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을 지나 재활용장으로 가는데 솜털 같은 눈발이 휘날렸다.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고참 언니와 분리수거를 했다. 그날따라 분리수거할 쓰레기가 많아서 힘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불만을 쏟아냈다. 추위에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이런 날은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구시렁댔다. 이틀 뒤 관리소장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추운데 수고한다며 휴대용 손난로를 한 상자 가져왔다. 손 시리지 않게 마음껏 사용하라고 했다. 그는 추워지기 전에 미리 마련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며 손난로를 주물러 나에게 건넸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주름이 활짝 펴지고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소장이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엊그제 투덜거린 게 마음에 걸렸다. 아침에 청소하러 나오며 손난로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군고구마처럼 뜨끈했다. 계단을 쓸며 운동장을 내다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 속에 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가을에 고구마를 캐면 수숫대로 뒤주를 만들어 방 윗목에 놓았다. 세 살 위인 언니는 아침밥을 하면서 아궁이에 고구마를 묻어 놓았다가 내가 학교 갈 때쯤 잘 익은 고구마를 손수 만든 주머니에 담아 양쪽 호주머니에 넣어 줬다. 언니의 얼굴은 군데군데 천연두 자국이 있었지만 달걀처럼 갸름하고 예뻤다.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드려 양 갈래로 땋았다.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운 효녀였다. 시골이었지만 언니가 있는 곳엔 항상 잉크병과 펜이 있었다. 글을 잘 쓴 언니는 동네의 모든 편지를 대필했다.
연애편지를 도맡아 썼지만 자신의 사랑은 이루지 못했다. 날마다 이 집 저 집 오가는 편지가 언니의 대필 편지라는 걸 알고서 우체부 총각이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철이 들어 있었다면 언니의 사랑을 이루게 해 줬을 텐데. 언니는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기에 사랑도 잘할 줄 알았다. 학교까지는 십 리를 걸어가야 했다. 언니는 내 손이 시리지 않도록 날마다 군고구마로 사랑을 베풀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내 손에 꼭 맞는 고구마를 골라 구웠다. 아궁이에서 나는 매캐한 연기와 단내가 침샘을 자극했다. 언니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가다가 먹지 말고 학교에 가서 꼭 친구와 나눠 먹으라고 당부했다.
고구마가 든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뜨끈했다. 언니의 말을 어기지 않으려고 고구마를 꺼내지도 않았다. 보면 먹고 싶을 테니까. 학교에 도착해 하나는 친구를 주고 하나는 내가 먹었다. 가을부터 겨울 방학이 끝나 봄이 올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었던 언니의 군고구마 사랑. 추운 겨울이면 언니가 더욱 그리워진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옛이야기를 하며 군고구마를 실컷 먹을 수 있을 텐데. 언니는 뭐가 그리 급한지 봄에 꽃이 지듯 서른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손난로를 힘껏 주무르니 언니가 뜨끈뜨끈한 군고구마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 준 것처럼, 언니의 사랑이 되살아난다. 김명심 | 경기도 성남시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_ 양귀자
도둑맞을 수 없는 것
'솔비'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을 때의 이야기다. 2011년 여름, 뮤지컬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장 소파에 누워 쉴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어찌된 일인지 먹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수리 기사를 불렀다. 그는 도어락을 분해하고 문을 살짝 열어 집 안을 보더니 멈칫했다. 궁금한 마음에 들여다보려고 하자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직 보지 마세요. 놀라실 거예요." 문틈으로 들여다본 집 안에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불이 바닥에 나뒹굴고 서랍은 전부 열려 있고 화장대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누군가가 급히 나가다 흘린 한쪽 귀걸이, 강아지 옆에 떨어져 있는 뚫어뻥까지. 너무 놀라 눈물만 나왔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형사들과 국과수 감식반이 와서 증거를 수집했다. 그러고는 잃어버린 물건을 알려 달라고 했다.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목록을 하나하나 추려 보니 총 2억 원어치였다. 지금껏 일한 9년이라는 시간을 모두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당시에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슴을 쳤고, 집에 온갖 보안 장치를 달고서도 공포에 떨었다. 무엇보다 날 힘들게 한 건 상실감이었다. 내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사회에 맨몸으로 던져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내게 다가와 위로하듯 안기는 강아지를 보며 '그래, 너라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도둑맞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렇게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내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집에 있으면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기에 밖에서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다가 정착한 곳 역시 마침 서점이었다. 그곳에서 긍정의 단어가 가득한 글을 읽으며 기운을 얻었다. 미술관 역시 내가 가까이하는 쉼터였다.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한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나서 전보다 폭넓은 시각을 갖게 됐다.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일들은 또 다른 삶을 개척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됐다. 집을 뒤집어 놓은 도둑은 못 잡았지만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미련은 이제 사라졌다. 돌아보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내 것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귀금속 같은 값비싼 물건 대신 직접 그린 그림이 점점 늘어났다. 내면에 집중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많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물건 사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모든 물건은 곁에 잠깐 머물렀다 떠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진정 아끼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무엇도 아닌 도둑맞을 수 없는 나 자신의 삶이다. 이런 자세로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나'라는 작품이 완성되지 않을까. 권지안 | 예술가, 방송인
지금 내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했던 생각의 결과다. _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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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고운 흔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온차 큰 환절기
감기 유의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동트는아침 님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오늘도 감동방에 좋은 글 고맙습니다..
맛난 점심 드시고
오후 시간도 행복하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안녕하세요
고우신 걸음으로
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좋은 날 되시고
행복하세요
핑크하트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