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레앙쪽으로 파고들어 일드프랑스를 포위하고 트리어 대주교령을 드디어 병합하면.
대탱그리의 문양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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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도우님과 한 멀티플레이 디브리핑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서방의 부르고뉴와 동방의 모스크바입니다.
부르고뉴의 필리프 3세가 왕위에 올라 저지대의 부유한 지방을 거머쥔
1444년에서부터 역사의 쳇바퀴가 돌기 시작했습니다만.
부르고뉴 공국이 저지대를 차지하는 동안 잉글랜드는 이어진 백년전쟁 끝에 몇개의 거점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어버리고 기나긴 전쟁의 종결부를 향하게됩니다.
필리프 3세는 이를 기회 삼아 잉글랜드인들을 영국해협의 중요한 항구인 칼레에서 몰아내기로했습니다.
모든 건장한 부르고뉴의 사내들과 유럽각지의 용병대들은 부르고뉴에 모여
칼레를 거의 함락시키기에 이릅니다만.
1446년이 밝자마자 필리프 3세는 갑자기 죽게됩니다.
역사가들은 아르마냐크의 왕족과 1430년대에 투쟁한 것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지않았나
추정할 뿐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존재하지않아 필리프 3세의 죽음은 외교적 명분이 될 수 없었고
부르고뉴의 귀족들은 쇠약해진 잉글랜드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이 동의했고
긴급히 섭정회의를 엽니다. 필리프 3세의 어린 아들 샤를의 계승정당성은 확고했기에 문제가 생기지않았습니다.
섭정들은 주둔군 하나없이 버려진 칼레를 3년간 봉쇄했으며
잉글랜드로부터 소유권을 포기받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칼레의 귀환과 함께 샤를은 성년식과 동시에 대관식을 열었으며
비록 가장 어지고 현명한 이는 아니었지만 야망에 가득찼던 샤를은 공작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린 샤를의 대관식에는 수 없이 많은 귀족들이 참석하여 그를 축복해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르네 1세, 즉 앙주의 공작이자 프로방스의 지배자도 있었습니다.
이미 마흔이 다되어가던 그였지만 야망에 불타는 샤를을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는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샤를과 함께 프랑스왕실을 부셔내리겠다는 야망을 공유합니다.
르네는 Le bon roi Rene 즉 선한 지배자라고 불릴만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자였지만
애석하게도 전장에서 그의 이상한 결단들은 훗날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파행으로 바꿔버리게됩니다.
한편 르네말고도 샤를과 동시기에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할 야망찬 이가 한명 더 있었습니다.
선제후이기도한 트리어의 대주교는 샤를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밀약을 맺습니다.
야콥 폰 지르크 (Jakob Von Sirk)라는 이름을 가진, 강렬한 인상의 대주교는
옆의 강력한 부르고뉴를 이용하여 라인란트를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선제후라는 직책을 통해, 마치 보헤미아처럼 왕의 급으로 올라 진정한 신의 영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는 세속적인지 신성한지 사탄에 들린지 모를 야망을 토해냈습니다.
한편 그는 리에주 대주교령을 차지함으로서 로타링기아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프로방스군의 도움을 받아 리에주를 점령한 샤를은 예상한대로 신성로마제국의 오스트리아 황제군이
바이에른과 바덴을 거쳐 준트가우에 도달했음을 전령을 통해 전달받습니다.
하지만 준트가우에 도착한 병력은 스위스 용병대가 주력이된 2만이 안되는 작은 분견대였습니다.
황제는 리에주를 해방시켜 황제로서의 위엄과 전쟁의 승리를 동시에 가져오려고 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프랑스를 치기위해 수 많은 병력을 준비해놓은 부르고뉴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준트가우의 숲 속에서 황제군은 두배가 넘는 공국군과 사투를 벌였고
그들은 다시 황제의 영토로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그 사이 프로방스 공국군과 트리어 대주교령의 군사들은 흩어진 상태로 리에주에 도착하려는
황제군을 지연시켰으며, 결국 도착한 부르고뉴 본대와 함께 황제군은 각개격파 당합니다.
부르고뉴의 위대한 군대는 베르나르 드 돈지 (Bernard De Donzy)의 지휘를 받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의 출생지가 생소하시다면, 돈지는 부르고뉴에서 느베르 백작령에 속한 곳입니다.
부르고뉴군들은 흩어진 황제의 영토와 봉신 아래에서 소집된 군사들을 나누어서 공략하는
중세유럽에서 흔하지않은 행운을 노렸으며, 황제에게 리에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문서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르네 1세의 욕심이 개입되었습니다. 황제군과 부르고뉴 공국군이 접전을 벌이는 동안
프로방스군은 누구보다 먼저 리에주의 성벽에 도달했으며
숨어있던 리에주의 대주교를 은신처에서 끌고나와 르네 1세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프로방스를 변방 공국으로 격상하는 것과
아비뇽에 있는 교황령의 축소를 일방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때쓰듯이 보냈었으며
부르고뉴와의 협상에도 응하지않고 일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었습니다.
그의 군대는 멋대로 부르고뉴의 뤽상부르(독일어:룩셈부르크)에서 약탈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결국 3년만에 샤를의 야망은 일시정지를 하게되었습니다.
승자는 없었으며 리에주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샤를은 르네1 세를 내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왕관을 위한 도구로서 더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년 뒤 준비를 마친 샤를이 상파뉴로 병사를 파견했을때
르네는 이상한 변명을 대면서 시간을 지연하였고 결국 참여 불가 의사를 밝힙니다.
샤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이베리아의 두 군주,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아라곤은 나바라의 공작을 복속시켰기에 프랑스로부터 바스크 신민들을 해방하는데 관심이 컸습니다.
그는 나폴리 지방에서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공동으로 합니다.
반면 카스티야는 가스코뉴의 기엔에서 프랑스의 본대를 만나 아슬아슬한 회전을 이어나가고
결국 무어인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먼저 전장에서 이탈하게됩니다.
한편 두 이베리아의 군주들의 계산속이 어떠하였던,
부르고뉴의 군사들은 그 동안 일드프랑스의 옥토를 맘껏 약탈 할 수 있었으며
파리를 함락하고 중부의 부르봉에 대한 성공적인 공성전을 실시하게됩니다.
그러나 파리가 함락됬다는 사실에 들뜬 것은 샤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르네 1세는 이 기회를 살려 도피네를 점령하고 오크인의 프랑스를 주장하면서
프랑스 왕위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의 배신보다 무엇보다 머리 아픈것은
도피네는 사보이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바로 부르고뉴의 전쟁 목표였다는 것입니다!
부르고뉴군들이 적의 심장을 먼저 짖밟아 전쟁을 평안히 수행하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족제비 같은 프로방스는 그걸 기회로 삼아버렸습니다.
무엇보다 당황했던 사람은 리에주에서 프로방스군과 함께 싸웠던 베르나르 드 돈지였습니다.
베리에서의 상황이 정리되자 그의 본대는 저지대로 복귀했고, 오직 소수의 공성부대만이 베르나르의 지휘아래
도피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가 공성하려던 성이 반박살이나있고
거기에 프로방스 공국기가 휘날리고있다는 소소한 사실에 누구보다 강하게 뒷목을 잡았습니다.
결국 노르망디와 푸아투는 앙주의 공국에 편입되었으며
앙주와 프로방스만을 지배하던 르네 1세는 순식간에 부르고뉴같은 내부의 대공국으로 변신하게됩니다.
물론 샤를도 상파뉴와 베르망두아, 코 (Caux)를 손에 얻었으며
알랑송을 왕의 직할령에서 분리해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카스티야는 손해만을, 아라곤은 나바라 지방에 대한 종주권을 얻었으며
트리어 대주교 야콥은 아헨과 쾰른, 팔츠를 정복하는데 부르고뉴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주교라기보다는 한명의 전사 같았으며, 그의 죽음은
동일한 야콥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천한 신분에서 신학의 계단을 올라온 유화한 주교에게 트리어의
지배권이 넘어가게 하면서 갈등을 빚게 만듭니다.
프랑스의 파멸은 많은 나라에게 공포심을 안겨줬으며 부르고뉴의 외교술이 빛나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채 3년을 가지못했고
한황제는 페라라를 지배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제국의 수호자로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미 부르고뉴의 동맹인 상태였습니다.
비록 알프스의 산맥에서 반복된 전투는 승자를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나
대포의 첫 배치 이후 실시된 이 전투에서 이상한 전설을 만들게됩니다.
부르고뉴군을 지휘하는 귀족들은 베네치아가 고용한 용병대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군대를 알프스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는 내용의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포와 사랑에 빠진 한 귀족이 소수의 별동대를 가지고 오스트리아 뿐만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과 유럽의 심장인 빈을 함락시키고 돌아오겠다고 거침없이 주장했습니다.
그가 바로 세바스티엥 드 로셰바롱 (Sebastien De Rochebaron)
즉 포격의 세바스티엥으로 훗날 불리게되는 유럽최고의 포병장군이었습니다 (4/0/1/4).
그때는 아무도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말입니다.
한편 동방에서는 다른 사내의 꿈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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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멀티하니 정말 재미있네요.
저는 부르군디, 쉐도우님은 모스크바였습니다.
아직 서로 영향을 줄만큼 진행은 못한게 아쉽기도하고
비록 많이는 못했지만, 유로파분들과 게임한다는건 참 재미있다는걸 언제나 깨닫네요.
스팀 닉네임 Gelre 많이 친추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