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84
1월28일[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연중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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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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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S6eyLpUpcc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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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반드시 현존하고 계십니다!>
오랜만에 공동체 소풍차 타이타닉호 비슷한 배를 타고 물 건너왔습니다. 배 안에 식당도 있고, 편의점도 있고, 노래방도 있고 제 눈이 다 휘둥그레졌습니다.
목포에서 출항할 때만 해도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더니, 제주 가까워지니 엄청난 바람과 높은 파도에 엄청난 규모의 배조차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얼굴도 노래지고 불안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지나가는 어선을 보니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던지요.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제자들도 비슷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엄청난 돌풍을 만나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치게 됩니다.
참으로 절박한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당황스러웠던 제자들은 이러다 죽은 것 아닌가 싶어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배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의 앞부분을 이물 혹은 선수(船首)이라고 하고, 뒷부분은 고물 혹은 선미(船尾)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다들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배의 뒤쪽에 누우셔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천하태평 예수님의 탁월한 유머 감각이 다시 한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볼맨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코 복음 4장 38절)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삼라만상의 주인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는데도 제자들은 목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미성숙과 불신앙, 몰이해와 두려움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느릿느릿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호수를 향해 외치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코 복음 4장 39절)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조금 전 집채만한 풍랑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당신을 향한 믿음도 부족하고, 이해의 폭도 넓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나무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코 복음 4장 40절)
폭풍을 잠잠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옛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겪었던 체험을 고스란히 겪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여정 안에 높은 풍랑과 파도를 수시로 겪게 됩니다.
폭풍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듯 하지만, 반드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의 높은 파도나 고통이 다가올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점 한가지!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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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두려움을 넘어서>
제가 어렸을 때 개울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해서 친구 등에 엎여 있었는데 왠지 수영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수영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꾸 몸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물 밑으로 내려가니 발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차고 올라오면 간신히 물과 공기를 동시에 들이마실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장난치는 줄 알고 저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물은 계속 입으로 들어오고 이러다 죽는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 온 삶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특별히 후회스러운 일들이 다 기억났습니다.
친구가 저를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 때부터 저는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광고에서 아기들이 물속에서 눈을 뜨고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그 아이들은 익사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개월 넘게 엄마 배의 양수에서 살았으니 오히려 물이 더 편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도 조금만 크면 그 물이 자신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 언제일까요?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이후였습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두려워하며 숨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을 댈 때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것 자체가 죄의 시작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하느님의 시선을 무시하고 죄를 짓게 되었을까요? 바로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자신만 생각하게 만들고 하느님을 잊게 합니다.
오늘 제자들도 심한 풍랑이 몰아치자 막 가라앉을 것 같은 배 위에서 심하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지라 아직도 주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찾아주고 불러주기 전까지는 그저 잠자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이 잊어버렸으니 그들이 다시 기억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오자 그들은 교만을 버립니다. 평생 어부생활을 해 왔던 그들이지만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까지 와서야 자존심을 버리고 결국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호수를 평온하게 하시고 그들의 약한 믿음을 꾸짖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자신을 버리는 겸손이 바탕이 되어야합니다. 교만으로 죄를 짓고 두려움이 온 것처럼 그 반대로 겸손으로 다시 그분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지니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저는 주님께서 함께 해 달라고 기도하고 제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 하지 않으니 떨리거나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머무는 것이 기도입니다. 겸손과 믿음의 증표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무시고 계신 그분을 깨워 대화하고 도움을 청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지면 살아가면서 단 한 순간도 그분의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기들이 물에 빠져죽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모가 함께 있어주며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조금 컸다고 혼자 물장난을 하다가 익사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다는 그 믿음, 그래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두려워 할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모르는 아기를 항상 주위에서 돌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항상 옆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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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를 마치고 뉴욕에서 아침으로 ‘곰탕’을 먹었습니다. 며칠 한국음식을 먹지 못해서인지 곰탕의 구수한 육수와 김치 그리고 깍두기가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민족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유전학적인 분류가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DNA는 인류의 시작과 지금까지의 여정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도 DNA 검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인 분류도 타당한 방법이 됩니다. 저는 한반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으면 동질감을 느낍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분류방법입니다. 교포 2세들 중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어색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음식도 민족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에서 살지만 입맛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4년간 살면서 음식 때문에 불편한 적이 없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한국음식’을 한국음식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도 한국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먹방’이 인기 있는 것도 ‘미각’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사제’이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무덤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서는 예수님 탄생을 표시하는 곳에서 경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숙소에서도 사제이기 때문에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는 방법도 몇 가지 있습니다. 교구에서 발급해준 ‘사제신분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사제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아도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사제들이 함께 입는 ‘사제복’입니다. 사제복에는 ‘로만칼라’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고 하얀 로만칼라는 제가 사제임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공항에 내려서 이민국 심사를 받을 때도 사제복을 입고 있으면 심사원이 ‘신부님!’이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예전에는 사제복이 거북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제복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을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제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어색할 때도 있었습니다. 32년 사제로 지내보니 사제복이 제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미각이 쉽게 변하지 않듯이, 사제는 사제복을 입을 때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수학과 과학에는 ‘공리’가 있습니다. 공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증명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리라는 터전 위에 수학과 과학이라는 탑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종교인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증명과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배움과 탐구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념과 사유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천이며 행동의 여정입니다. 사제라는 직분이 믿음에 도움을 주겠지만 실천과 행동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에는 ‘믿음’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족, 부족, 민족은 ‘믿음’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신용’이라는 뿌리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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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언제나 인간의 욕망과 맞서며, 인간의 것은 나약함에 복종하고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여 일으켜 세우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작은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항해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라는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거센 파도가 치는 이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죄인들의 참회와 회개를 바라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함께 희생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니 그분은 “죽은 것”같이 보인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제자들이 믿기는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분은 지치셨지만(요한 4,6 참조), 고생하며 근심하는 사람들의 안식이시다.(마태 11,28 참조) 그분은 잠에 무겁게 짓눌리셨지만(참조: 마태 8,24; 마르 4,38; 루카 8,23) 바다 위를 걸으실 만큼 가벼우셨고, 바람에 명령하셨으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셨다.(참조: 마태 8,26; 14,25-32; 마르 4,39; 6,48-51; 루카 8,24; 요한 6,19-21)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예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명령하신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은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존재이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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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배를 타고 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는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든 복음서에서 공통으로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도 하고, 나중에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기도 하지만 배를 탄 제자들은 그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집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심한 풍랑을 겪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어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복음도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데, 그것만이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아닙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말씀은 바람과 파도에 겁을 먹은 제자들을 꾸짖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이야기에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제자들이 믿지 못하였다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슬픈 결말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길을 가던 두 제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16, 11.13 참조). 또한 복음은 가장 처음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도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16,8)라고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기보다 두려움이 훨씬 더 컸습니다. 부활은 합리만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할 때 생겨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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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철현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의 침묵>
복음에서 어둠에 묻힌 호수를 건너가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거센 돌풍을 만납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는 표현은 일행이 처한 상황이 얼마만큼 절박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긴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자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도 이 세상에서 이와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역경과 빠져 나갈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우리는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잠자고 있는 듯한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합니다.
더군다나 처한 상황이 절박하고 긴급할수록 더 깊은 ‘하느님의 침묵’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하지만 ‘잠자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부재’나 ‘신은 죽었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자 예수님은 일어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는 말 한 마디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침묵하는 하느님을 만나면 사람들은 절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자비로운 이유가 있음을 믿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인생의 바람과 파도는 늘 우리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때때로 하느님이 나의 삶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도 그때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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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려움 없는 믿음>
마르코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두려움 없는 믿음>
거친 세상
한가운데에서
함께하는
나를 믿고
두려움 없이
한걸음 내딛는
벗이 있으니
거친 세상
한가운데에서
함께하는
벗을 믿고
두려움 없이
한걸음 내딛는
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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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무서워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 꿈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결정적으로 위기 앞에서는 주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돌풍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돌풍을 통해서 믿음의 현주소를 보았다는 것이 은총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 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나와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인생여정에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으며 폭풍우가 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잠잠해 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을 지니고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키워야 합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 5장 7절에는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선언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옆에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밤이란 악마가 활동하는 시간이고, 깊은 물과 풍랑은 생명을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종종 악의 세력이 거센 풍랑처럼 우리를 위협하여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역경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에 더욱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손희송). 시련과 역경 속에서 주님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끊임없이 간청하면서 매달립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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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젊었을 때는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50대를 넘어서면서는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2배 이상 많다고 합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켈로그 경영 대학원 양 왕 연구팀은 신참 과학자들이 국립 보건원에 제출한 연구 보조금 신청서를 조사했습니다. 연구팀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기준선에 걸친 신청서 1,000장을 검토했습니다. 15년 동안 지원자의 절반이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깝게 떨어진 이들은 작은 차이로 보조금을 받지 못함에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앞서 미세한 차이로 보조금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냈다는 것입니다. 주목받는 논문도 보조금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21%나 더 높았습니다.
후회가 실패를 돌아보게 했던 것입니다. 이 후회의 핵심은 ‘성찰’이며, 후회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단서가 숨어있었습니다.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실패의 행동이 되더라도 더 나은 성장의 가능성은 행동하는 것 자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후회가 되더라도 우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한 뒤에 포기하고 좌절에 빠진다면, 성장의 가능성도 그 순간에 바로 닫히게 됩니다.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주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또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기에 분명히 행동하는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십니다. 피곤하셨는지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서 배 안에까지 물이 가득 차게 되지요. 뱃사람이 많았던 제자단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워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위험한 상황임을 깨닫고 있어서 ‘죽음’까지도 떠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워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냥 걱정만 하면서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걱정하고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깨워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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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 사랑이 잠자지는 않는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은 여정과 믿음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왜 믿음이 여정에 필요하겠습니까? 자기 좋아서 떠나고 자신감이 있어서 떠나는 여정이었다면 믿음이 굳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자기들이 원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니 떠난 것이고, 가야 할 목적지도 자기들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시한 곳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제자들도 떠나기 싫었을 겁니다. 그 늙은 나이에 떠나라시고 그 밤에 떠나라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니 좋아서 떠난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감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자신감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십니다.
제자들의 경우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한배에 계심에도 겁을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다면 겁을 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주무시고 계셔도 주님은 제자들을 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겁을 냈다는 것은, 주님의 구원 의지와 구원 능력을 둘 다 믿지 않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믿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의 의지와 능력을 둘 다 믿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의지에 대한 불신일 겁니다. 나는 지금 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런데도 주님은 잠자고 계신다고 느낍니다.
오늘 제자들의 표현대로 주님도 나와 같이 깨어 걱정하셔야 하는데 주님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천하태평이시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느낌도 우리의 느낌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일부러 잠자고 계십니다. 그러나 잠자고 계셔도 사랑이 잠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도 사랑할 때는 사랑이 잠자지 않는데 주님께서는 더더욱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잠자고 계시는 것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풍랑이 최고조에 달하고 우리의 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우리의 구원 갈망도 최고조에 달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고, 그리고 기다리시는 그것이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사랑인지는 지나고 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인생길에 주님께서 한배를 타고 계신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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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래서 당신은 저의 주님이십니다.>
제가 들어 아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상담을 잘 하기 위한 두 가지 요령이랄까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담자의 고통과 감정에 대한 공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내담자의 그 고통과 감정에 같이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누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우리는 모른 척하고 지나가서도 안 되지만 급한 김에 무작정 뛰어 들어가면 안 됩니다.
건져준다고 덮어 놓고 물속에 뛰어들면 같이 죽을 수도 있기에 물에 빠진 사람의 위급한 상황에 신속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대처하면서도 냉정해야 합니다. 줄을 던져 주던지 나오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큰 문제에 부닥친 사람에게 상담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든지 해결해주려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야겠지만 문제와 해결의 본질을 침착하고 냉정하고 꿰뚫어보고 정확이 해법을 제시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객관적 주관화 또는 동감적 냉정함이라고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대범한 사랑만이 이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다른 사람이 큰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치고, 겁이 나서 도망치고, 귀찮아서 도망치고는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자학하곤 하였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가 무슨 구세주인 양 여기도 나서고 저기도 나서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돕는다고는 하였지만 같이 허우적거리다가 끝나고 만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저를 창피해 하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런 약함과 무모함은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이제는 창피해 하거나 저를 자학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이고 이렇지 않으시기에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저의 구세주가 아니시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다만 저의 약함 때문에 주님의 강한 능력을 더 믿고, 저의 고통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더 갈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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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은총과 훈련>
- 두려움에 대한 답은 믿음뿐이다 -
“굳건한 믿음으로 간구하오니
당신의 빛으로서 채워주시어
우리가 맞이하는 그모든날을
흠없는 참삶으로 이끄옵소서.”
어제 새벽 성무일도시 마음에 새롭게 와닿은 찬미가 한연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하나를 청한다면 믿음뿐이겠습니다. 믿음의 은총입니다. 은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 역시 다른 수행처럼 부단한 훈련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 전례기도 역시 참 좋은 믿음의 훈련입니다. 개인 신앙은 약하고 부족합니다.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 믿음에 뿌리 내릴 때 건강하고 안전한 신앙입니다.
저희 요셉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 성심상이 찾아오는 모든 이를 언제나 환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판에 새겨져 있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두려움에 대한 답은 믿음뿐입니다. 제 행복기도중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참회합니다” 다음 “믿습니다”를 넣어 다음과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아주 예전 왜관 수도원에서 저녁기도 전, 어둠이 짙어질 때 노수사님들 모습이 참 초라하고 한생이 덧없어 보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그대로 믿음이 걸어다니는 모습들처럼 보였습니다. 한생을 믿음으로 살아온 분들입니다. 노년에 남는 것은 하느님 믿음과 밥뿐인데 믿음은 없고 밥의 욕망만 남아있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을 잊지 못합니다.
믿음없는 탐욕만 남은 삶, 그대로 노추, 노욕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삶에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로 깊어가는 “믿음의 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그동안 자주 인용했던 두 말마디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에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이 셋의 우선 순위가 절대로 바뀌어선 안된다. 하느님 믿음이 있을 때 마음의 평화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영육의 건강이요 돈에 대한 탐욕도 절제할 수 있다.”
어찌 노년뿐이겠습니까? 존엄한 인간 품위의 기반이 되는 믿음입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돈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관계는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 믿음만이 돈의 유혹을 넘어 건실한 인간관계를 맺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 모습이 그대로 믿음 약한 우리들 모습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배가 돌풍으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 좋은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자 제자들은 울부짖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대로 박해와 온갖 어려움으로 곤경에 처한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역시 인생 항해 여정중 얼마나 많은 공동체나 개인들이 조난과 파선의 위협을 겪고 있는지요? 당시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시련입니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에,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살아계신 주님을 잊은 탓입니다. 그대로 믿음 부족의 반영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허약한 믿음의 실상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의 말씀의 위력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자 예수님은 재차 이들의 믿음 약함을 책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대로 우리의 믿음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다음 물음이 오늘 화두처럼 마음에 자리잡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이름 ‘나다’라는 이름의 임마누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나다(I AM)”, 영문으로 하면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인지요!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여정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육신은 노쇠해 가도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날로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11장이 참 좋은 믿음의 본보기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이어 믿음으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종합한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의 인간입니다. 궁극으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늘 향할수록 더욱 깊이 현실에 뿌리내리는 나무를 닮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강한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간 품위의 기초가 믿음이요, 반석같은 믿음 위에 건축되는 인생집입니다.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서방의 4대교부,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교황 대 그레고리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성인학자입니다. 가톨릭 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조도 흥미롭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어보면 ‘불꽃의 아우구스티노’와 ‘얼음의 토마스’가 느껴질 것이다.”
참 좋은 대조와 더불어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성인 학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천사 박사라 칭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 나이로 선종하기 까지 어떻게 그 많은 저술이 가능했는지 불가사의입니다. 성 토마스의 인품에 대한 설명과 그의 깨달음 및 어록도 감동적입니다.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삶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다.”
그가 신학대전 완성을 조금 남겨 두고 절필한 사유도 인상적입니다. 그가 1273년 12월 성 니콜라오 축일 미사를 끝마친후 절필하였는데, 조수가 그 이유를 묻자 다음같이 대답했다 합니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을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해”
성인의 깊은 겸손도 이런 하느님 체험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성 토마스의 시성 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에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합니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얼마나 통쾌하고 멋진 답변인지요! 이어지는 어록도 인상적입니다.
“성 토마스가 집대성한 철학적, 신학적 종합은 교회와 온 인류의 건실하고 항구한 자산이다.”
“인간 안의 이성은 세상 안의 하느님과 같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구원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믿을 것을 아는 것, 추구할 것을 아는 것, 해야 할 것을 아는 것이다.”
침대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분투의 노고로 가득한 삶이었는지 깨닫게 합니다.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하느님이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 참으로 믿음의 성인이요 대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믿음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루카 12,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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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4,40)
<믿음에서 오는 기적!>
오늘 복음(마르4,35-42)은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가십니다. 이때 거센 돌풍이 일어 매우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 돌풍을 꾸짖으며 잠재우십니다.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 기적 사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첫째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힘과 능력'입니다.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을 보고,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4,41) 하며,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이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큰 신적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이런 큰 신적 능력을 지니신 분께로 향해 있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곧 '이 믿음으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풍랑들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히브 11,1-2.8-19)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지니고 있었던 믿음,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던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11,8)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11,11)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11,17)
우리도 이 믿음으로 지금 여기에서 크고 작은 기적들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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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kvCOt989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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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 39)
사람의 풍랑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풍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순간
다시 태어나는
믿음입니다.
관계의 풍랑을
사나운 풍랑을
조용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풍랑을 체험해본
사람은 압니다.
풍랑을 통해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
보게 됩니다.
두려움을
치유하시는
믿음입니다.
풍랑의 시간은
우리의 믿음을
넓히는 시간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고요하시고
자유로우십니다.
믿음을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관계의 풍랑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가야 할 길을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건강한 믿음은
주님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풍랑을
허락하시고
믿음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믿음입니다.
풍랑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바로잡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맞바꿀 수 없는
관계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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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의 믿음을 깨워주시는 주님께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결코 교만과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용기와 함께 걸어갑니다. 주님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님이라는 하나의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우리의 두려움까지도 봉헌하게 됩니다. 오히려 거센 돌풍이 우리의 믿음을 움직입니다.
나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돌풍이 우리의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한 믿음을 일깨워줍니다.
믿음은 아파야 성장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이란 진실된 믿음을 되찾고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바람을 꾸짖듯 우리의 믿음을 꾸짖으십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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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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