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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Robert A. Hardie) 선교사의 회개와 원산 부흥운동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1. “한국 교회, 이대로는 안 된다!”
“한국 교회, 뭔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망한다!”
“한국 교회, 종교개혁 같은 대 변혁이 있지 않고는 가망이 없다!”
이제는 너무 자주 듣는 말이 되어서 그런지 다급한 외침인데도 감각이 별로 없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최근 들어 교회나 목회자와 관련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사법 당국의 처사나 이에 대한 일반 언론의 보도는 한편으로는 감정적이고 의도적인
반(反) 크리스토교(기독교) 정서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 크리스토교(기독교) 의 위기 상황에 대한
강한 경고의 성격도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경고에 대해 교계의 반응은 ‘교권 침해’, ‘편파적 보도’ 운운하며 사법 당국과 언론 기관을 향해 공세를 취하는 입장과,
이번 기회를 회개와 자성의 기회로 삼아 실추된 교회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영적 갱신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입장까지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크리스토교(기독교) 역사를 보면, 성직자와 교인들의 영적 해이, 윤리적 타락으로 인해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회개’(Repentance)와 ‘개혁’(Reformation)을 외치는 예언자들이 나타났는데,
그런 개혁의 요구를 교회 안에서 수용하여 자기 갱신의 기회로 삼는 경우엔 교회가 분열됨이 없이 영적 권위를 ‘회복’(Recovering)하고
다시 활기를 되찾아 세계 구원의 기능을 발휘하였지만,
교회 안의 기득권자들이 그런 요구를 소수의 불평이나 불만으로 몰아 제도권 밖으로
추방하면,
결국 교회는 분열되고 기득권층이 지키려 했던 교회의 권위는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개혁은 교회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가치이자 의무다.
특히 ‘개혁’을 표방한 개신교회(Protestant)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크리스토교(기독교) 역사에서
종교 개혁은 어떤 새로운 종파를 만드는 운동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원했던 것은 자기 이름을 딴 새로운 종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현상이 나타날까 우려했다.
루터도 그랬고, 칼뱅도 그랬으며, 웨슬리도 그러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다만 한 가지, 교회가
역사와 신앙의 뿌리, 본디 오염되지 않았던 모습으로 ‘돌아가는’(Returning) 것이었다.
성경의 말씀으로, 초대 교회 전통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이를 ‘환원’(Restoration) 운동이라고도 한다.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 속의 전통과 신앙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과거 속으로 들어가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교회 안에 역사했던 성령과 신앙을 오늘에 재현(Resuscitation)하는 운동이다.
시작과 근원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우리도 과거 역사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비록 1세기 조금 넘었지만 한국 개신교회 역사에는 유럽과 미국의 교회사에 전혀 뒤지지 않은 아름다운 신앙 체험과 전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어
1907년 평양에 이르러 폭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영적 각성운동은
오늘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끌어낸 원동력으로 그 역사적, 신앙적 의미가 실로 크다.
이러한 초기 영적 각성운동과 부흥운동이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永, 1865-1949) 선교사의 회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회개와 부흥운동이 오늘 한 한국교회의 위기 극복에 중요한 단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2. 선교사 하디의 노력과 한계
하디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터론토대학 의과대학에 재학 중
열풍처럼 번지고 있던
‘대학생 선교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접하고
1890년 봄 대학을 졸업한 후 터론토대학교 학생 크리스토교(기독교)청년회(YMCA) 파송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터론토대학 선배로 2년 전 한국에 파송되어 부산에서 활동 중인 게일(J.S. Gale)이
모교에
‘의료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9월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처음 몇 달은 서울에 머물면서 어학공부를 하였고
1891년 봄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부산에 거주하면서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다.
1892년 3월부터 터론토 뿐 아니라 온타리오와 몬트리올 대학생들이 캐나다 대학생 선교회(Canadian Colleges Missions)를
새롭게 조직하고 하디의 한국 선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 무렵 미국 북장로회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부에서
부산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함으로
하디는 같은 캐나다 출신 게일과 펜윅(M.C. Fenwick)이 있는 원산으로 자리를 옮겨 의료 사업을 계속하였다.
W. Scott, Canadians in Korea: Brief Historical Sketch of Canadian Mission Work in Korea, 1975, 21-22쪽.
그러나 캐나다 대학생들이 모금해서 보내주는 선교비는 1896년 6월에 중단되었고
결국 그는 가족과 함께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년 후, 1898년 5월 하디는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 소속으로 다시 한국에 나왔다.
남감리회 선교부는 2년 전에 한국 선교를 시작하면서 개성에 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수립하고 의료 선교사를 찾고 있었는데 하디와 연결된 것이다.
R.A. Hardie, “Medical Report", Annual Report of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이하 MECS), 1898, 19쪽.
하디는 개성 삼포막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후에 남성병원이 되었다.
1899년 8월부터 서울에 머물면서 강원도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고
1900년 10월 남감리회 중국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 해 12월 원산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 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R.A. Hardie, "Condensed Report of the Wonsan Circuit for the Year 1901", MECS 1901, 24-25쪽.
그는 원산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사업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목사로서 복음 전도와 목회 활동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의 목회 출발은 순조로웠다.
1901년 3월 김화 지경터에 가서 두 주일 동안 사경회를 실시한 결과
다수의 개종자를 얻어 그 중 27명에게 세례를 주고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교회를 조직했다.
그의 표현대로 “고무적인 결과”(encouraging results)로서
“가까운 장래에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전망”(look forward to growth in the near future)을 갖기에 충분했다.
R.A. Hardie, "Condensed Report of the Wonsan Circuit for the Year 1901", MECS 1901, 26쪽.
그러나 이후 결과는 그의 전망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담당한 선교 지역은 태백산맥이 가로지른 함경도와 강원도 산악지방이라 여행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에 띄는 전도 효과도 없었다. 기대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한국 교인들에게 실망만 더해갔다.
그의 1902년 원산지방 선교 보고에서 나오는 대목이다.
“지난 1년 동안 좀 나아진 면도 있기는 하지만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기대이하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은 이유로 징계를 받은 세례교인과 학습인이 여럿 있습니다.
교인 하나는 오만방자하게 굴어서 출교 처분했습니다.
또 한 명은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무기한 교회 출석을 금지했습니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2, 30쪽.
토착 교인들에 대한 치리와 징계 내용에서 당신 원산지방 교회의 ‘영적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이듬해(1903년) 보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 해 이곳 북동부 지역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보고하면서 대부분 교인들이 기대이하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 지난 일년을 돌아보아도 늘 하던 일에 그다지 큰 변화 없고,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깝고 자책감이 드는 것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목표를 낮추거나 적당하게 일을 하려는 생각을 한번도 가져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필요하다면 징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교인 수는 좀 줄었어도 그 때문에 교회가 약해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였더니 그 안에 영적 생활의 진보를 보여주는 교인들이 생겨났습니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3, 26쪽.
여전히 징계와 치리에 대한 보고가 주류를 이루고 이를 통해 교회의 ‘영적 상태’가 약간 나아졌다는 내용이다. 한국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실망과 자신의 선교 사역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갔다. 그런데 그 이듬해(1904년) 보고에 이르러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지난 해 보고서를 내면서, ‘내가 이 일을 증거하였고 성령께서도 증거하시도다’는 구절을 삽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사실 확신이 없었습니다. 쓰면서도, ‘정말 네가 쓴 거냐?’ 라고 자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제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셨고 은사를 주셨으며, 무엇보다 믿음의 은혜를 내려 주셔서
이제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땅치 않으리라.’
그분께서는 제가 구하고 생각한 것 이상을 풍성하게 내려 주셨습니다
. ‘세세무궁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영광이 있을 찌어다. 아멘.’”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3쪽.
이처럼 하디의 1902년 보고에는 신앙적 좌절감이 가득 찼다면 1903년 보고에 변화의 조짐이 보였고
1904년 보고에 이르러 확신과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1902년 보고가 한국인들에 대한 실망과 정죄로 가득 차 있다면 1903년 보고에는 약간의 변화가 보였고 1904년 보고는 성령의 임재로 이루어진 내적 변화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변화,
실망이 희망으로, 좌절이 감사로 변하는 감격의 생활을 가능케 만든 요인은 무엇인가?
바로 1903년 8월에 일어난 ‘원산부흥운동’ 때문이다.
1903년에 원산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초기 한국 부흥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런 부흥운동의 불길을 지핀 인물이 바로 하디였다.
3. 선교사 기도모임에서 시작된 회개운동
사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은 여성들에 의해 준비되고 촉발되었다.
여성 교회사학자 헌틀리(Martha Huntley)는 원산 부흥운동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903년 남감리회 소속 중국 선교사 화이트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원산에 머무는 동안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매컬리를 만나 선교사들의
영적 생활이 깊이를 더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였다.
이 모임이 발전하여 원산 선교사들은 8월 한 주간 동안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을 갖게 되었다.
1898년 남감리회 선교부 소속이 된 하디 박사는 기도회 주제를 세 가지만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 당시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가 관리하고 있던 교회들은 수적으로나 영적으로 늘어나지 않고 있었으며
지난 1년 동안 교인 여러 명을 제명하고 난 후였다.
그는 자기 목회가 완전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Huntley, Caring, Growing, Changing: A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 in Korea, Friendship Press, New York, 1984, 131-132쪽.
원산에서 여선교사 화이트(Mary C. White)와 매컬리(L.H. McCully)가 시작한 기도회가
원산 주재 선교사들의 성경공부 모임으로 발전하였던바
남성 선교사 하디(R.A. Hardie)가 여선교사들의 부탁을 받고 이 모임을 인도하였던 것이다.
화이트와 함께 기도회를 시작했던 매컬리는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서 스칸디나비아선교연맹(Scandinavian Missionary Alliance)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00년 8월 의화단사건 때 중국을 탈출하여 캐나다장로회로 소속으로 한국 원산에 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온 ‘친구’ 화이트와 마음이 통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W. Scott, Canadians in Korea: Brief Historical Sketch of Canadian Mission Work in Korea, 47쪽.
또한 선교사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한 하디는 캐나다 터론토의과대학 출신으로 캐나다 대학생선교회 파송을 받아
1890년 내한해서 부산과 원산에서 활동하다가 1898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로 소속을 바꾸었기에
W. Scott, Canadians in Korea: Brief Historical Sketch of Canadian Mission Work in Korea, 21-24쪽.
같은 선교부 소속인 화이트나 같은 국적인 매컬리의 성경공부 인도 요청에 기꺼이 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산은 캐나다 장로회와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어
화이트와 매컬리가 시작한 기도회는 자연스럽게 두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의 연합 집회로 진행되었다.
이런 준비 작업을 거쳐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1주간 동안 원산 산제동(山祭洞)에 있던 남감리회 선교부에서 원산지역 선교사 연합 성경공부 및 기도회가 열렸다
. A. Carroll, "Report of the Boarding School and General Work in Wonsan,", MECS, 1903, 53쪽.
이 모임에 참석한 선교사로는 화이트와 매컬리, 하디 외에 남감리회 소속으로 원산에서 활동하던 저다인(J.L. Gerdine)과 캐롤(A. Carroll), 노울즈(M. Knowles)가 있었고 화이트와 함께 원산을 방문한 서울 선교사 하운셀(J. Hounshell)이 있었다.
서울 배화여학교 교사로 있던 하운셀은 여름방학을 맞아 화이트를 안내하여 원산을 방문,
3주간 머물면서 캐롤과 노울즈의 안내로 원산 지방 선교 상황을 둘러보고 주변 경치도 구경하였다.
J. Hounshell, "Report of Miss Hounshell", MECS 1903, 57쪽.
형식으로 보면 남감리회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에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매컬리가 참석한 형태였다.
또한 성별로 보면 여자 선교사 5명에 남자 선교사 2명으로, 여선교사들이 시작한 기도회에 남자 선교사들이 초청받아 참여한 형태였다.
기도회 동기를 부여한 측도 여성들이었고 기도회를 주도한 이들도 여성들이었다.
더욱이 기도회에 참여한 여성들은 ‘영적 생활을 더 깊이’ 하려는 신앙적인 동기가 분명했으나 강사로 초청받은 하디는 선교 업적 부진으로 인한 ‘영적 절망 상태’에서 피동적으로 기도회에 임하였다. 그런 하디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중 ‘성령 강림’을 체험하였다. 하디 자신의 증언이다.
“지난 달 우리 선교부 소속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원산을 방문한 선교사 부탁으로
한 주간 동안 성경공부를 하였는데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크리스토와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약속하신 바를 얻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얻지 못했던 것이 그동안 사역이 실패한 원인이었다는 것과 아무리 정식하고 힘써 일하더라도
주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 없이는 모두 소용없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3, 26쪽.
하디는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이처럼 수고의 결과가 없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니,
내 자신에게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점점 더 깨닫게 된 것은 내게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께서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그 성령의 능력이 없는 것이 사업 실패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3, 26쪽.
그는 깨달은 바를 동료(후배) 선교사들에게 고백했다.
그러자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같은 고백이 터져 나왔다. 기도회에 동참했던 져다인의 증언이다.
“우리 모두는 한 마음이 되어서 우리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비전을 얻기를 사모하였고
마침내 응답을 얻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는 우리 모두에게 없었던 능력과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복 주시는 사귐 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삶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쉽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며
기꺼이 주시는 그 능력 안에서 우리 수고는 헛되지 않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J.L. Gerdine, "Report of J.L. Gerdine", MECS 1903, 31쪽.
기도회를 먼저 시작했던 여성 선교사들도 같은 체험을 하였다. 우선 화이트와 함께 원산을 방문해서 기도회를 시작했던 하운셀의 증언이다.
“우리가 함께 성경 공부를 했던 한 주간은 참으로 풍성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것을 꺼내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 과거의 삶이 능력의 삶이 되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아버지의 도움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침으로 깨끗하게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J. Hounshell, "Report of Miss Hounshell", MECS 1903, 57쪽.
하운셀과 화이트를 손님으로 맞이했던 캐롤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
“금년은 은총의 비가 흠뻑 내림으로 아주 훌륭하게 마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 우리 선교부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열었는데 서울에서 하운셀 양과 중국에서 화이트 양이 우리와 합류하였습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식구들도 우리와 함께 하였는데 주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변화산상의 베드로처럼 우리는 서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내년에는 우리에게 임하신 그 능력이 우리가 위하여 사역하고 있는 토착 교인들에게도 임하기를 위해 노력하자던
우리의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A. Carroll, "Report of the Boarding School and General Work in Wonsan,", MECS 1903, 53쪽.
1년 안에 선교사들이 받았던 ‘능력의 은총’이 토착교인들에게도 임하기를 바랐던 캐롤의 희망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기도회 중에 제일 먼저, 가장 강력하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했던 하디가 그 매개가 되었다.
4. 토착교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자백운동
선교사 연합 기도회에서 ‘성령 충만’ 은혜를 체험한 하디는 기도회 직후
맞은 첫 번째 주일(8월 30일) 예배 때 원산교회 토착교인들 앞에 섰다.
그의 증언이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어 첫 번째로 명하신 것은
내가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였던 이곳 사람들 앞에서 내가 실패하였다는 것과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괴롭고 창피한 일이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
내시려고 이 일을 선하게 여기시어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지난 수 년 동안 나는 한국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해 오는 동안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오래 지속되는 그런 회개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아는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것을 지식수준에서 받아들일 뿐,
이를 실제적이고 생생한 체험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주 적었습니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3쪽.
선교사가 토착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디의 표현대로 “괴롭고 창피한”(painful and humiliating) 일이었다.
그러나 하디는 강력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자기 잘못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이런 진솔한 회개가 토착교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돌아온 첫 번째 주일 아침에 원산 교인들 앞에서
수치와 곤혹스런 얼굴로 교만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자백하면서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말하게 될 때 그들은 처음으로 진정한 자백과 회개의 체험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선포하는 나의 말을 듣고,
또 그 후 3주간 동안 나의 생활과 체험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고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얻었습니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3-24쪽.
하디가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자백하자
그 예배에 참석했던 토착 교인들 중에서도 그동안 선교사를 마음으로 미워하고 속였던 잘못을 자백하는 이들이 나왔다
. 바로 그 무렵 하디는 미국의 스칸디나비아선교회 회장 프랜슨(F. Franson) 박사가
극동 아시아 순방 중 한국에 들러 원산에서 집회를 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스웨덴 출생으로 미국에 이주한 프랜슨(1852-1908)은 무디와 함께 복음 전도자로 활약하였고
1890년 스웨덴인들을 향한 선교단체 스칸디나비아선교회(The Scadinavian Missionary Alliance)를 창설하였다.
그의 설교는 무디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것이었다.
≪キリスト敎人名辭典≫, 日本基督敎團出版局, 東京, 1986, 1,306쪽.
하디는 프랜슨 집회를 준비하는 뜻에서
원산 지방에서 사역하는 한국인 전도인들과 선교부에서 일을 돕고 있던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매일 기도와 성경 공부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임을 시작한지 며칠이 지난 후 로스(J.B. Ross)의 병원에서 조수 일을 하던 최종손이 “죄책감 때문에 며칠 동안 고민을 했다”면서 자기 죄목을 적은 종이를 가지고 나와 읽으면서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다시 며칠 후에는 독신 선교사 사택에서 일을 하던 강태수가 역시 자기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양반’ 출신으로 로스의 어학 선생으로 있던 진천수가 자기 아내를 구박한 것과 교만과 위선, 탐욕 등의 죄를 울면서 자백했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4쪽; J.L. Gerdine, “Report of Wonsan Circuit", MECS 31쪽.
이로써 선교사에게서 시작된 ‘공개적인 죄의 자백’이 한국인 교인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5. 서울과 개성, 인천으로 번진 부흥운동
1903년 10월 프랜슨의 원산 집회가 원산 장로교회에서 초교파적으로 1주일 동안 열렸다. 프랜슨은 원산 집회를 마친 후 서울로 올라와 11월 2-3일 상동교회와 제중원에서 집회를 하였고 “프란손 목사의 전도하심”, <신학월보>, 1903.12, 537쪽.
평양으로 내려가 사흘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통역을 내세운 프랜슨 집회는 기대한 만큼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다만 그의 집회는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에게 “노련한 복음전도자이자 기도의 사람”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5쪽.
에게 나타나는 능력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하디는 프랜슨 집회 후 자신이 담임한 원산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 집회에서 한국인 교인들의 ‘집단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회 기간 내내 교인들은 앞서 죄를 자백한 사람들의 경우처럼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였다. 자백의 열기가 너무 고조되어 설교를 할 수 없었던 것도 두 세 차례나 되었다. 설교가 끝나자마자 교인들은 다투어 일어나서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성경 본문 어디를 읽든, 어떤 문장으로 설교를 하던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쪼개놓는 것 같았다. 집회가 끝날 즈음에는 교인 대부분과 상당수 다른 사람들까지도 회개하였다. 모두가 하는 말이 이처럼 구체적이고 생생한 신앙 체험을 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5쪽.
계속해서 하디는 1904년 1월 원산지방 연합 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한 주간 예정이었으나 한 주간 더 연장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집회가 끝날 즈음엔 참석자 모두 “성령 충만”(fullness of Holy Spirit)을 받고 헌신을 약속하였다.
이런 교인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선교사들은 원산지방 교회에 7개 속회를 조직하였고 속장들을 임명하였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6쪽.
그리고 1월 말에 열린 정기 개성지방 사경회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이 집회는 하디를 비롯하여 캐롤과 노울즈, 그리고 저다인이 인도하였는데 개성 주변의 지방에서 올라온 교인들이 역시 공개적으로 죄를 자복하며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다
. J.L. Gerdine, “Report of Wonsan Circuit", MECS 1904, 32쪽.
부흥회 참석자들의 신앙적 열기가 대단하여 집회는 예정보다 1주일을 더 연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집회가 끝나는 날(2월 9일) 하디는 인천에서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6쪽.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원산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수반한 집단적 부흥운동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디를 비롯한 남감리회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우선 하디는 원산 집회를 마친 후 자신의 선교 구역인 강원도 동부 지방으로 가서 지경터와 새술막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이곳은 그가 3년 동안 선교하였지만 실망만 안겨주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찾아간 그곳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12일간 계속된 새술막 사경회에서는 “지난 3년 동안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교인들이 거의 다 회심을 체험하는
R.A. Hardie, "R.A. Hardie's Report", MECS, 1904, 27쪽.
결과가 나타났다. 하디는 계속해서 2월 26일부터 10일간 개성남부교회에서 열린 개성지방 연합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W.G. Cram, "Report of Songdo Circuit", MECS, 1904, 37쪽; Mrs. W.G. Cram, "Where are the Reapers?", The Korea Methodist(이하 KM.), Dec., 1904, 14쪽.
이 때에도, “모든 형제자매가 숨은 죄와 들어난 죄를 발키 단하여 모도 슬푼 마암과 통곡함으로
죄를 자복하고 사함을 엇은 후에 성신 충만함을” “숑도부흥회”, <신학월보>, 1904.7, 293쪽.
받았다. 그리고 4월에는 서울 자교교회에서 10일간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이 때 유경상 · 김계명 · 지수돌 등이 공개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체험했다
C.G. Hounshell, "Pai Chai Haktang", MECS, 1904, 35쪽; J.R. Moose, "Report of Seoul Circuit", MECS, 41쪽.
. 그리고 이 부흥회에 참석했던 배화여학교 교사와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도
“죄를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J. Hounshell, "Carolina Institute", MECS, 1904, 53쪽; "Carolina Institute", KM., Jan., 1905, 18쪽.
이것이 배화여학교 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때까지 하디의 부흥회는 자신이 속한 ‘남감리회 선교구역’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면서 그는 다른 교파 교회 선교지역에까지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즉, 9월 20일부터 ‘미감리회’ 소속인 서울 정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처음 1주일 동안은 ‘회개’란 주제로 설교하여,
“여러 형제자매들이 성신의 책망하심을 밧아 일쳬 회개하고 죄를 자복한 후 사유하심을 밧앗스며”,
다음 1주일 동안은 ‘성신’을 주제로 설교하여, “죄 사유하심을 엇은 모든 형제 자매들이 성신의 츙만하심을” 받았다.
“졍동회당에셔 부흥회로 모힘”, <신학월보>, 1904.11, 427쪽.
이 부흥회를 통해 정동교회교인 뿐 아니라 상당수 배재와 이화학당 학생들이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하고 회개하였다
. "Revival Meeting in Seoul", KM, Nov., 1904, 7쪽; L.E. Frey, "Ewa Haktang - Seoul", The Annual Report of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KWC.), 1905, 5쪽; "Revival at Ewa", The Korea Mission Field(이하 KMF.), May, 1906, 133쪽.
서울 집회를 마친 하디는 무스(J.R. Moose)와 함께 평양으로 가서 10월 14일부터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기도회를 가진 후
10월 16일부터 부흥회를 열었는데 역시, “전도인을 포함해서 상당수 교인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자백하였다.”
"Revival Services in Pyeng Yang", KM., Nov., 1904, 7쪽.
그리고 이 부흥회를 계기로 평양지방에서는 교인들의 교회 자립 열기가 고조되어
토착 전도인 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성미(誠米)와 십일조(十一條) 운동이 전개되었다
C.D. Morris, "Self Support and Self Sacrifice", KM., Dec., 1904, 11쪽.
.
계속해서 하디는 11월 1일부터 1주일 동안 인천 제물포교회에서도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집회가 수 일 동안 계속되면서 1백 명에 달하는 교인들이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하고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마음 속 깊이 소원하다가 결국 많은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다.”
E.M. Cable, "Another Wonderful Revival", KM., Dec., 1904, 12쪽.
. 특히 이 집회에서 “질투와 사랑이 없었던 죄를 회개한” 전도부인들과 여성 교인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자원해서 남양 · 부평 · 강화 등지로 나가 전도하는 열기를 보였다
M.R. Hillman · L. A. Miller, "Report of Chemulpo Church", KWC., 1905, 26-27쪽; M.R. Hillman, "A Wonderful Week", KMF., Aug., 1906, 183쪽.
. 인천 집회로 1차 하디 부흥회는 일단락되었다.
하디는 인천 집회를 마치고 곧바로 안식년 휴가를 얻어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휴식을 취한 후 1906년 8월 귀환하였다.
6.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도화선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이 8월에 원산에서 여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모여 기도와 성경
공부 모임을 가진데서 비롯되었음은 이미 살펴보았다.
이러한 선교사 연합 모임이 1905년 9월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stic Missions in Korea) 결성으로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선교사들의 ‘초교파적’ 연합 기도회와 성경공부 모임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1906년 여름에도 그러한 모임이 원산과 평양 두 곳에서 마련되었다.
원산에서는 8월 5일부터 1주일 동안 ‘제3회 원산지방 사경회’가 열렸는데 감리교의 하운셀(C.G. Hounshell), 동아기독교의 펜윅(M.C. Fenwick)이
경건회를 인도하였다.
성경공부 모임이었음에도 선교사들은 죄의 두려움과 신앙의 빛을 체험했다. 사경회에 참석했던 치과의사 한(D.E. Hahn)의 증언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속속들이 파헤쳐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빛을 보게 되었다. 죄를 이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모든 참석자들의 단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죄의 무서운 모습을 보이시고 또한 죄 없으신 그리스도에게 환한 빛을 보이셨으니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D.E. Hahn, "Wonsan Bible Conference", KMF., Aug., 1906, 190쪽.
평양에서도 8월에 1주일간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합 기도회가 열렸는데 마침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하디가 인도하였다.
그는 요한일서를 본문으로 택하여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달려 있으며 그 거룩한 교제는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것임” William N. Blair, "The Korea Pentecost and Other Experiences", The Korean Pentecost and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 The Banner of Truth Trust, Edinburgh, 1977, 66쪽.
을 강조하였다.
하디가 인도한 ‘요한일서’ 공부는 참석한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때 “宣敎師들이 聖神의 感動을 受야 各其 罪를 自服엿고 其中에 特別히 李吉咸[G. Lee] 宣敎師가 聖神의 充滿을” 변린서 · 강규찬 · 김선두, ≪平壤老會地境各敎會史記≫, 광문사, 평양, 1925, 9쪽.
받았다. 평양 부흥운동에 대한 기록을 남긴 선교사들은 대부분 이 하디의 집회를 평양 부흥운동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모임에 참석했던 장로교 선교사 블레어(W.N. Blair)의 증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간구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어 은혜의 한 주간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집회 중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신 것은 가슴을 찢고 눈물로 통회 자복하는 고백이 없이는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8월 집회를 마친 후 우리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강하신 능력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령 세례가 아니고는 우리 뿐 아니라 고난의 시간을 목전에 두고 있는 한국인 형제들에게 살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일본인들을 미워하는 것을 회개해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깨닫고, 죄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행하던 죄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님만 구주로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지녀야 한다고 느꼈다. 우리는 전체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해져야 하며 교인 각자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 나라가 처한 상황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William N. Blair, "The Korea Pentecost and Other Experiences", 66-67쪽.
비로소 장로교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부흥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부흥운동의 필요성을 단순한 종교 · 신앙적인 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정치 · 사회적 상황에서 읽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의 사회적 좌절감이나 크리스스토교(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로 인한 혼란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선교 의지가 부흥운동의 필요성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디의 평양 집회는 장로교 선교사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해 9월 서울에서 열린 북장로회 선교회 연례회의에 참석했던 평양 선교사들은
마침 내한 중인 미국의 부흥 전도자 존스턴(H.A. Johnstone) 집회에 참석해서 감동을 받았다.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위원이기도 했던 존스턴은 인도 · 일본 · 중국 등 아시아 선교 현장을 둘러보고 서울에 들러 영국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던 부흥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Mrs. J.F. Preston' letter to Mrs. Wiley, Sep. 28, 1906; 존스턴은 1906년 9월 21일 황성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연회도 가졌다. <대한매일신보>, 1906.9.16; <만세보>, 1906.9.21.
. 존스턴은 10월 평양에도 내려갔다.
존스턴의 평양 집회는 선교사 뿐 아니라 한국인 교인들에게도 감명을 주었다.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는 길선주가 부흥운동에 공개적으로 관심을 표명한 것이 이 때였다. 존스턴 “博士는 章臺峴敎會에 來하야 說敎할새 웰쓰地方과 印度敎會 復興狀況을 說明하고 ‘朝鮮에서는 누가 聖靈充滿을 밧고저하느냐’ 願하는 者는 擧手하고 起立하라 하매 감히 應答하는 者가 업섯다. 當時에 아직 長老인 先生[길선주]이 感動하는 바 잇서 擧手하고 이러서매 博士는 朝鮮의 復興을 預言하고 도라갓다.” 김린서, “영계선생소전”, <신학지남>, 1932.3, 33쪽.
존스턴 집회 후 평양의 선교사와 교인들은 평양 교회의 부흥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G.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KMF., Mar., 1907, 33쪽.
특히 하디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받았던 리(G. Lee) 선교사는 10월부터 “平壤 諸聖職과 勸察들을 景昌門內 女傳道會堂에 會集고 一週日間 每夜에 約翰一書를 敎授엿대” 변린서 · 강규찬 · 김선두, ≪平壤老會地境各敎會史記≫, 9쪽.
‘요한일서’는 바로 하디가 8월 집회 때 본문으로 택했던 성경이었다.
평양 교인들의 기도회는 1906년 12월까지 계속 되었고 선교사들은 성탄절을 기해 1주일간 특별기도회를 갖기도 하였다. G.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33쪽.
이 같은 기도회 준비를 거쳐 1907년 1월 평양 남자 사경회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마침내 ‘평양부흥운동’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