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1마카베오 6,1-13 루카 20,27-40
오늘 몇몇 사두가이들은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을 경우,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사이들과 달리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요.
물론 당시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많은 의견과 주장이 있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불사불멸의
형태가 된다.’ ‘육체가 부활하여 이 세상에서 산다.’ ‘심판을 받은 다음에 다른 곳에서 산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부활하면 빛과도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언젠가 우리도 부활하면 지금과 같은 육신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육신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부활이란 육신까지도 포함하여 인간의 전 존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신 때문에 죄도 짓지만, 육신을 통해 선행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육신의 부활이란 지상에서 육신을 통해 쌓은 행위들을 함께 지니고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선행을 더욱 베풀며 영혼을 단련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얻고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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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철호 요한 신부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1마카베오 6,1-13 루카 20,27-40
사두가이들은 천사의 존재와 육신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것도
부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나 부활이라는 주제에서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예수님과도 의견의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부활이 있다면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며 이성적으로 질문합니다. 곧, 율법은 형제가 죽으면 그 후사를 이어 주려고
죽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라고 가르치는데, 만일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죽고 난 뒤 부활하였을 때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부활이란 지금 현재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 육신의 조건을 그대로 가지고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육신으로 되살아나서
천사들과 같아지기에 더 이상 세상의 연에 매여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불교가 말하는 환생처럼 지금과 전혀 다른 존재로 되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현세에 매이지 않는 온전히 변화된 몸으로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리사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기에
예수님께 호의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조상의 전통보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더 중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모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완전히 다른 몸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진정 부활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역사적으로 유다인들을 가장 괴롭힌 임금 가운데 하나인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맞은 불행한 죽음의 원인이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죄 때문이었음을 안티오코스가 직접 입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크게 실망하고 죽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그도 과연 부활을 누릴 수 있을까요? 원수들의 구원 문제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인 듯합니다.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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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훈 토마스 신부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1마카베오 6,1-13 루카 20,27-40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이나 청문회, 아니면 국회에서 실시하는 대정부 질문 영상을
보면서 때로는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 있고 질문에 답하는 사람을 궁지에 몰기 위하여 질문합니다.
상대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내 생각과 주장이 옳음을 드러내려고 질문합니다.
나아가 상대방 자체를 판단하고 규정지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비판하고
잘못된 것으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질문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판단과 확증 편향은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그런 식의 질문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그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질문을 통해서 그분을 고발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의미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두가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체험했던 하느님 안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만나십니다.
또한 나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십니다.
자신들의 이론과 배움, 체험과 경험에만 갇혀 있던 사두가이들은 이를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며,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논쟁으로 사두가이들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평생을 지녀 온 그들의 신념을 예수님의 한마디로 바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열린 마음, 받아들이는 여유를 바라신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나약함, 부족한 이해와 판단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신 것이 아닌지 짐작해 봅니다.
그러한 열린 마음이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하느님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