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다니엘 1,1-6.8-20 루카 21,1-4
다니엘의 지혜(다니엘 예언서의 시작 1,1-6.8-20),
가난한 과부의 모델(루카 복음 21,1-4)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낸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는 성서 주간을 맞아 평화를 주제로 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는데,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는 말씀에 따라서,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자고 전국 신자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세상은 정의가 실현되지 못해서 평화가 위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씨앗으로 삼아
평화라는 열매를 맺고자 하기는커녕, 불의한 현실은 그대로 두면서 무기와 군대라는 힘으로만
평화를 지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사랑이 가득차게 하지 않으면, 세상 끝 날까지도
무기가 필요없어 지고 전쟁이 사라질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첫 인사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26)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면 그분의 지혜가
주어질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고자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하느님 없이 돈을 섬기며 살아가는 부자 청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과 힘에 따라 살아가는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전 재산도
아낌없이 바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넉근히 받으셨습니다.
다니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요, 가난한 과부는 교회의 모델입니다.
흔히 우리는 돈을 쓰는 지혜보다는 버는 지혜에 목을 매달다시피 노력하는가 하면,
가난한 과부의 모범은 교회보다 부자나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천동설이 그럴 듯 보여도 지동설이 옳은 것처럼,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고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돈을 더 잘 씁니다.
이렇듯 성서가 가르치는 이러한 지혜는 역설적입니다.
교회가 돈에 인색한 부자를 닮기보다는 나눔에 관대한 가난한 과부를 닮기를 바라셨던
예수님의 뜻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돈에 관해 천박한 풍조가 만연한 세상에 대하여
관대한 나눔으로 평화를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에 대한 명쾌한 정답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귀띰해 주고 가셨습니다.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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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다니엘 1,1-6.8-20 루카 21,1-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넣었다."(루카 21,1-4)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열왕기 상권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서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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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다니엘 1,1-6.8-20 루카 21,1-4
"저 빈곤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3)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비행을 질책하신(루카 20,45-47)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들이 멸시하는 빈곤한 과부의 봉헌이 더 경건하다고 가르치십니다.
과부의 처신을 통해 영성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성전의 ‘여인들의 뜰’ 입구에는 보물 창고와 나팔 모양의 열세 개의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와 권력가들은 쓰고 남은 일부를 바치고,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의무감에서 헌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십니다(루카 21,2-3).
과부가 봉헌한 렙톤 두 닢은 로마 돈으로 환산하면 동전 한 닢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미미한 액수를 바친 과부를 오히려 칭찬하십니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영성생활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지향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많은 기부와 봉사와 선행을 해도 명예욕이나 다른 이득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다면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슬프게 해드릴 뿐입니다.
어떤 일이든 일 자체도 의로워야 하지만 그걸 행하는 지향도 하느님 뜻에 맞고 순수해야 할 것입니다.
과부는 빈곤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였던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과 삶의 뿌리를
주님께 두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액수는 적었으나 오직 하느님만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바친 것입니다. 그녀는 빈곤했으나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였기에
사랑하는 분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사랑한 만큼 내놓을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전부를 봉헌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약을 했지만 어느 새 자신을 위해 뭔가를 챙기려 하는
나를 봅니다. 피곤할 때 누울자리가 생각나고,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 여겨
책과 물건들을 쌓아두곤 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기준에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먼저 챙기면서 다른 이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미루기도 합니다.
또 조건이 갖춰진 다음에야 자신을 내놓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과부처럼 순수한 사랑으로 '지금' 바로 내놓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과부가 보잘 것 없었지만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듯이 내 존재 전부를 아낌없이
봉헌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전인적 봉헌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나의 존재 전부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간, 돈, 은사, 재능 할 것없이 내 것이랄 게 없을 것입니다.
전부를 내놓을 때 주님께서는 전부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거룩한 사랑의 교환’입니다.
온갖 선이요 으뜸 선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되돌려드릴 때 비로소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우리가 찾는 행복입니다.
지금이 바로 조금 내놓고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겠다는 망상을 떨쳐버릴 때입니다.
오늘도 주님께 대한 순수한 지향과 사랑으로 나의 전부를 기꺼이 봉헌하는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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