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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B팀은 어떻게 펩 과르디올라를 정립시켰는가'
By. Sam Lee
과르디올라家에는 특별한 날이 있다.
"발렌티나가 5월 6일에 태어났고 그 날은 허더즈필드와의 경기 후 우승컵을 들어올린 날이기도 합니다." 펩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두 순간들을 말했다.
펩은 올해 시즌 말 파티에서 그의 무릎에서 곤히 잠든채 열번째 생일을 보내고 있는 발렌티나, 가족들 그리고 득의만면한 시티선수들과 함께 둘러앉아 그의 인생에서의 또다른 중대한 순간을 회상했다.
"발렌티나가 태어난 날, 주앙 라포르타 회장은 제 친구와 함께 병원을 방문해 저에게 '당신이 바르싸의 차기 감독이 될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펩이 1군 감독직을 맡을 것이란 말을 들었을 당시 그는 바르싸 B팀을 이끈지 한시즌도 채 되지 않았었다.
사실 이 계획은 그로부터 몇달 전 '라 람블라'에서 한 블럭 떨어진 '호텔 로마'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처음 제안되었다.
"회장님은 그럴 배짱 없어요." 펩은 라포르타에게 말했다.
라포르타는 진지했고 "너가 배짱이 있으면 차기 바르싸 감독이 될거야." 라고 말했다.
도메네크 토렌트 (그의 스페인 하부 리그에 대한 지식은 바르싸 B에서의 펩에게 필수적이였다.)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우 좋았고 아주 힘든 한 해였습니다. 펩의 감독 첫해였죠. 그는 경기마다 계속해서 배워가야했습니다."
"스페인 테르세라 디비시온(4부리그)은 매우 매우 빡셉니다. 리그에는 많은 베테랑들이 있었고 우리에겐 매우 어린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스펀지처럼 모든 것들을 아주 빠르게 배웠습니다."
"후반기에 그들은 펩의 개념들을 더 잘 익혔기때문에 전반기보다 경기들을 훨씬 더 인상적으로 승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계속해서 뛰는 것입니다. 펩에게 있어선 마치 석사 학위를 따는 것과 같았죠."
펩도 동의했다. "틀림없이, 틀림없이 저에겐 매우 좋은 시간들이였습니다. 한 주에 한경기를 치뤄서 제 프로세스를 분석할 시간이 있었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도 언론을 다루지 않아도 되었기에 좋았습니다. 돔과 완전히 동감합니다. 최고의 학교였죠. 무엇보다도 제 첫 감독직이였으니까요! 테르세라 디비시온에서 오랜 기간 감독직을 맡은 돔이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는 경기장들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스타디움들...스타디움은 아니네요. 스타디움이랄게 없었으니까요. 잉글랜드 2부리그나 컨퍼런스 리그를 떠올리면 되겠네요. 꽤 비슷하니까요."
이 곳이 펩 과르디올라가 그의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곳이다. 6년전 선수로서 캄프 누를 의심스레 떠난 뒤, 그는 4부리그로 강등된 바르싸 B의 감독으로 돌아왔다.
"펩이 부임했을 당시 저는 유스팀에서 이미 두시즌을 보냈고 팀을 떠날 계획이였습니다. 하지만 대화끝에 그가 절 잔류하도록 설득했죠." 라고 주장이였던 마르크 발리엔테가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르싸는 4부리그에 어울리는 팀이 아니고 막 강등당했으니 다시 승격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그가 말했던 것입니다."
펩은 선수들에게 더 잘해야한다고 말했으며 즉시 기준들을 높히기 시작했다. 그는 상대팀을 분석하기위해 - 최근 뉴욕시티 감독직을 맡기위해 떠난 - 토렌트와 지금까지도 함께하고 있는 카를레스 플란차르트를 불러들였다.
이는 팀과 현재 에스파뇰 미드필더인 빅터 산체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였으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대팀이 어떻게 했는지는 그닥 보지않았지만 그들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영상들은 항상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우리가 돌파구를 찾지 못했는지, 공격진에서의 실수나 후방에서부터 충분히 잘 전개하지 못했기 때문인가에 관한 것들이였지만 항상 다른 팀을 능가하기 위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습니다."
18그룹의 지역리그로 나뉘어져있는 방대한 4부리그에서 이는 전례없던 방식이였으나 펩의 준비는 거기서 멈추지않았다; 바르싸 B팀 개막전을 앞둔 그는 직접 첫 상대팀인 프레미아 스카우팅을 위해 그들의 프리시즌 친선 경기를 관전하러 갔다.
그 일정에서는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개막전에서 그는 이목의 중심에 서있었다. 프레미아 경기에는 보통 4-500명이 오는데 펩의 데뷔전에는 2천명이 찾아왔다.
그 중에는 카탈루냐의 모든 경기를 보러다니는 그의 아버지 발렌티, 와이프 크리스티나, 두자녀 마리아와 마리우스, 많은 지인들, 세르지오 부스케츠의 아버지이자 전 바르싸 키퍼 카를레스 부스케츠 그리고 동료들과 라포르타와 치키 베기리스타인을 포함한 고용주들이 있었고 벤치에서 그의 곁에는 어시스턴트 코치인 티토 빌라노바가 함께했다.
그의 첫 감독 데뷔전은 득점없이 무승부로 끝났으나 그의 영향력은 이미 분명해보였다. 스카우팅이 성과가 있었다.
당시 프레미아의 감독이였던 큄 아야츠는 몇년이 지난 뒤 엘 페리오디코의 마르코스 로페즈에게 "바로 첫 순간부터 펩은 이미 우리가 어떻게 뛸지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팀 키퍼에게 '전환해, 전환! 더 빠르게 하란 말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라고 밝혔다.
펩의 바르싸 B팀은 발리엔티의 말을 빌리면 '바르싸 DNA'를 가진 어린 선수들로 구성되있었다. 하지만 이미 바르싸를 상징하는 점유율 축구를 잘 익히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훈련에서의 디테일을 향한 펩의 철저한 집중을 피할 수 없었다.
"어느 시점에서는 저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였죠. 펩은 몇몇 것들을 바로잡기위해 훈련을 중단했습니다. 주로 수비수들과 피보테가 그 대상이였구요. 그는 후방에서부터 공을 전개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항상 상대가 다른 방식들로 압박을 해오는 것에 대한 해결책들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저희는 훈련에서 그 해결책들을 정말 많이 연습했습니다." 라고 발리엔티는 말했다.
당시 25세로 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 중 한명이였던 디마스 델가도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펩은 후방에서부터 플레이하는 것, 공을 올바른 포지션에서 올바른 신체 자세로 받는 것 그리고 라인 브레이킹을 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선수들이 공간을 활용하길 원했고 항상 원터치 또는 투터치로 플레이하길 원했습니다. 그게 훨씬 빠르기 때문이죠. 모든 것들이 훨씬 빨랐습니다."
바르싸는 프레미아전을 무승부로 마친 뒤 다음 10경기에서 21득점을 하며 7승을 기록했지만 펩은 완전히 만족하진 못했다.
"처음에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일요일 패배 이후 월요일에는 '와 이 리그에서 플레이하는 건 불가능한데..' 또 화요일엔 '와 너무 힘들다. 다른 방식을 한번 찾아보자.' 라고 말했습니다."
예상했겠지만 이러한 의구심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수요일에 '이 방식이 내가 믿는 거야.' 라고 말했죠. 대안들, 제가 믿는 것들을 바꾸려 고려했던 방식들은 절 납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바뀌지못하는 이유죠."
펩은 바르싸 1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뒤 오래전부터 경기를 어떻게 풀어가야하는지를 결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모든 아이디어들, 캄프 누에서 주장으로 뛰었던 경험들 그리고 그의 팀이 그의 철학에 녹아들었음에도 그가 실제로 한 팀을 이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였다.
"선수들 앞에서 말을 할 때, 그들이 14살이든 바르싸에서의 제 경우엔 18살이네요, 프로 선수든 똑같습니다. 인격체들, 사람들 앞에 서있는거죠. 무언가를 하기위해 20명의 선수들 앞에 앉은 적은 그 때가 처음이였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그들에게 '너희 이렇게 해야돼' 라고 하기 전에 제가 처음으로 '얘들아 우리 이렇게 해야돼' 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요한 크라위프는 이러한 측면에서 특히 도움이 되었다.
"요한은 몇몇 경기들을 관전했습니다. 그 시즌에 우린 여러번 만났죠. 그에게 전화를 하기도했고 우린 함께였습니다. 제가 가진 의문들, 라커룸에서의 관계들, 특정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다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물론 그 시기에 저는 그와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둘은 경기 플레이 방식에 대한 거의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크라위프의 조언이 훈련장에서 도움이 된 만큼이나 그는 상시 요구되는 리더십 측면에서 특히 도움이 되었다. "그는 매니저로서의 저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감독으로서 가진 철학으로 바로 통했지만 그는 언론이나 외부 활동이 많은 선수, 우리가 해야하는 것들로부터 산만해지는 경우와 같은 일들을 다루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발리엔테는 펩이 크라위프의 조언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말해주었다. "펩은 매우 명확한 바운더리가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가 생각하기에 경우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게 두지 않았죠. 매우 명확한 코드를 가지고 있었고 규칙이나 벌금 제도들을 충실히 지켜야했습니다. 그리고 꽤 공정했죠. 모든 선수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었고 모두가 펩이 원하는 바로 그 분명한 선을 지켰습니다."
선수들은 지각, 퇴장, 11시가 넘어서까지 밖에서 놀았을 때 그리고 펩이 훈련을 열심히 받지 않는다고 여겼을 때 벌금을 내야했다.
델가도는 "펩의 캐릭터는 확실했고 마음에 들지않는 것이 있거나 우리가 더 잘해야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그의 방식대로 소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소리를 지르는 감독이 아니였고 꽤 침착하고 인내심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국에 이는 과정이였고 그 안에서 우리가 잘해가고 있었기때문이죠." 라고 말했다.
그들은 정말로 잘해갔다. 부스케츠와 페드로를 포함한 어린 선수들은 '상태가 영 좋지않은 인조 잔디에서 29, 30, 31세 선수들을 상대했다. 7경기에서 3승을 거둔 힘든시기 이후 10월 31에서 12월 초 사이에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중반부터 시즌 말까지 우리는 좋은 플레이를 하고 훌륭한 빌드업과 하이 프레싱을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라고 펩은 말했다.
델가도는 팀의 장점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경기들은 항상 승격을 노리는 카탈루냐 근방의 강팀들을 상대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선수들이였던 우린 리그와 시스템을 알며 절대 쉽지않은 그들을 상대로 절대 우리의 경기 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게 우리의 스타일이자 우리의 철학이였고 어느 팀을 상대하든 잔디가 인공이든 천연이든 우리의 방식은 항상 같았습니다. 우리는 홈과 원정에서 같은 방식으로 경기를 준비했고 그 점이 우리에게 매우 매우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즌 초 펩은 선수들에게 3연승을 하면 점심을 사겠노라고 약속했고 그는 점심을 다섯번 사야했다. 바르싸 B는 불안정했던 시기 이후 22경기에서 16승을 거뒀고 이는 4부리그 카탈루냐 그룹의 우승과 플레이 오프 스팟을 차지하기에 충분했다.
카스티요 CF와의 플레이오프 첫경기는 득점없는 무승부였지만 다음 경기를 6대0으로 이겼고 아라고네스 바바스트로까지 꺾으면서 그들은 세군다 B로 승격했다. 그리고 다섯번째 공짜 점심도.
결국 그들은 미니 에스타디에서 21경기 중 19승, 홈경기 무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펩의 거취는 시즌이 끝나기 오래전부터 성적과는 관련이 없었다.
바로 그 첫경기에서부터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조짐이 있었다.
프레미아의 재무 이사였던 엔리케 핌피넬라는 개막전 전에 크라위프 드림팀의 물리 치료사였던 하우메 렝가에게 "하우메 한가지만 말할게. 저 친구가 바르싸 감독해야돼." 라고 말했다.
10월 말, 전 바르싸 미드필더, 86 월드컵 스페인 대표팀 일원이자 레우스의 감독인 라몬 칼데레는 펩이 "스페인 최고의 감독들 중 한명" 이라고 언론에 말했다.
크라위프 자신도, 연줄이 좋은 카탈루냐 기자 루이스 마르틴에 따르면 미디 에스타디에서의 어느 오후, 경기가 아닌 수제자의 터치라인에서의 몸짓만 30분간 보고는 라포르타 회장에게 펩을 감독으로 추천했다.
당시 단장이였던 베기리스타인 또한 크라위프의 생각의 큰 지지자였다. "우리는 B팀에서의 펩의 노력과 발전을 지켜봤고 그가 1군 감독의 후보가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프랑크 레이카르트와의 어려웠던 시즌 후 우리는 감독을 교체하기로 결정했고 펩을 낙점했습니다."
라포르타 회장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요한 크라위프, 치키, 이사진의 라파엘 유스테 등 제 주변 사람 모두가 펩이 1군 감독을 맡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자들과 팬들이 당시 무리뉴와 같은 감독을 예상했기에 놀라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서프라이즈를 좋아하고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압박감을 마주하고 이 젊은 감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펩과의 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우리는 항상 5월 6일을 기념합니다. 펩의 딸인 발렌티나가 태어난 날이자 제가 그에게 우리가 그를 바르싸 감독으로 선임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한 날이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가 감독직을 두고 첫 대화를 한 것을 2월이였습니다. 레이카르트와의 시즌이 잘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를 감독으로 선임하기로 제가 결정했다고 말해주고싶어 우린 점심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크는 제가 진실하고 이 점을 미리 말해준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으며 펩을 1군 스텝에 포함시키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2월에 펩에게 그를 감독으로 선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하니 아마도...제가 그런 결정을 내릴만큼 용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라포르타의 정중한 버전이였다. 펩은 그에게 배짱이 없다고 말했었다. "맞아요!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전 그럴 배짱 있다고 말했죠!"
펩은 당시 그의 반응이 심플했다고 주장했다. "좋아요. 우린 모든 대회를 우승할 겁니다!" 라고 말이다. 그냥 기자회견에서 던지는 상투적인 말처럼 들렸으나, 라포르타는 그가 실제로 그랬다고 확인해주었다.
"당시 펩은 매우 열심히 일할 것이고 '왜 저를 감독으로 선임하고 싶어하는지 알아요. 제가 감독이면 우리가 모든 대회를 우승할 거란 걸 알기 때문이죠!' 라고 말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말이 실화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확신했다. 라포르타는 2월, 당시 37세의 4부리그도 다 치루지 않은 감독이 세계에서 가장 큰 구단 중 하나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보드진들에게 설득하기위해 충분히 모든 일들을 겪었다.
당시 탑 클럽을 지도한 경력이 전혀 없었던 펩에게 거리낌이나 의구심이 있었다고 당연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에겐 그런 것들이 없었다. 바이에른 뮌헨이나 맨체스터 시티와 같은 구단을 변화시킨 그의 방식에 대한 자신감은 바르싸에서 거둔 챔스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바르싸 B에서의 첫 몇달 동안의 시간에 탄생한 것이다.
"제가 바르셀로나, 바이언에서 그리고 심지어 여기 시티로 왔을 때도 사람들은 저에게 '여기선 그런 방식으로 못해.' 라고 말했고 저는 언제나 '인조 잔디에서 할 수 있는 것이면 여기서도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곳에서 첫시즌을 보내며 많은 시간 잘풀리지 않을 때 저는 '우린 할 수 있어, 인조 잔디에서도 우린 해냈잖아.'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방식을 계속 이어가서 더 잘해야합니다. 잘 안풀릴 때 사람들은 우리가 바꿔야한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발전해야합니다. 실제가 그 곳에 존재합니다. 저는 그해 그 실제를 보았습니다.
제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몸으로 느꼈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들과 함께 한 것은 꿈을 이룬 것이였습니다. 저는 그 시절의 많은 순간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 생애 가장 좋았던 시절 중 하나였습니다."
첫댓글 선댓후감
감사합니다🙏
@Sieger 제가더 감사합니다 ㅎㅎ
선댓
잘 읽겠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이렇게 또 바르샤 B팀 시절에 대해서 알게되네요
3연승하면 점심을 사겠다 했는데 5번이나 샀다니 ㅋㅋ
그러게요 ㅋㅋ 이악물고 뛴듯
사랑합니다
안그래도 찔끔찔끔 보고있었는데 ㅎㅎ
ㅅ ㅅ사,,,감사합니다🙏
번역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번역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양질의 글이네 잘 읽을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ㅋㅋ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펩 감독님에게는 바르셀로나 B가 감독으로서의 첫 경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기도 하지만, 철학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 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감독님은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지 궁금하기도 하네요ㅎㅎ
좋은 글, 좋은 번역 감사해요! Sieger님 덕분에 편하게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나의 우상, 펩 과르디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