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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시 모음
박용래 시인(1925년 ~ 1980년). 충남 강경.
강경상고 졸업.
1955년[현대문학]으로 등단.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시집 [싸락눈] [먼 바다] [백발의 꽃대궁] [강아지풀] 등 다수.
박용래는 '눈물의 시인'이라고 할 만큼 그 의 시 편 편마다 눈물이 흡뻑 배어 있다. 그 를 세상에 존재케 했던 것이 눈물이었던 만큼 눈물은 박용래 자신의 존재성이었던 것 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눈물'은 삶의 과정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저녁 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이 시의 배경은 농촌의 겨울 저녁이다. 농촌의 겨울 저녁은 유난히 빨리 찾아오는데 그것도 늦은 저녁때 눈이 온다. 1, 2, 3연의 구체적인 공간은 농촌의 마구간이다. 마구간 안에 서도 "말집 호롱불", "조랑말 말굽 밑", "여물 써는 소리"에 우 리의 시청각적 감각은 모아진다. 그런데 그 감각은 대체로 바 백게 다가온다. 늦은 저녁때 마구간에 '호롱불'이 켜져 있다 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뒤의 문맥으로 보아 그 할 일이란 말의 저녁을 준비하는 일이다.
▶소나기
누웠는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 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이 시는 사람들이 소나기에 쫓기는 상황을 점층법을 사용하 여 작품화하고 있다. 소나기에 쫓기는 상황이기 때문에 전체 적으로 시상의 전개가 빠르고, '보다'라는 비교격 조사를 사 용하여 "앉았는 사람", "섰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 "송아 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쫓기는 사람"의 순으로 점층적 대비 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시상이 전 개될수록 더 다급하고 쫓기는 것처럼 설정하고 있다
▶ 풀꽃
홀린 듯 홀린 듯 사람들은
산으로 물구경가고
다리밑은 지금 위험수위
탁류에 휘말려 휘말려 뿌리 뽑힐라
교각의 풀꽃은 이제 필사적이다
사면에 물보라치는 아우성
사람들은 어슬렁 어슬렁 물구경 가고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의 불화(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위 험수위"의 다리 밑에는 지금"탁류에 휘말려" 뿌리 뽑혀 죽기 직전인 '풀꽃'이 생명에의 집착으로 "아우성" 치고 있다. 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들은 무관심한 채, 무엇에 "홀 린 듯" "어슬렁 어슬렁 물구경"을 갈 따름이다. 그것도 풀꽃 이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다리 밑 쪽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의 방향인 산으로 가버린다. 이것은 무분별한 산업화로 인해 풀꽃 즉, 자연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는데도 사람들 은 무관심한 채, 넘쳐 나는 산업 문명의 물질을 즐기고만 있 다는 것이다
▶ 점묘(點描)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 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이중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 산견(散見)
해종일 보리 타는
밀 타는 바람
논귀마다 글썽
개구리 울음
아, 숲이 없는 산(山)에 와
뻐꾹새 울음
낙타(駱駝)의 등 기복(起伏) 이는 구릉(丘陵)
먼 오디빛 망각(忘却).
▶ 제비꽃
부리 바알간 장 속의 새,
동트면 환상의 베틀 올라 금사(金絲), 은사(銀絲)
올올이 비단올만 뽑아냈지요,
오묘한 오묘한 가락으로.
난데없이 하루는 잉앗대는 동강,
깃털은 잉앗줄 부챗살에 튕겨 흩어지고 흩어지고,
천길 벼랑에 떨어지고,
영롱한 달빛도 다시 횃대에 걸리지 않았지요.
달밤의 생쥐,
허청바닥 찍찍 담벼락 긋더니,
포도나무 뿌리로 치닫더니,
자주 비누쪽 없어지더니.
아, 오늘은 대나뭇살
새장 걷힌 자리,
흰 제비꽃 놓였습니다.
▶ 해바라기 단장(斷章)
해바라기 꽃판을 응시한다
삼베올로 삼베올로 꽃판에
잡히는 허망(虛妄)의 물집을 응시한다
한 잔(盞) 백주(白酒)에
무우오라기를 씹으며
세계(世界)의 끝까지 보일 듯한 날.
▶ 천(千)의 산(山)
댕댕이 넝쿨, 가시덤불
헤치고 헤치면
그날 나막신
쌓여 들어 있네
나비 잔등에 앉은 보릿고개
작두로도 못 자르는
먼 삼십리
청솔가지 타고
아름 따던 고사리순
할머니 나막신도
포개 있네
빗물 고인 천(千)의 산(山)
겹겹이네.
▶ 설야(雪夜)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 울타리 밖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섭섭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 연시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軟으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 첫눈
눈이 온다 눈이 온다
담 너머 두세 두세
마당가 마당 개
담 너머로 컹컹
도깨비 가는지
‘한숨만 참자’
낮도깨비 가는지
▶ 보름
官北里 가는 길
비켜 가다가
아버지 무덤
비켜 가다가
논둑 굽어보는
외딴 송방에서
샀어라
성냥 한 匣
사슴표,
성냥 한 匣
어메야
한잔 술 취한 듯
하 쓸쓸하여
보름, 쥐불 타듯.
▶ 잔(殘)
가을은 어린 나무에도 단풍 들어
뜰에 산사자(山査子) 우연 붉은데
벗이여 남실남실 넘치는 잔
해후(邂逅)도 별리(別離)도 더불어 멀어졌는데
종이, 종이 울린다 시이소처럼
*산사자山査子 : 아가위나무
▶ 밭머리에 서서
노랗게 속 차오르는 배추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에 옛날에는 배추꼬리도 맛이 있었나니
눈 덮힌 움 속에서 찾아냈었나니
하얗게 밑둥 드러내는 무밭 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 옛날에는 무꼬리 밭에 채였나니
아작아작 먹었었나니
달삭한 맛
산모롱을 굽이도는 기적 소리에
떠나간 사람 얼굴도 스쳐가나니
설핏 비껴가나니
풀무 불빛에 싸여 달덩이처럼
오늘은
이마 조아리며 빌고 싶은 고향
▶ 쓰디쓴 담뱃재 - 유고시
아무리 굽어보아도
보이지 않는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헤아릴 수 없는
이러한 깊은 층층계에
나는 능금처럼
떨어져 있다.
이제 어머니의 자장가는
잃어버렸고
세정(世情)은 오히려 감상(感傷)이었다
벗은 나무처럼 서서
모호(模糊)한 인생(人生)이
너무 시를 쉽게 묶는가보다
오늘밤도 소복이 쌓이는
▶ 별리(別離)
노을 속에 손을 들고 있었다, 도라지빛.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손끝에 방울새는 울고 있었다.
▶ 월훈(月暈)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곰팡이
진실은
진실은
지금 잠자는 곰팡이 뿐이다
지금 잠자는 곰팡이 뿐이다
누룩 속에서
광 속에서
명정(酩酊)만을 위해
오오직
어둠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 소나기
누웠던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 코스모스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지역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
▶ 종소리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꽃잎이 지나니
봄바람 속에 뫼에 올라 뫼를 나려
봄바람 속에 소나무밭으로 갔나니
소나무밭에서 기다렸나니
소나무밭엔 아무도 없었나니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옛날도 지나니
▶ 꽃물
수수밭
수수밭 사이로
기우는
고향
가까운
산자락
보릿재
내는
사람들
귀향열차
뒤칸에
매달린
노을,
맨드라미 꽃물.
▶ 먼 바다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 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 꿈속의 꿈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진달래 철쭉이 한창인데
꿈속의 꿈은
모르는 거리를 가노라
머리칼 날리며
끊어진 현 부여안고
가도 가도 보이잖는 출구
접시물에 빠진 한 마리 파리
파리 한 마리의 나래짓여라
꿈속의 꿈은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살구꽃 오얏꽃 한창인데
▶ 구절초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에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 자화상 3
살아 무엇하리
살아서 무엇하리
죽어
죽어 또한 무엇하리
겨울 꽝꽝나무
꽝꽝나무 열매
울타리 밑의
인연
진한 허망일랑
자욱자욱 묻고
'小寒에서
大寒사이'
출가하고 싶어라
싶어라.
▶ 학鶴의 낙누落淚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일 년 열두 달 머뭇머뭇 골목을 누비며
삼백예순날 머뭇머뭇 집집을 누비며
오오, 안스러운 時代의
마른 鶴의 落淚
슬픔을 모른다는 듯
기쁨을 모른다는 듯
구름 밖을 솟구쳐 날고
날다가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 모과차
앞산엔 가을비
뒷산엔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밤
모과차 마시면
가을 빗소리
▶ 고향소묘
푸른 강심 배다리가 내려다보이는
고향땅 여관집
뒷담은 치지 않고
마당가 군데군데
마른 꽃대 풀대 등을 대고 있었다.
저녁상에 나온 상수리 묵접시
갈밭을 나는 기러기,
그림 들어 있었다.
들길 따라 찬 비는 오고 있었다.
▶ 강아지풀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 구내 모퉁이
어메는 노오란 아베도 노란
화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마른 침목은 싫어
삐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뿌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 간다.
다 두고 이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 소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나도사 : 떠돌아다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