이 독차지했다. 소련의 이익은 거의 전무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미국이 당시 미국외교정책의 골치꺼리였던 1. 대만해협 봉쇄문제 2. 인도차이나(월남)에 대한 원조문제 3. 필리핀 원조문제 4. 미국의 대규모 군비증강문제 5.서유럽과 나토동맹국의 군사력 증강문제 6. 서독의 조기 재무장문제 등등 일련의 미국외교상의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버린 것이 (소련의 스탈린이 아니고) 미국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 제국은 한국전쟁으로 많은 이득을 챙겼는데, 당시 미국은 2차대전 특수가 끝나 산업체의 가동률도 바닥을 헤메고 실업자가 급등하는 등 심각한 불항을 겪고 있었다. 특히 미국을 움직이는 “군산복합체“의 가동률이 예년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짐에 따라, 고용불안등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군수품 개발등 화력증강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상황에서 공산주의와(특히 소련)의 대결을 선언한 트루먼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바로 전세계에 미국기지들을 구축하고 그가 말했던 국지전 혹은 제한전(Limited War)이였다(황성환 전계서, 486)
또한 한국전쟁은 1950년 봄 150만에 불과했던 미국의 병력도 대대적으로 늘려 350만으로 증원하게했고(예비병력 포함 총 약 1,000만) 한국전쟁 덕에 트루먼은 군사예산을 지난해, 즉 1년 전의 (1949. 10. 1-1950. 9. 30)의 두배가 넘는 500억 달러로 늘려 불황에 빠져있던 군산복합체를 구제했다.
애치슨은 “한국이 우리를 구했다(Korea Saved Us)”라고 반겼고, 1952년 1월 밴 프리트 장군도 “한국은 우리에게 축복이였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이 세상 다른 어딘가에서 있어야 했다”(Korea has been a blessing. There had to be a Korea either here or some place in the world)“(Stone, 전계서, 348)
Stone은 말하기를, 이 간단한 고백에 한국전 秘史의 열쇠가 있다(In this simple minded confession lies the key to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라고 말했다(상동). 한국전쟁의 ”진리“가 여기 있다는 말이다(여담이지만 황성환 페친은 Stone의 책을 헌책방에서 구입하기 위하여 오랜전에 100만을 지불했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세계 전사상 민간인이 가장많이 희생된 이 야만적인 전쟁에서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을가? 1. 가장큰 이익을 본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방어의 오른쪽 날개는 한국방어, 일본방어의 왼쪽날개는 대만방어“라고 하였는데 미국은 이 전쟁의 결과로 오늘도 한국과 대만을 지키고 있으며, 일본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고 공산주의 봉쇄정책을 이 지역에서 성공리에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강조한다.
다음으로 이익을 챙긴 주모자들은 이승만과 장개석으로 둘다 목숨을 건지고 정권을 유지했다. 죠지 케년(George Kennan)은 한국전쟁으로 이승만과 장개석이 가장 큰 이득을 보고 이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원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손해를 본 것은 소련과 중국, 그리고 김일성과 호지명, 모택동으로 그들은 분단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전쟁을 준비했으나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오산하여 하기와라 료(하기와라 료, <한국전쟁: 김일성과 스탈린의 음모>서울: 한국논단, 1995)의 말대로 김일성의 작은 음모는 미국의 큰 음모(하루끼도 하기와라 료를 인용하며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하루끼 xxi-xxii) 에 의하면, 20여개국 이상이 참여한 이 미증유의 전쟁에서 전쟁에는 승리하였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각자 통일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위와 같은 이유로 미국은 큰 이득을 보았으며(47, 53쪽), 반대로 소련과 중국은 손해를 보았다고(55-59쪽) 영국저자인 A.B Abrams가 그의 최근 책 <Immovable Object: North Korea’s 70years at War with American Power: Clarity Press, Georgia, 2020)에서 말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소련은 중국보다도 한국전쟁 때문에 동북아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소련의 국익에 타격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심지어 비슷한 말을 한 미국 상원의원 H. Alexander Smith를 인용하기까지 하며 “소련은 조선같은 작은나라 때문에 세계 제 3차대전을 일으키길 원치 않았으며 그래서 조선 전쟁을 방지하기 위하여 상당히 노력하였으며 대책을 강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위55쪽)
참고로 미-서(스페인) 전쟁(1898)으로 미국이 본 이득.. 전쟁광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동기를 이해하려면, 1898년에 일어난 미-서(스페인) 전쟁을 이해하면 끝난다.
공산주의 봉쇄정책의 기안자로 유명한 George F. Kennan은 그의 저서 American Diplomacy: 1900-1950(Univ. of Chicago Press, 1951), p. 14 에서 미-서전쟁은 미국이 도발한 것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이 전쟁은 미국의 Maine호가 쿠바의 하바나 항에서 폭파되어 미 해군 265명이 사망하여 미국이 스페인을 공격하여 그 결과로 1. 쿠바와 2. 푸에토리코 3. 필리핀 4. 괌을 차지하고 나중에는 5. 하와이 왕조를 미 해병이 합병하였으며 다음으로는 6. 사모아 등도 미국령으로 차지하였다.
결론은 Maine호의 폭파 책임이 스페인에 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고 그것은 오히려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것이다. (Kennan, 전계서, p. 9—14).
VI. 러시아 자료의 문제점: 누가 어떤 통로를 거쳐 얻고 해석한 자료인가?
한 장군의 “그동안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많은 논쟁도 러시아 외교문서의 개방으로 상당부분 정리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러시아 자료의 사용문제에는 ”누가 어떤 경로를 통해 나온 자료를 사용하였는가“가 문제인데 한 장군은 어떤자료를 사용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나는 아래 인용하는 러시아 자료에 대하여 전 동경대교수 와다 하루끼의 책, Wada Haruki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2014, Rowman & Littlefield을 참조 하였다. 러시아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통로로 나온 자료들이 있다.
1.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김영삼에게 준 자료: 이 자료는 옐친이 1994년 6월에 김영삼에게 준 것으로 한국외무부가 1994년 6월 20일에 발간하였다. 이 서류는 216개의 문서로 총 548쪽에 달했다. 그러나 단 4개의 문서만 공개되었다. 공개된 문서는 러시아어로 된 총 63쪽인데 1949년 1월부터 1950년 10월까지의 문서로 러시아 외무부 관리가 준비한 것이였다. 한국정부는 그 외의 문서는 학자들에게 공개하지 안았다(하루끼, xxii쪽). 세상에 소련문서 216개 중에 단 4개만 공개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따라서 김영삼이 공개한 러시아 자료는 별로 가치가 없다고 본다. 무엇이 무서워서 모두를 공개하지 못했단 말인가???
2. 미국의 극우학자 Katheryn Weathersby와 일부 학자들이 콜럼비아 대학의 한국학 연구소의 도움으로 모스크바에서 같은 자료를 입수하여 The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CWIHP)(냉전 국제역사 프로젝트)에 제공하였고, CWIHP는 이것을 번역하여 그중의 일부 중요한 문서들을 세계도처의 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이 자료의 한계는 그것이 1950년 6월(전쟁발발시기) 이후의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전계서, xxiii)
이 자료들을 학자들이 나름대로 해석하여 사용하였는데, 특히 위에 언급한 Weathersby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이 끝나기를 원치 않았다“고 주장하여 Bruce Cumings교수와 충돌하였고, Cumings교수는 Weathersby를 보고 ”이 소련자료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하루끼, 상계서, xxiv쪽)
Cumings교수와 Weathersby는 1995년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자료의 사용으로 격돌할 정도였다(하루끼 상계서, xxiv, 307, 주38). 나 역시 Weathersby의 글들을 읽어보았는데, 그녀의 소련자료를 이용한 주석이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아, 그녀가 인용하는 소련자료 자체의 사용를 기피하였다.
3.서울신문이 공개한 소련자료: 서울신문이 1995년 5월 15일부터 8월 1일 까지 일부 소련자료를 발간하였다. 이것들은 이미 전술한 CWIHP가 발표한 것들이었다. 문제는 CWIHP나 서울신문에도 1950년 6월이후의 자료는 없다는 것이 큰 흠이다(전계서 xxiii). 따라서 가치가 제한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4. 1998년 3월에 The Korean War as Seen in Soviet Documents가 발간되었는데 이것은 CWIHP에 포함되지 않은 자료들을 일부 포함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이책은 서울에서 발간되었는데 Evgenii Bajanov and Natalia Bajanova, <소련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도서출판 열림, 1998.(전계서, xxiii 및 307쪽 주 34)이다.
5. 마지막으로 와다 하루끼 교수가 인용한 자료이고 필자가 이 글에 참고한 자료이다. 이 중요한 자료는 일본의 산케이 신문 모스크바 지국과 영국의 BBC가 인용한 평양주재 소련대사 Shtykov(스티코프)가 소련군 부참모장 Zaharov에게 1950년 6월 26일에 보낸 전보이다. 이 전문은 한국전쟁 개시 후 바로 보낸 것으로 대단히 가치가 있다(하루끼, 전계서, xxiii).
따라서 한 장군은 이 중에 어떤 소련자료를 보셨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VII. 결론
한국전쟁에 대한 나의 결론은 그것이 1949년 이승만 도당과 일제부역자 출신 한국장성들의 도발, 장개석과 정치적 목적을 가졌던 맥아더와 이승만의 모의, 그리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맥아더에게 명령하고 개입한 미국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 “무수한 도발”에 대한 조선의 “반격”이 나의 최종 결론이다. 수많은 도발은 이미 미 고문단장 William L. Roberts가 고백을 하였다. 그리고 Cumings교수, John Merrill, I.F. Stone, Wilfred Burchett, 일본인 하기와라 료, 한국인 조순승, 영국인 Abrams, 그리고 호주인 McCormick 등등 이에 관한 많은 저서들과 수많은 증인들이 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미국은 수많은 전쟁에서 속임수를 쓰고 거짓말을 해 왔는데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한 예가 소위 1) 애치슨 라인이라는 것으로 1950년 1월 12일에 나온 것으로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는 성명이였다. 나는 다른 저자들과 같이 이것은 북한을 유도하기 위한 성명이 아닌가 의심한다. 이 후에 트루먼 대통령 역시 2) ”북조선과 중공이 남한과 타이완을 공격한다 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하며(황성환 전계서, 483쪽) 보호막이나 유도전략을 썼다고도 볼 수 있다.
이후 미국의 덜레스는 6.25 일주일 전인 1950년 6월 19일 38선을 시찰한 후 서울에 나타나 그들이 궁지에 몰렸던지(모택동이 대만을 1950. 7. 15일에 침공한다는 정보로) 약 6개월전의 애치슨 선언과 트루만의 언급들을 뒤집고 대한민국 국회에서 ”한국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You are not alone)“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일본으로 가서 그곳에서 기다리던 죤슨 미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 맥아더 사령관등과 합류하여 미 국방부 수뇌들과 회담하였다(황, 478, 483쪽). 따라서 필자는 미국이 맥아더와 미 고문단장 및 이승만에게 명령하여 1950년 6월 23일 백인엽으로 하여금 옹진에서 해주로 기습 진격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황, 478, 및 C교수, McCormick 등등)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Cavan McCormick은 그의 책 <Cold War, Hot War(Sydney: Hale and Iremonger, 1983,)에서 그가 생각하기는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남한이 해주 일부를 점령함으로서 북한이 반격을 하도록 도발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하루끼 전계서, xx)
제가 한설장군에게 전술한 적이 있는 백선엽의 미국부관 Glenn D. Paige교수는 그의 역작, <The Korea Decision: June 23-30, 1950> (한배호 역 <미국의 한국참전결정> 법문사, 1968)을 쓰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까지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주장은 ”한국전에 개입한 미국의 결정은 정작 한국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American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had almost nothing to do with Korea itself)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위 내용에서 전술하였듯이 17연대의 ”옹진에서 해주의 공격은 미 고문관들에 의해서 확인되었다“는 그의 유명한 책에서의 발언 역시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증거들을 볼 때 백선엽의 전 미국부관 Paige 전 하와이대 교수의 발언들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나는 그와 약 20년간 그의 비 살생세계 연구소 연구원으로 공적 사적 교제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서 ”옹진-->해주 진격“이나 그 반대가 핵심임으로 여기에 대한 명명백백한 보다 ”결정적이고 확실한 연구“가 앞으로 있다면 좋을것이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겠다. 필자는 옹진-->해주 진격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변함이 없다.
미국의 당시 시사월간지 ”라이프“의 1950년 8월 호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한국(조선)전쟁을 시작할 때처럼 치밀하게 준비한 예는 지금까지의 어느 전쟁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황, 483)
황성환은 그의 책에서 ”이는 전쟁에 개입하거나 침공 명분을 조작하기 위해 거의 예외 없이 전쟁 원인을 날조하거나, 의도적으로 정보를 은폐 왜곡하고, 때로는 상대방의 무력도발을 유도하려고 갖은 음모와 공작을 꾸며온 사실은 미국의 전쟁사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황성환의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민플:2021)의 470-510쪽, 특히 483). 황의 책의 전체적인 맥략은 한국전쟁은 "북침"이라고 단정한다. (나는 한국전쟁 연구에서 이렇게 ”용감한 지식인/저자”는 처음 보았다!).
한국전쟁 연구에는 (1) “전통주의”설(그것은 남침이다라는 설)과 (2) “수정주의” 설(아니다 그것은 북침이다라는 설, 그리고 함정설, 유도설등등)이 있고 (3) “종합주의(총체적 분석과 견해”)로 지금까지 나뉘어져 왔으나 한설장군은 전후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전통주의”설인 “남침설”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 특징이다.
필자는 누구나 알만한 중요한 페친들로부터 한설장군은 “세뇌”당했다, “미국쪽으로 편향된 사람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고, 만약에 육사를 졸업하고 “북침”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령진급도 못한다” 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한설장군은 주지하시고 참고해 주기를 바란다.
휴전 73년으로 한국전쟁은 아직도 계속중이다. 그러나 이제 조선이 핵국이 된 마당에, 미 제국주의 “야만인 전쟁광들”은 더 이상 황성환의 말대로 “간계와 폭력,” 그리고 정대화의 말대로 “기만과 조작”으로 우리민족을 더 이상 야만적으로 살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나라의 편협한 정치지도자들(특히 대통령이라는 것들)의 정치수준의 문제”가 있어 왔고 “국민의 민도 문제”와 “민족내적 역량의 부족“ 문제가 있어 왔지만 결론은 우리 자신들이 우리 자신들의 ”자주적인“ 힘으로 종전을 성취하고 남북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통일을 성취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 긴 글을 마무리 할 때가 되었다. 나는 결어로 이 전쟁은 냉전시대 20여개국을 동원한 미 제국주의 전쟁광들의 ”침략전쟁“과 ”학살전쟁“에 대한 ”반격“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여,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방어“가 목적이였던 미제의 일본방어의 ”오른쪽 날개“는 한국방어였으며, 일본방어의 ”왼쪽날개“는 대만방어였다. 이 침략유도 전쟁의 결과로 미국은 이 목적을 달성하여 지금도 한국과 대만을 모두 방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엄중한 사실을 잊어서는 않된다.
단세포적인 ”남침“이란 한 마디로 반인륜적 세균전까지 동원하여 우리민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미 제국주의 전쟁광 범죄자들에게 면제부를 주는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않된다!
한국전쟁이 ”남침“이다 아니면 ”북침”이다 하는 논쟁은 아직까지도 동서간의 선전과, 이익과, 이념이 잉태된 논쟁으로 이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으로 끝이 없기에 필자는 공간의 부족 때문에라도 부족한 글이나마 여기서 이 정도로 마무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호재현님들과 페친 여러분들의 고견을 경청하겠다. 이상 긴 글을 읽어주신데 대하여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끝(이 글을 칭찬해 주신 박한식 교수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위 글 저자 : 정대화
UN 사무국에서 근무했음
Harvard University에서 국제문제 연구소 연구교수: 논문발간 전공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국제관계 - 통일문제 연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