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컬렉션 Ⅲ -근현대 한국화②』
- ▣백남순▣나혜석▣김종태▣서동진▣이종우▣김중현▣박상옥▣김종영▣권진규▣윤효중
◆『이건희 컬렉션』을 더 보실려면 아래 URL를 클릭하세요
『이건희 컬렉션 Ⅰ-문화재』 https://blog.naver.com/ohyh45/222497140688
▣ 조선시대 회화, ▣ 전적, ▣ 금속·공예, ▣ 조각, ▣ 토기·도자.
『이건희 컬렉션 Ⅱ-근현대한국화①』 https://blog.naver.com/ohyh45/222498664050
▣ 허백련, ▣ 김은호, ▣ 이상범, ▣ 변관식, ▣ 이응노, ▣ 김기창, ▣ 박래현, ▣ 이도형,
『이건희 컬렉션 Ⅲ-근현대한국화②』 https://blog.naver.com/ohyh45/222499693504
▣ 백남순, ▣ 나혜석, ▣ 김종태, ▣ 서동진, ▣ 이종우, ▣ 김중현, ▣ 박상옥, ▣ 김종영, ▣ 권진규, ▣ 윤효중,
『이건희 컬렉션 Ⅳ-근현대한국화③』- ▣박수근, ▣김환기 https://blog.naver.com/ohyh45/222500896165
『이건희 컬렉션 Ⅴ-근현대한국화④』 https://blog.naver.com/ohyh45/222500899707
▣ 이성자, ▣ 이대원, ▣ 권옥연, ▣ 박생광, ▣ 도봉상, ▣ 박영선, ▣ 서진달, ▣ 남 관, ▣ 김 경,
『이건희 컬렉션 Ⅵ-근현대한국화⑤』 https://blog.naver.com/ohyh45/222502492383
▣ 오지호, ▣ 천경자, ▣ 장욱진, ▣ 김흥수, ▣ 류경채,
『이건희 컬렉션 Ⅶ-근현대한국화⑥』 https://blog.naver.com/ohyh45/222502563094
▣ 이중섭, ▣ 이인성, ▣ 이쾌대, ▣채용신,
『이건희 컬렉션 Ⅷ-근현대한국화⑦』 https://blog.naver.com/ohyh45/222503421442
▣ 유영국, ▣ 문학진, ▣ 변종하, ▣ 서진달, ▣ 박항섭, ▣ 문 신, ▣ 박대성, ▣ 임직순, ▣ 신학철,
『이건희 컬렉션 Ⅸ-외국화가작품』 https://blog.naver.com/ohyh45/222504251335
▣ 피사로, ▣ 마크 로스코, ▣ 미로, ▣ 모네, ▣ 달리, ▣ 샤갈, ▣ 르누아르, ▣ 고갱, ▣ 베이컨, ▣ 쿠닝, ▣ 바스키아,
▣ 피카소, ▣ 마그리트, ▣ 리히텐슈타인, ▣ 앤디 워홀, ▣ 트웜블리, ▣ 리히터, ▣ 자코메티, ▣ 로댕,
『이건희 컬렉션 Ⅲ -근현대 한국화②』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명작’전은 1969년 개관 이후 반세기 만에 이건희 근현대미술품 컬렉션 기증으로 소장품 1만점 시대를 열게 됐다는 자축의 의미도 지닌다. 지난 4월28일 유족 결단으로 ‘세기의 기증’이라 할 만한 이건희컬렉션 1488점을 인수한 국립현대미술관은 7월 현재 소장품 1만621점을 헤아리게 됐다. 이중 약 55%가 기증으로 수집됐다.
전시장에는 1920~80년대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주요 작가 34명의 주요 작품 58점이 세가지 주제 영역으로 나뉘어 선보인다.
첫 주제는 ‘수용과 변화’다. 일제강점기 서양에서 온 유화 매체와 인물·정물화·풍경화 등의 새 장르도 도입되면서 미술판이 격변한 사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 서두를 수놓는다.
전통 산수화와 서구식 화법의 풍경회화가 결합된 백남순의 1930년대 대작 <낙원>, 전통 회화의 변화를 모색한 이상범의 초창기 희귀작 <무릉도원>(1922)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통해 1920~30년대 동서양 회화의 특징이 융합과 수용을 통해 변모하는 과정을 비교 감상할 수 있다.
두번째 주제는 ‘개성의 발현’에선 1945년 해방과 1950~53년 한국전쟁 기간에도 쉼 없이 새로운 조형 세계를 갈고닦으며 한국 미술의 등뼈를 이룬 김환기, 유영국, 박수근, 이중섭 등 전후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을 망라한다.
사실상 40년 만에 처음 나와 애호가들을 설레게 하는 김환기의 가로 5m를 넘는 거대한 걸작 <여인들과 항아리>(1950년대)는 단연 압권이다.
이 대작을 중심으로 근대 고난기 한민족을 상징하는 그림인 이중섭의 <황소>(1950년대), 투박하지만 편안한 화강암 질감의 화폭을 펼치는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농악>(60년대)의 걸작들이 마주 보거나 이어진다.
마지막 주제는 ‘정착과 모색’으로 전후 시기 각기 독특한 작가적 개성을 구축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일궈낸 이성자, 남관, 이응노, 권옥연, 김흥수, 문신, 박생광, 천경자 등의 작품들을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사상 처음 소장하게 된 김환기의 푸른빛 점화 대작 <산울림19-II-73#307>(1973)을 필두로, 이성자의 <천 년의 고가>(1961), 김흥수의 <한국의 여인들>(1959), 천경자의 <노오란 산책길>(1983), 박생광의 <무녀>(1980) 같은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백남순
희귀작 중의 하나는 이중섭의 스승이기도 했던 여성 화가 백남순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 '낙원'(1937)이다. 백남순은 나혜석과 마찬가지로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며 1920년대에 일찍이 파리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미국 예일대 출신의 임용련(1901~?)을 만나 결혼한 후 1930년에 귀국했다.
유학에서 돌아온 임용련과 백남순은 함께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보에서 영어· 미술 교사로 재직했고, 그곳에서 이중섭, 문학수 등 제자들을 가르쳤다. 현존하는 사진 자료엔 오산고보 미술반에 백남순의 '낙원'이 펼쳐져 있다.
백남순과 임용련이 그린 그림은 6.25 전쟁 당시 부부의 이삿짐이 실려 있던 기차가 폭격을 당해 작품 대부분이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범모 관장은 " '낙원'은 산수화 병풍 형식으로 외형을 꾸몄지만,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그림"이라며 "기법과 그 내용에 있어서 동서융합의 특이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어 "백남순은 미술사에서 이름이 높지만 남아있는 작품은 우리나라 통틀어 딱 한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게 바로 '낙원'이라는 얘기다.
윤 관장은 이어 "임용련과 백남순은 일제강점기 엘리트 부부 화가였으나 당시 척박한 시대의 땅에 이들이 웅지를 펼칠만한 곳이 없었다"면서 "두 사람의 작품은 전쟁 때 소실됐고, 백남순의 남편 임용련은 미군정 시기 납치돼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백남순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1994년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윤 관장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두 여성 작가의 희귀 작이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라 할 만큼 의미 있는 일"이라며 "이번 미술품 기증을 계기로 근대 미술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중섭의 오산고보 스승이었던 백남순의 『낙원』,1937,
oil on canvas, 8 폭 병풍 , 173 x 372 cm.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순(1904-1994), <낙원> 그림이 병풍양식이라 8개로 접어진다 동서양의 유토피아와 무릉도원을 결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서양화를 공부한 1세대 한국 화가가 어떻게 소재나 기법면에서 동서양의 전통을 융합하고 변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낙원> 백남순이 오산 시절, 전라남도 완도에 살고 있던 친구 민영순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로 보냈던 작품이다. 마치 서양의 아르카디아 전통과 동양의 무릉도원 혹은 무이구곡도의 전통을 결합한 것처럼, 동서양의 도상이 혼합된 독특한 느낌의 풍경화이다. 캔버스 천을 바탕으로 하되, 전통의 병풍 형식으로 장황을 한 것도 이색적이다.
현실 세계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높은 산들이 화면 저 멀리까지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바다와 강, 계곡이 화면 곳곳에 넘실댄다. 풍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여러 형태의 집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었으며, 인간은 각자의 소임에 충실한 듯 평화로이 노동에 열중하고 있다. ‘낙원’ 즉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동서양을 막론한 인간의 오랜 주제이다.
이 작품은 1981년 백남순의 친구 민영순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미술평론가 이구열과 당시 뉴욕에 살고 있던 백남순의 협의를 거쳐 ‘낙원’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해방 이전 제작된 백남순의 작품으로는 유일한 그림이다.
“남순아, 우린 조선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인물들이야. 나랑 같이 파리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자.”
1929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은 외교관인 남편 김우영과 구미 여행길에 올라 프랑스 파리에 체류 중이었다. 그때 현지 유학 중인 후배 백남순(1904∼1994)을 만났다.
서울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백남순도 나혜석이 나온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 적이 있지만 졸업은 하지 못하고 조기 귀국했다. 서울의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백남순은 화가의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에 도전해 거듭 입선하며 2호 여성 서양화가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꿈이 컸던 그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파리 유학을 감행한 것이다. 한창 사설 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던 그는 나혜석을 만날 즈음에 고국의 모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갈등하고 있었다. 그런 백남순에게 나혜석은 파리에서 함께 공부하자며 조언을 한 것이다.
파리에 여행 온 나혜석은 유학생 백남순이 부러웠고 자신도 현지에 계속 남아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에게 1년 만이라도 더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백남순까지 거들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귀국길에 올라야 했던 나혜석은 파리에 남는 백남순에게 180도 태도를 바꿔 이런 말을 던졌다.
“여자가 그림은 그려서 무엇에 쓰게. 너도 시집이나 가라, 얘.”
나혜석도 질투한 파리 유학파 백남순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나혜석의 ‘저주’대로 현지에서 만난 조선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상대는 당대 최고 엘리트 임용련(1901∼1959)이었다. 임용련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일경의 수배를 받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임파(Phah Yim)란 이름의 중국 여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 미대를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해 유럽미술연구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온 그는 백남순에게 반했다. 둘은 현지에서 식을 올리고 파리 근교 에르블레에 신혼집을 차렸다.
1930년 귀국한 둘은 동아일보 사옥에서 부부전을 열며 화려한 신고식을 했다. 하지만 구미 유학파를 받아줄 번듯한 무대는 서울에 없었다. 남편 임용련이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오산중학교에 미술 및 영어교사로 부임하자 백남순도 따라갔다. 전업주부로 지내면서도 백남순은 화가로서 꿈을 이어갔다.
격동의 현대사는 임용련·백남순 부부에게 특히 혹독했다. 부부는 광복 후 북한 공산주의 정권을 피해 월남했는데 그때 챙겨오지 못한 그림들은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전소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서울세관 관장으로 있던 임용련은 전쟁 중 인민군에 끌려가 처형됐다. 7남매를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한 백남순은 붓을 꺾고 전쟁고아를 돌보는 사회사업가로 변신했다.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한국 미술계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백남순을 다시 불러낸 건 한국 최초의 미술전문기자로 통하던 이구열씨다. 그는 1981년 미술전문지 ‘계간 미술’ 여름호에 미국에 있던 백남순 인터뷰가 실리도록 주선했다. ‘반세기 만에 뉴욕화실을 공개한 첫 부부 화가 백남순 여사’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77세였다.
이 기사가 나간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남순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교편을 잡았던 보통학교의 동료 교사이자 절친이었던 민영순씨가 우연히 이 기사를 봤다. 그녀는 백남순이 결혼 선물로 그려준 유화가 있다고 했다. 몇 차례 이사를 가면서도 잘 챙긴 덕분에 백남순이 광복 전에 그린 그림 중 유일하게 하나가 보존됐다.
화가 백남순의 작품세계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이 작품은 정주에 살던 시절 셋째를 낳은 이듬해인 1936년에 그린 700호 대작이다. 이 작품이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갔고 유족의 기증으로 국민 품에 안겼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전시장의 도입부를 큼지막하게 장식하고 있다.
서양의 아르카디아 전통과 동양의 무릉도원 혹은 무이구곡도의 전통을 결합한 것처럼, 동서양의 도상이 혼합된 독특한 느낌의 풍경화다. 캔버스 천을 바탕으로 하되, 전통의 8폭 병풍 형식으로 장정한 것도 이색적이다. 표현 기법에서도 동서양을 융합했다.
전통 산수화에서 차용한 폭포와 깎아지른 산, 넘실대는 강 등이 화면 저 멀리까지 아득히 펼쳐진 가운데 서양의 집과 반라의 남녀가 다양한 자세로 배치돼 있다.
백남순이 일제강점기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 미술평론가 안석주가 “상상도 못 할 남성적인 그림”이라고 평가했던 그대로다. 그 호방함의 이면에는 여러 자녀를 둔 32세 주부가 화가로서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안간힘이 녹아있다.
민씨는 수개월 뒤 또 다른 그림 하나를 찾아냈다. 임용련이 신혼을 보낸 파리 근교 에르블레 풍경을 그린 유화다. 이 그림은 민씨가 진작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비운의 현대사에서 건져낸 유학파 부부 화가의 역작이 기증 덕분에 모두 국민의 품에 안겼다.
[출처 : 손영옥 국민일보 문화전문기자 : < 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 국민일보, 2021. 8 . 2.
무릉도원과 아카디아와의 차이, 동시대 프랑스 파리와 평북 정주의 거리.
백남순의 『낙원』,1937, 세부
▣나혜석
나혜석(1896∼1948)은 20대부터 언론을 장식한 스타였다. 그는 한국 근대기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한 여성 화가였다.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현 조시비여자미술대학) 시절에는 소설 ‘경희’ 등을 발표해 김명순과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 자리를 다투며 문필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를 대중매체 스타로 만든 건 10년 연상의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면서 신혼여행길에 죽은 옛 애인 묘소를 찾은 사건이었다. 상처한 김우영의 6년 구애를 받아들이며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해줄 것, 전실 딸과 시어머니와 별거할 것 등 결혼서약서를 쓰게 한 일도 가십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결혼이라는 현실적 제약도 수원 부잣집 딸 나혜석의 그림 열정을 꺾지 못했다. 결혼 이듬해인 1921년 만삭의 몸으로 경성에서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70점의 유화를 선보인 전시회는 화제 몰이를 했다.
22년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미술전람회가 출범한 이래 야심 찬 그 시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혜석도 꾸준히 공모전에 도전했다. 1회부터 11회(1932년)까지 총 18점을 출품해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다.
1927∼29년에는 여성 최초로 구미 여행을 다녀온 후 귀국전을 가졌고, 이혼 후에도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며 35년 소품 200여점을 갖고 개인전을 했다. 그렇게 생전 300점 이상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 많은 작품은 다 어디로 간 걸까. 현존하는 작품은 20여점, 이 가운데 출처가 확실한 것은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나부’ ‘김우영 초상’ ‘염노장’ 등 10여점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화령전(畵寧殿) 작약’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에 소개되고 있다
전시장에 걸린 ‘화령전 작약’은 말년 나혜석의 처지처럼 외로워 보인다. 여자 후배였던 백남순의 ‘낙원’이 가로 3.7m짜리 엄청난 대작이라 그 옆에 걸린 A4용지 크기의 ‘화녕전 작약’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백남순은 최초의 파리 유학 여성 화가였지만 근대사가 낳은 개인적 비극으로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잊힌 화가가 됐다. 하지만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이 대작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재조명의 기회를 얻게 됐다.
화가의 예술세계는 결국 남아 있는 그림이 말한다. 나혜석의 경우 소설 수필 등 문필가로서 족적은 잡지에 발표한 글로 증거된다. 생전에 발표한 유화 작품의 미확인 혹은 부재는 화가 나혜석을 조명하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불행의 씨앗은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를 남긴 1927∼29년의 구미여행이다. 김우영은 23년 만주 안동현 부영사가 됐고, 임기가 끝나자 일본 외무성은 벽지 근무를 마친 그에게 위로 출장 명목으로 구미 시찰 여행을 보내줬다. 아내 나혜석이 여기 동행한 것이다.
젖먹이를 포함해 어린 세 자녀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구미 여행길에 오른 나혜석은 화가로서 야망에 부풀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미술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영감을 얻고 자극을 받았다.
특히 8개월을 체류한 파리에선 비시에르라는 화가가 지도하는 미술연구소에서 야수파와 입체파를 새롭게 접했다. 하지만 그곳 파리는 독립운동가였으나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과 불륜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귀국 이후 나혜석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귀국 후 불륜을 고백했고 1930년 이혼을 통보받았다. 그녀의 나이 34세였다. 줄줄이 아이를 둔 어미였던 그는 34년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고 그 유명한 ‘이혼고백서’를 잡지 삼천리에 기고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소설을 통해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인 나혜석은 그렇게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됐다.
화가로서 삶은 어떠했을까. 불륜과 이혼이 소문나며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31년 일본 문부성 주최 도쿄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 파리 풍경을 담은 ‘정원’이 특선하며 재기하는 듯했다. 사진기자들이 밤중에 자택에 들이닥치며 다시 서울의 화젯거리가 됐다.
제전 특선은 이전까지의 조선미전 출품작에 대해 혹평하던 평론가들을 한 방 먹이는 의미도 있었다. 안석주는 “나혜석의 작품에서 백남순보다 신선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고 김기진은 “안정감 실재감이 부족하고 데생의 오류와 작업에 진척이 없다”고 지적한 적도 있다.
‘화령전 작약’은 나혜석이 이혼 후 고향 수원에 내려와 있으면서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과 그 앞에 핀 작약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화령전 기와지붕과 붉은색 대문이 크게 후경을 차지하고 화면의 앞면 절반에는 활짝 핀 작약이 날아갈 듯한 필치로 표현돼 있다.
빨강과 초록의 강렬한 대비, 속도감 있는 필체는 화면에 생기를 부여한다. 이 그림은 확실히 전작과 다르다. 조선미전 도록 속 흑백 그림으로만 남아 있지만, ‘묘사’에 충실했던 초기작에 비해 이 그림에선 거칠고 주관적인 ‘표현’이 강조됐다.
불안 분노 욕망이 붓질에 요동친다. 조카 나영균은 나혜석이 32년부터 수전증을 앓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붓질에는 그런 영향도 있을 것이다.
나혜석은 32년 다시 도쿄 제전에 도전하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가 30여점의 유화를 그렸다. 하지만 숙식을 해결하던 집에 불이나 작품 태반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다. 33년엔 서울에 여성미술가를 양성하기 위한 사설 학원을 개설했지만 실패했다.
35년 소품 200여점을 발표했지만 더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그는 화가로서도 문필가로서도 공식 무대에서 사라졌다. 52세였던 48년에 행려병자 신세가 돼 세상을 떠났다.
“에미는 선각자였으니라”고 했지만 자녀들은 에미를 부정했다. 막내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 시절 기자의 질문에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식들에게까지 각인된 ‘나쁜 여자’는 한국 사회가 덧씌운 이미지다. 그 많은 그림은 나쁜 여자 이미지에 익사한 걸까. ‘화령전 작약’은 심연에 가라앉은 예술의 존재를 안타깝게 알리는 부표 같다.
[출처 : 손영옥 국민일보 문화전문기자 : <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 국민일보, 2021. 9. 5.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 전시된 나혜석의 『화녕전작약』
'화녕전작약'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꼽히는 나혜석이 1930년대 수원 고향 집 근처에 있는 화녕전 앞에 핀 작약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화녕전(화령전)은 조선 시대 순조가 정조를 기리기 위해 화성행궁 옆에 지은 건물로, 수원에서 태어나 자란 나혜석에겐 매우 친근한 공간이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 그림을 가리켜 "빠른 속도감으로 날아갈 듯한 필체와 강렬한 색채 표현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나혜석이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뒤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엄청난 사회적 스캔들을 일으킨 후 고향 수원에 내려가 있을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나혜석은 생전에 약 300점가량의 작품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작품은 약 10여 점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마저도 대부분 진위 논란에 휩싸여 있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현재 남아 있는 나혜석 작품은 그 수가 매우 적고, 그나마 상당수가 진위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다"며 "그중 '화녕전작약'은 손에 꼽히는 진품으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도 "나혜석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전에 총 18점을 출품했다"면서 "그때 그림이 제대로 남아 있었다면 진위를 가리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됐을 텐데 지금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화녕전작약'은 진위평가의 가장 기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나혜석은 수원에서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조선인 여학생으로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21년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연 나혜석은 조선미전에서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927년 남편과 유럽시찰 여행을 했으나,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불륜으로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다. 1934년에 그는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쓰고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나혜석 『화녕전 작약』, 1930년대, 33 x 23.5 cm, 국립현대미술관,
현존 작품이 10점이 채 안되는 나혜석의 희귀작으로 나혜석의 작품의 진위 평가 기준이되는 작품이다.
‘화녕전작약’은 수원의 대표 화가이자 작가, 시인인 나혜석(1896~1948)이 1930년대 그린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나혜석(1896~1948)은 일제강점기 1세대 유화가이자 첫 여성 서양화가이며 문학인이기도 하다.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으며, 파란만장한 생애 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대부분 소실되어 현존하는 진위가 확실한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손에 꼽히는 진품으로 평가 하고 있으며 나혜석 작품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기준점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나혜석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전에 총 18점을 출품했다"면서 "그때 그림이 제대로 남아 있었다면 진위를 가리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됐을 텐데 지금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화녕전작약’은 진위평가의 가장 기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화녕전작약’은 수원의 고향집 근처에 있는 화녕전 앞에 핀 ‘작약’을 소재로 했다. 빠른 속도감으로 날아갈 듯한 필체와 강렬한 색채 표현이 특징이다.
▣김종태
김종태, 사내아이, 1929, oil on canvas, 43.7x36cm /국립현대미술관
현존하는 김종태의 작품 4점 중의 하나로 초록과 남색 한복을 입은 소년이 졸음에 겨워전차 안에서 단잠에 빠진 아이를 의자에 기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며, 대상의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서영화이지만 동양화의 '일필휘지'를 보는듯, 간단한 한번의 붓질로 대상을 묘사하는 기법이 탁월하다.
일본화가들에게 큰소리를 치며 당당했던 김종태는 독학으로 서양화를 공부해 최초로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추천작가가 됐다. 이번 기증으로 현존하는 4점 중 국립현대미술관이 3점을 소장하게 됐다. 스물아홉에 요절했다
김종태(1906~1935)는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자화상’으로 이름을 처음 알렸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눈부시게 활동한 그는 야수파와 표현파라고 하는 대담한 구성과 격정적인 터치의 화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화풍을 그대로 구현하기보다는 새로운 조형 체험을 극복함으로써 독자적인 감각의 예술을 실현했다. 특히 이 그림 ‘사내아이’는 빠른 속도로 최소한의 붓질을 가해 그려낸 화풍이 신선한 느낌을 주며 유화임에도 수채화 처럼 묽고 투명한 질감이 특별한 그림이다.
수묵(水墨)과도 같은 묽은 색조와 일필로 처리한 터치는 유화가 지니고 있는 재질상의 특성에서 벗어나 유화를 통해 수묵화의 표현적 체험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내아이’에서 표현된 화풍은 다른 야수파나 표현파의 경향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과 비교되는 그의 독자적 기법이다.
그는 개성에서의 개인전에 이어 평양에서도 개인전을 가졌으며, 전시를 갖는 도중 장티푸스로 요절했다. 친구들이 장사를 지내고 서울에서 유작전을 열어 주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해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고작 네점뿐으로, 희귀작가의 희귀작품이다.[참고=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