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3월4일(토)■
(누가복음 24장)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묵상/눅 24:36-53)
◆ 몸의 부활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았어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다.
제자들이 영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자, 예수님은 살과 뼈가 있음을 보여주셨고, 만져보라고까지 하셨다. 심지어 제자들 앞에서 생선 한 토막을 드시기까지 하셨다. 무슨 증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것을 명확하게 증거하는 신약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셈이다. 그리고 성경을 부인하는 순간에 그는 예수님을 더는 구주로 믿게 되지 않게 되며, 더불어 구원의 확신과 영생의 복을 모두 잃어버릴 것이다.
소위 신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과 성경을 논할 때, 그들이 자유주의 신학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가장 간단한 질문이 이것이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는가? '
단순히 부활을 믿느냐고 질문하면 안 된다. 그들은 하나같이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몸의 부활을 믿느냐?' 그러면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만, 몸의 부활을 믿지는 않는다.' 멋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마귀의 교묘한 속임수일 뿐이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다 망한 것이고, 부활을 믿고 이생에서 기꺼이 희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고전 15:18-19).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어느 청년이 우리 교회에 와서 자신만만하게 말하길, 자신은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음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했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십자가의 대속을 믿을 리가 없고, 대속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불의한 자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은 죽음일 뿐이다.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라는 등 각종 멋있는 해석을 곁들여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런 정의는 역사에 무수히 많은 사례가 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로 전락시키려고 애쓴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불교보다 더 허황한 종교며, 가장 유치한 철학으로 전락할 것이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걸고 사람들에게 증거한 것이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지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교묘하게 왜곡함으로써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빈 무덤과 제자들 앞에서 식사하신 것은 몸이 부활하셨음을 확고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인간의 모든 철학,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무용지물이 된다. 어떤 이론도 팩트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부활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확증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사실이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다.
◆ 성경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이것은 구약 전체를 망라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다.
'장로교' 간판이나 '침례교' 간판이 정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는 것이 정통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신앙에는 아주 확고한 공통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경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반한 사역이셨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이미 기록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성경을 그대로 성취하셨다. 성경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온 세계에 전파되는 것도 예언되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8). 아멘
그러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믿음을 양보하면, 기독교는 인간 철학 위에 둥둥 떠있는 허접한 종교로 전락한다. 마귀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이 믿음을 깨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 믿음만 깰 수 있다면, 마귀는 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과 더불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믿음을 우리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 승천하시다
(50-51)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오늘 본문의 사건은 부활하신 날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승천은 그로부터 40일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누가는 그것을 생략하고 이어서 바로 기록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은 베다니 앞이라고 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편으로 4km에 위치한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승천하신 장소를 보다 상세하게 기록해놓았는데, 그것은 '감람원'이라는 산이다. 그곳이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은 곳(1km 내외, 행 1:12)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베다니 앞이란 말은 베다니로 가는 길 도중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베다니는 감람원이란 산 자락에 위치한다(눅 19:29). 겟세마네 동산도 감람원이란 산에 위치한다(눅 22:39).
예수님께서 감람원이란 산에서 승천하셨다.
승천하신 장소까지 언급되고, 함께 모여서 승천을 직접 목격한 무리가 120명이 넘는다(행 1:15). 이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지도, 승천하지도 않았는데, 철학적인 의미로 부활이니, 승천이니 하는 식으로 궤변을 만들어낼 학자들도 없다. 오로지 보고 들은 것을 충실히 전하는 투박하고도 진실한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런 사실(fact)에 기반했기에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실체다. 그리고 이 사실에 기반해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들려졌다(엡 2:5,6).
아멘, 주 예수여,
주는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십자가의 대속과 몸의 부활과 승천하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